매일성경 묵상
하나님 나라의 참 가족, 참 지도자, 참 그리스도인 [막 3:20-35]
 – 2024년 02월 15일
– 2024년 02월 15일 –
가버나움에서의 사역이 폭발적인 반응과 함께 진행되고 있을 때 주님의 친족들이 주님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붙들러 온다. 또 일단의 서기관들이 주님의 축귀 사역이 귀신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주님은 이들의 논리 허점을 지적하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이것을 기회로 삼아서 주님의 축귀 사역이 실제로는 사탄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인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사건이라고 설명하신다.
    
    
    
1. 예수가 미쳤다? (20~27절)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주님을 따르는 큰 무리가 베드로의 집을 찾았고, 주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이(20절)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그때 예수님의 친족들과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서기관들, 예수님의 가족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친족들(호이 파르 아우투)로 번역된 단어는 직역하면 ‘그에게 속한 사람들’이다. 친족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자신들이 아는 예수와 전혀 다른 행적에 친족들은 예수가 미쳤다고 충분히 생각했을 수 있다. 친족들은 예수를 잘 진정시켜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찾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본문은 주님과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에는 ‘미쳤다’라는 상태가 귀신 들린 상태로 간주하던 시대였으므로 아마도 친족들은 예수가 귀신 들린 상태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예루살렘에서 올라온 서기관들이 예수가 바알세불에 붙들려 있다고 비난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그들은 예수가 바알세불이 들렸고 귀신들의 우두머리를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주장을 폈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갈릴리 사역에서 주님이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기관들은 결국 주님이 주술을 행한다고 비난한 것이며, 이는 매우 심각한 비난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주술은 중범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특히 바알세불이라는 단어는 명백하게 사탄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육신적으로 가까운 관계가 반드시 가까운 것은 아니며, 진정한 이해가 없는 가족은 진정한 가족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친족들이나 서기관들이나 혈연적인 관점으로만 바라보고 해석하는 편협함이 도드라진다. 주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것이지만, 역시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 확실하다.
    
친족들과 예루살렘에서 올라온 서기관들의 모함에 대해 주님께서 직접 반박하신다. 그들의 논리 뒤에 자리 잡고 있는 상식적이고 우매한 부분을 지적하신다. 만약 사탄과 다른 귀신들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면 그들의 패배는 곧 사탄의 세력에 대한 타격을 의미하기에 귀신을 쫓아낸 예수님의 사역은 사탄의 역사일 수는 없는 것이다(23~27절).
    
문맥에서 ‘강한 자’는 사탄을 의미하고, 강한 자를 결박하는 사람은 사탄의 나라를 결박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예수님을 지칭한다. 이는 주님이 강한 자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통해 사탄의 나라를 결박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표현들은 유대 묵시 사상의 특징임과 동시에 이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확대되고 있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2. 성령을 거스르는 죄(28~30절)
성령을 거스르는(모독하는) 죄(블라스페미아)는 보통 “하나님을 대항하는 행위나 말”을 일컫는 단어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헬라어의 용례는 “중상” 혹은 “모독” 등으로 사용된다(롬 3:8; 고전 10:30). 마가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인간의 모든 죄가 용서될 것이라고(28절) 말하지만, 단 하나의 예외가 있는데,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29절).
    
본문에서 ‘성령을 모독하는(거스르는, 훼방하는) 자”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 나라 사역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는 직전의 서기관들이 폄훼하고 모함했던 주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가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드러나고 있음에도 이것이 귀신의 힘을 빌려 한 것이라고 폄훼하는 태도와 같은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30절은 이렇게 정리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는 악한 귀신이 들렸다.” 하고 말하였기 때문이다(새번역_30절).”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는 것이 귀신 들림을 인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죄를 범한 사람들이 받게 될 형벌을 가리켜 ‘영원한 죄에 처한다’라고 말씀하신다.
    
    
    
3. 진정한 하나님의 가족은? (31~35절)
예루살렘에서 올라온 서기관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주님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주님을 밖에서 찾았다. 주님은 33~35절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 언약공동체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는 사람들을 선포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주님의 육신의 가족들이 분명히 밖에 서 있었는데, 그들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은 채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며 그들이 새로운 가족 공동체 구성원이라고 선포하신다는 점이다.
    
물론 주님께서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가족 구성원에서 완전히 배제된다는 사실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주님의 의도는 분명하다. 주님 안에서 새롭게 맺어질 하나님 나라 가족 연대를 말씀하시려는 것이었다.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다. 이것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도의 핵심이다.
    
3장은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고 계시는데도 성령을 거슬러 말하고 행하는 사람들과 주님의 가족임에도 그가 귀신 들렸다고 생각하는 육신의 가족들을 함께 등장시켰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 세대에서는 거절당하지만, 하늘 아버지를 잘 믿는 참 가족으로서의 제자들을 포함하는 일단의 무리들을 등장시켜 그들에게 둘러싸인 주님의 모습을 보이면서 마무리한다. 이를 통해 마가는 독자들에게 누가 하나님 나라의 참 가족인지를 분별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미쳤다는(귀신 들렸다는) 친족의 오해와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왜곡된 비난에 맞서, 주님은 자신의 사역이 사탄의 진영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성령의 사역임을 밝히신다. 우리 시대 주님에 대한 왜곡도 별반 다르지 않다. 주님을 제대로 알아야 할 교회 안의 성도들부터 자기 생각의 틀에 끼워진 주님으로 오해한다. 자신의 평안과 성공을 위한 도구로 인식하는 것도 다반사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을 빛내줄 도구로밖에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지금 이 시대는 이처럼 하나님을 가볍게 믿는다.
    
-친족들은 주님이 미쳤다(귀신 들렸다)는 소문을 듣고 억지로 잡아 데려가려고 찾아왔다. 분명 주님을 위한 일이었다. 하지만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은 베드로처럼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사탄의 일에 동조하는 불신앙이었다. 육신적으로 가까웠을지 모르나, 주님을 잘 몰라서 거역하는 자들이 되고 만 것이다. 혹시 나는 주님이 내게 익숙하기만 존재가 되어 버리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주님은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오셨다(23~27절). 주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사탄을 결박하고 어둠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영적 전쟁이었다. 여전히 어둠의 세력은 완강히 저항하나 부활하신 주님의 권세를 지닌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속한 주님의 제자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낳는 사역으로 계속 싸워 나가야 한다.
    
-인간의 악한 속성과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에 속한 삶의 가치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열정적인 삶을 종종 오해한다(20~22절). 더 적극적으로는 박해하기까지 한다. 주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이 사역하셨으나, 미쳤다는 오해와 귀신에 들렸다는 평가를 받으셨다. 심지어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심한 모독도 받으셨다.
    
-서기관들은 주님이 바알세불이 들렸고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다. 율법을 가장 잘 알고 진리를 지키는 자로 자처하면서도 진리 자체인 주님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주님께서 주시는 새 언약의 축복인 “사죄의 은총”을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 되었다면 우리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오해와 편견, 왜곡들이다. 주위의 오해와 모독을 감수하며 새로운 하나님 나라 삶의 방식을 고수할 의지가 있을까?
    
-주님은 바리새인의 왜곡된 비난이 성령을 모독하는 용서를 받지 못할 죄임을 지적하신다(28~30절). 이 죄는 주님의 종말론적인 사역에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부정하는 죄이다. 마치 발람과 발락처럼(민 22~24장), 하나님 나라 진행을 방해하는 반역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사람 사이의 죄는 용서의 여지가 있으나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심판을 받게 된다. 사사로운 시기와 악감정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족 질서를 보여주신다(33~35절). 하나님 나라의 가족은 혈연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이상과 실천적 순종으로 맺어진다. 명목상 붙일 수 있는 명칭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실재이자 현실이다.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무장할 때만, 인간적인 관계로 탈진하지 않고, 의미 있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가르침이 가족을 외면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가족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함께 보여줄 때, 가족들도 “함께 둘러앉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변화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가족은 주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이다. 이 기준대로라면 주님도 가족을 영원히 잃을 수 있었다. 주님과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복종하는 관계가 영적인 가족 됨을 결정한다.
    
    
*진짜와 가짜는 늘 구분이 어렵다. 때로 가짜 안에 진짜의 요소가 더 많을 때도 있다. 겉과 속이 다를 수 있다. 오래 봐야 알 수 있고 겪어봐야 알 수 있는 것이 “참”이다. 이런 측면에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다”라는 주님의 경고는 치명적이다. 내 안에 본질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겉만 치장하는 “가식의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속에 꽉 찬 것을 드러내는 “가시의 사람”이 될지가 결정될 것이다.
    
*본문은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참 가족이 누구이고 누가 참 지도자인지를 결정하는 명확한 기준을 말씀해 주신다.
    
*먼저 참 가족은 육신적인 친족도 아니고 율법을 잘 아는 자도 아닌, 주님을 통해 드러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임을 분명하게 선언하신다. 주님은 이 기준을 확고하게 선포하셨다. 주님의 가족들조차도 이 범주에 들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 주저하지 않으셨다.
    
*참 지도자는 제대로 아는 자일 뿐 아니라 그 지식에 자신의 삶을 건 사람이다. 자기 자신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설득하지 못하는 사람은 참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율법에 정통한 서기관들은 주님이 바알세불이 들렸고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왜곡하며 비난했다. 그들은 열두 제자들보다 더 율법을 잘 알았고 진리를 지키는 자로 자처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정작 진리 자체인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눈앞에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하는 지식이라면, 아무리 많이 알아도 소용없다.
    
    
*그렇다면 참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일까? 서기관들의 비난에 주님은 분명하게 변증하셨다. 나라나 집이 자기들끼리 싸우면 설 수 없듯이 사탄이 자기들끼리 분쟁할 리 없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더 강한 주님이 사탄을 결박하여 이긴 사건이다.
    
*여전히 사탄의 세력은 강력하다. 하지만 주님과 함께 이미 하나님 나라는 시작되었다. 역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가공할 만한 악의 위세를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 세력을 멸하실 때까지 더 강한 주님을 의지하고 의지해야 한다. 주님께서 의지하셨던 그 성령을 의지하는 자, 그 성령의 역사를 신뢰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다.
    
    
*믿지 않기로 작정하면 절대 믿을 수 없다. 증거가 부족하거나 논리가 허술해서가 아니다. 욕망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영성을 무디게 내버려 두면 그렇게 된다. 종교적인 열심이나 과거의 신앙 이력으로 결코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참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이루신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는 과거 완료형의 믿음으로 지금, 여기에서 성령을 의지하며 살아내는 현재 진행형으로 산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는 미래 완료형의 소망을 품고 산다.
    
    
    
    
*주님, 진짜 같은 가짜의 삶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추구하겠습니다.
*주님,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을 따라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가족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는 말씀을 새기겠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스데반의 설교_모세 이야기 [행 7:17-36]

스데반은 출애굽의 이야기 가운데 중요한 대목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모세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는 모세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바로 공주의 아들로 입양된 이야기로 시작하고, 청년 시절 애굽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2차 투옥과 하나님의 적극 개입 [행 5:12-26]

산헤드린 공회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고 하나님은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지속적으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신다. 이에 시기로 가득한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다시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