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주님과 함께 있기 [막 4:35-41]
 – 2024년 02월 19일
– 2024년 02월 19일 –
주님의 비유에 이어서 네 가지 이적을 소개한다. 마가는 이와같은 이적들을 통해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한다. 본문에서 주님은 큰 광풍을 잠잠케 하심으로 자연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신다.
 
주님께서 광풍을 진압하신다.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도 함께 다룬다. 마가는 이 기사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확실하게 드러낸다. 구약의 배경에서 자연에 대해서 명령을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외에 상상할 수 없다. 피조 세계에 대한 지배권은 당연히 하나님의 통치 영역으로 간주하였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연에 대해서도 명령하실 수 있는 하나님과 같은 권위를 지니신 분으로 묘사된다.
 
하나님 나라 비유를 들려주시고 해석해 주신 저녁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다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신다. 제자들이 여러 배에 나눠 타고 항해를 시작한다. 큰 광풍이 불어 배가 침몰 직전까지 이른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배의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급히 깨우며 자신들을 돌보지 않는 것에 대해 원망을 내비친다. 주님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신다. 그리고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신다.
 
 
 
1. 광풍을 만난 제자들과 주님(35~38절)
35~36절은 비유를 통해 제자들을 가르치신 주님께서 무리를 떠나서 갈릴리 호수의 다른 곳으로 건너가자고 제안하신다. 이는 이후에 광풍을 제압하시는 기사를 통해 드러났듯이 제자들에게 관심을 둔 사건임을 알 수 있다. 37절의 ‘큰 광풍’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폭풍’이라고 직역할 수 있는데, 일상적으로 ‘지진’을 의미한다. 문자적으로는 “흔들림”을 나타낸다. 큰 광풍이라고 했으니 일반적인 풍랑이기보다는 매우 거센 바람을 동반한 돌풍이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갈릴리 호수는 갑작스럽고 사나운 돌풍으로 유명하다. 주님께서 많은 비유를 통해 제자들을 가르치신 후에 갈릴리 호수의 다른 곳으로 떠나자고 말씀하셨는데, 마침 그때 ‘큰 광풍’이 불었다는 것은 이 돌풍이 우연한 것이 아닌, 주님께서 의도하신 상황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지속적인 사역으로 인해 주님은 지쳐서 이내 주무시게 되었고 갈릴리 바다에 잔뼈가 굵은 제자들은 어렵지 않게 배를 전진시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늘 일어나는 돌풍에 대한 대처도 능숙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날의 돌풍은 달랐다. 매우 사나웠다. 광풍으로 인해 배 안으로 많은 양의 물이 유입되었다. 마가의 이런 상황 묘사는 제자들이 능숙하게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주님은 주무신다. 제자들은 혼비백산하여 혼란스러웠지만, 주님은 이런 상황에서도 샬롬을 잃지 않으셨다. 이런 상황을 제자들의 외침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38절)” 라고, 호소했다. 문자적으로 “우리가 망하게 된 것이 당신에게는 아무런 관심의 대상도 아닙니까?”라고 직역할 수 있다. 이 표현은 이 상황에서 어서 도와달라는 표현일 수도 있고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주무실 수 있느냐는 불평일 수도 있다. 물론 불평일지라도 자신들이 처한 절박한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한 것은 확실하다.
 
예기치 못한 큰 광풍에서 혼비백산하여서 할 수 있는 모든 조치가 무용지물이 되었는데 그래도 주님을 찾은 것이다.
 
 
 
2. 주님의 꾸지람(39~40절)
급박하고 간절한 제자들의 요청에 주님은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셨다. 피조 세계에 대한 주님의 권위를 “꾸짖으셨다”라는 표현으로 생생하게 드러낸 것이다. 주님의 꾸짖음에 바람이 잔잔해졌다. 또한 주님께서는 바다를 향해서도 잠잠하고 조용히 하라고 명령하신다. 이에 “아주” 잔잔해졌다(39절).
 
주님은 바람과 바다가 악한 세력인 것처럼 꾸짖으시고 조용해지라고 명령하셨다. 제자들은 “저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41절)”라며 놀란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바다와 바람을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주님의 모습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마가는 이렇듯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정체성을 매우 노골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주님의 시선은 제자들에게 고정된다. 그 시선은 매우 안타까운 것이었다. 제자들이 무서워하고 두려워한 것은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친 것을 들었음에도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앞 단락에서 그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이미 이 땅 가운데 임한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주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그 가르침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는 데 실패하고 있다.
 
본문에서도 제자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갈릴리 호수의 ‘큰 광풍(돌풍)’으로 인해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인식하는 데 실패한다. 주님의 꾸지람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도는 “실제적인 신뢰”를 의미하고 염려와 걱정을 배제하는 “믿음”을 수반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3. 제자들의 반응(41절)
제자들은 주님의 꾸짖음에 바람과 바다마저 순종하는 것을 보고 놀란다. 구약에서 바다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주권을 드러내 주는 표현이었다(욥 38:8-11; 시 65:5-8; 89:8-9 등). 이와같은 구약의 빛에서 이 본문이 가지는 함의는 실로 혁명적이다.
 
마가복음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선언하였던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궤를 같이한다. 이후 마가의 저술은 자연을 다스리시는 메시아이며, 동시에 메시아보다 더 큰 정체성을 가지고 계신 주님을 보게 된다.
 
 
 
나는?
-갈릴리 동쪽으로 떠나시는 주님이 탄 배를 집어삼킬 만큼 큰 광풍이 불었다. 이 배에는 제자들이 함께 있었다. 주님과 동행하는 여정에서 당하는 ‘큰 광풍’을 이기는 힘은 역시 함께 가시는 주님이시다.
 
-큰 광풍에 난파할 수 있는 배 안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그 배에 타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과 함께 가는 인생도 ‘큰 광풍’을 만날 수 있다. 갈릴리에서 잔뼈가 굵은 제자들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상황을 극복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무지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없었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제자들이 주님을 깨우며 왜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으시냐고 말씀드리는 것은 도움을 구하는 것이기보다는 주님께 불평하는 쪽에 더 가까울 수 있다. 나의 믿음의 걸음걸음 속에 하나님께서 나를 돌봐주시지 않는다고 느끼며 불평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오늘 아침에 내 마음에 ‘큰 광풍’이 일어난다….
 
-제자들은 주님께 직전까지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들으며 주님을 통해 임한 하나님 나라를 실재하였으나 지금 함께하고 계신 주님이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신뢰하지 못해서 두려워 떨었다.
 
-오랫동안 무수한 말씀을 들었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가? 그만큼 나를 두렵게 만드는 내 인생을 덮친 ‘큰 광풍’이 있는가? 본문은 그 광풍 속에서도 나와 함께 하시는 뱃고물에서 주무시는 너무도 평온한 주님을 바라보게 한다.
 
-주님은 큰 광풍으로 인해 아수라장이 된 배 안에서도 몹시 두려워하는 제자들과 달리 평안히 주무신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을 완벽하게 신뢰하고 의지하셨기 때문이다. 오늘 나의 걸음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환경과 상관없이 평안을 누리리라.
 
-주님은 바람과 바다를 다스리는 하나님이시다. 귀신을 꾸짖어 내쫓으시는 것처럼 바람을 꾸짖으시자,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이는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주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바람도 바다도 순종하는 주님의 말씀에 당연히 순종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늘 잔잔하기를 바란다.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인생은 늘 기대와 바람대로 되지 않는다. 정해진 안전한 항로여도 험난한 폭풍우를 만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돌풍에 당황하고 두려움에 빠질 수 있다. 삶에서 예상치 못한 ‘큰 광풍’의 위기를 만날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날이 저물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저편으로 가자고 하셨다. 그러자 모두 배를 몰고 바다를 건넌다. 그런데 갑자기 큰 광풍이 일어나 물결이 거세지고 물이 들이닥친 것이다. 제자들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크게 당황했다. 왜냐하면, 주님이 먼저 가자고 하신 길이었다. 주님을 배에 모시고 나선 걸음이었다. 그런데도 어려움이 찾아온 것이다.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이 늘 평안의 길일 수는 없다. 주님이 타고 가시는 배라도 비바람이 들이닥치고, 물이 가득 차는 위기가 일어난다. 마찬가지이다. 언제든지 시련은 올 수 있다. 주님과 함께 가는 삶의 여정에서 갑자기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위기 속에서도 뱃고물에서 편히 주무시는 주님을 신뢰하면 나도 역시 위기 속에서 평안할 수 있다. 주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며 잔잔케 하셨고, 이를 지켜보던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제자들은 지금껏 주님의 놀라우신 이적을 생생하게 경험했다. 지켜보았다. 그런데도 정작 자신들이 큰 광풍을 만나 어려움에 빠지자, 주님을 가장 뒤늦게 찾았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이런저런 대응을 다 해보고서 감당할 수 있는 지경을 넘어서자 그제야 주님을 찾은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고난이 삶을 뒤덮을 때 신앙의 근육은 혹독하게 단련을 받는다. 덮쳐오는 고난 앞에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의지하며 꿋꿋하게 견뎌내어야지….
 
 
*생각지도 못한 큰 광풍이 일어났다. 우리 더온누리공동체에도 긍정적인 의미로 ‘큰 광풍’이 일어났다. 진실한 공동체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디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걸음을 따라나섰지만, 생각지도 못한 큰 광풍이 불고 있다. 사탄의 방해 광풍을 역시 함께 가고 계시는 뱃고물에서 주무시는 주님께 의지해야겠다.
 
*바울도 로마를 향해 가는 여정에서 ‘큰 광풍(유라굴라)’을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고 오히려 함께 가는 일행들을 위로한다. 주님이 광풍 가운데 함께 계시니 두려움을 떨치고 담담함으로 통과해야겠다. 함께 가는 이들에게 함께 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도록 내가 더 의지하고 걸어가야겠다.
 
 
 
*주님, 큰 광풍이 덮쳐왔습니다. 그러나 두렵지 않고 평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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