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막 5:35-43]
 – 2024년 02월 22일
– 2024년 02월 22일 –

야이로의 딸 이야기는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를 샌드위치처럼 둘러싸고 있다. 이 두 이야기에는 “믿음”이라는 주제가 강조된다. 주님께서 혈루증 앓는 여인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아이가 죽었다고 소식을 전한다. 주님께서 이 죽은 소녀를 일으키신 행위는 요한복음의 나사로 사건과 더불어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가 이제 비로소 주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이 땅 가운데서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전주곡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한편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치유받은 것을 바라본 회당장은 커다란 희망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야이로의 집의 사람들이 급히 와서 딸의 죽음을 알린다. 희망이 순식간에 절망으로 변한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믿음을 촉구한다.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장례 절차가 시작되었으나 주님은 따르는 무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시고, 오직 세 명의 제자와만 구별하여 부모와 함께 아이가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가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살린다.

 

 

 

  1. 비보…. 그러나 주님의 명령(35~36절)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아이가 죽었다는 비보를 전한다.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전제하고 왜 예수님을 힘들게 하냐고 이야기한다. 겉으로 보기에 분명히 상황은 종료된 듯하다.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들의 말처럼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황이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앞서 갈릴리 바다의 큰 광풍 앞에서 제자들은 더 이상 희망은 없어 보였다. 거라사 광인은 그이 삶에 어떤 희망조차 없이 군대 귀신에게 붙잡혀 있었다. 열두 해를 혈루증에 걸려 고생한 여인도 아무런 소득 없이 가산만 탕진한 12년의 세월 속에 희망을 찾아볼 수 없다. 바로 이런 인간적인 희망이라고는 손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 야이로 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욱더 극적이다. 야이로의 딸은 이미 죽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람들과 회당장의 대화를 들으시고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새번역_36절)”라고 말씀하신다. 헬라어 원문은 모두 명령형이다. 계속해서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믿어야 한다는 명령을 하는 것이다. 계속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이 상황이 회당장에는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발생한 순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주님은 회당장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야이로는 주님 앞에 나올 때 이미 주님께서 자기 딸을 치유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보였다. 그런데 죽음의 소식을 들은 이후에도 그 믿음을 지속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의지가 분명함을 드러내신 것이다.

 

 

 

  1. 야이로의 딸의 죽음(37~40절)

주님은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시는 장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가셨다.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야이로의 딸의 부활은 나사로의 부활과 함께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안에 임재해 있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보여주는 예시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했다는 것을 거부할 수 없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이미 임했지만, 아직 백성들이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신 사건이었다. 하지만 주님의 부활 이전에는 어떤 제자들도 이 기적이 가지는 함의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 놀라운 자리에 세 명의 제자를 함께 데리고 가셨다.

 

주님이 집에 들어가셨을 때 떠들며 울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이는 소녀의 죽음이 기정사실인 것을 나타낸다. 절망적인 분위기가 집안을 덮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39절)”라고 말씀하신다. 이에 모든 사람이 비웃었다. 그들은 소녀의 죽음을 영원한 죽음, 다시는 육체로 볼 수 없는 영면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주님은 곧 다시 볼 수 있는, 마치 저녁에 눕고 아침에 다시 일어나듯, 잠시 죽음에 삼켜진 상태(실제로 죽은 것)를 “잠”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분명한 소녀의 죽음이라는 현실에서 주님은 죽음이 소녀를 다시 토해 낼 것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씀을 깨달을 턱이 없다.

 

 

 

  1.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41~43절)

주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으셨다. 그리고 “달리다굼”이라고 외치시며 아이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셨다. 이러한 묘사는 혈루증 여인과 마찬가지로 유대의 전통적인 정결 규례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시체를 만진 자는 부정해지므로 정결 규례를 따라 다시 회복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주님은 혈루증 여인과 마찬가지로 레위기가 정한 정결 규례의 전통적인 방식을 지키지 않으신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인하여 율법의 효력이 세례 요한의 때까지라고 밝히셨었다(마 11:13). 이는 곧 주님께서 율법의 성취(마 5:17) 혹은 마침이자 목적(롬 10:4)이 되신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주님은 열두 살 된 여자아이를 살리심으로써 구약의 엘리야(왕상 17:19 이하)와 엘리사(왕하 4:32 이하)가 한 것처럼 죽은 자를 일으키신다.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나는 것은 구약성경 시편, 다니엘, 이사야 등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가 행하여질 때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되던 행위였다. 주님께서 소녀를 일으키신 것은 주님을 통해서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통치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신들의 눈앞에 일어난 놀라운 일에 놀란 사람들에게 주님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명령하셨다. 유대 지역 안에서 이 일로 인해 불필요한 방해 없이 하나님 나라 사역에 집중하시려는 의도였다.

 

 

 

나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신다(35~36절). 야이로의 집으로 가던 중 사람이 달려와서 딸이 죽었으니, 주님이 오실 필요가 없다고 전한다. 하지만 주님은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다. 상황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라는 말이다. 상황이 우리를 두려움과 절망, 낙담으로 이끌 수 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도와주실 것을 굳게 신뢰해야 한다. 능치 못함이 없으신 주님이시다.

 

-주님은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다(39~40절). 생명과 부활의 주님께서 인간의 죽음을 바라보실 때 그것은 영원한 허무나 절망이 아니다. 잠시 잠깐의 잠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직면하는 죽음은 지금 주 안에 자고 있다가 주께서 다시 살리실 때 만날 것을 믿는다. 이 믿음으로 죽음이 주는 절망을 소망으로 바꿀 수 있다.

 

*회당장의 귀에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과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으니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이 연이어 들려왔다. 그 둘 중의 한 소리에만 마음의 귀를 열어야 했다. 세상은 절망스러운 현실 앞에서 다만 낙담하라고 요구하지만, 주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라고 요구하신다. 세상이 끊임없이 말하는 절망의 소리보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님께서 또렷하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소리를 붙잡아야 하리라.

 

*주님께서 울고 통곡하는 집에 들어가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하시니 사람들은 비웃었다. 그러나 회당장 야이로는 믿었다. 그는 주님께서 병을 고치실 뿐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실 수도 있다고 믿었다. 이 믿음 없이 어떻게 주님과 제자들을 딸이 누워있는 곳으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주님은 죽음에서 일으키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제자들과 그 부모만 데리고 들어가서 딸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이라 말씀하시며 소녀를 일으켜 살리신다. 먹을 것을 주라는 것은 완전한 회복을 의미한다. 소녀를 손잡아 일으켜 세워 주신 그 손길은 장차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자기 백성들을 그들의 무덤으로부터 부르시며 붙잡아 주실 손길이다. 그 부활의 날에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육체를 주신다. 죽은 소녀를 살리시면서 마지막 원수인 사망을 멸망시키실 것도 보여주신다.

 

*죽은 자가 일어났다. 12년 된 혈루증 앓던 여인에게서 절망과 사망의 증상이 “곧” 사라졌듯이, 소녀도 주님의 “달리다굼” 한 마디에 바로 “곧” 일어나 걸었다. 우리를 죽게 만드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불신이다.

 

 

-죽음 앞에서 사람은 슬퍼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1세기 당시 장례식 때 피리 부른 사람을 고용하고 일부러 우는 사람들을 고용하여 슬픔을 표시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으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와서 애통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은 후의 모든 행위는 죽은 자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아직 사랑하는 이들이 살아있을 때 그들의 불신을 애통해하며 복음 전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주님의 선명한 두 음성이 오늘 아침에 내 마음에 새겨진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달리다굼”…. 주님 이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주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겠습니다.

*주님, 더온누리 공동체가 광풍과 절망과 탄식을 넘어 주님의 달리다굼 한 마디에 “곧” 일어서게 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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