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 2024년 02월 24일
– 2024년 02월 24일 –
주님께 파송 받은 열두 제자의 사역은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가는 통로가 된 듯하다. 이 소문은 헤롯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그는 자신이 죽은 세례 요한이 환생했다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마가는 세례 요한이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 자세하게 기록한다. 세상 권력이 요한을 가두고 죽이지만, 주님의 사역은 더욱 확대된다. 이 사건은 주님도 이와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을 미리 보여준다. 그러나 주님의 헤롯이 고백한 것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다.
    
    
1.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롯의 반응(14~16절)
열두 제자들을 통해 주님의 사역은 확장되었다. 주님에 대한 소문은 자연스럽게 널리 퍼진다. 이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안티파스)도 자연스럽게 ‘예수의 이름’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된다. 헤롯 안티파스는 주전 4년부터 로마 황제에게 유배당하는 주후 39년까지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을 통치하였다.
    
그가 들은 ‘예수에 대한 소문’은 세례 요한이 죽음으로부터 일어났으며 이러한 사실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능력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주님을 엘리야로 인식하고 있거나 선지자 중의 한 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14~15절). 이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는 소문을 언급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8:27~28). 이는 말라기 3:1과 4:5~6에 근거하여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주의 날에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의 이해가 주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과 결부되면서 흐르게 된 소문인 듯하다. 그리고 헤롯 왕은 이러한 소문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헤롯 안티파스는 남부 유대 광야에서 신앙개혁 운동으로 적잖은 민중을 이끌었던 세례 요한을 제거함으로써 정치적인 안정을 이루었다고 여겼으나 또다시 북부 갈릴리 지역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게 되자 불안해진 것이다.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 요한 세례 사역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나로 이해한 듯하다.
    
헤롯이 주님의 제자들이 행하는 권능의 소문들을 듣고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의 영이 살아났다면 충분히 신비로운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한 것 같다. 헤롯은 “그가 살아났다”라는 선언에서 심각한 그의 불안 상태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는 예수님에 대한 상당한 경계와 적대심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8:15). 이와 같은 영향일 수 있지만, 마가는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영역에서 주님의 사역 기록을 더 이상 기록하지 않는다. 고향이 배척하자 다른 마을로 옮기셨듯, 헤롯이 다스리는 지역을 벗어나 사역을 이어가신다.
    
    
2. 세례 요한의 죽음(17~29절)
17~18절은 요한이 잡힌(1:14) 이유와 왜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려 했는지를 자세하게 서술한다. 헤롯 안티파스를 질책한 세례 요한의 모습을 묘사한다. 헤롯은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첫 번째 아내 파사 엘리스와 부당하게 이혼하고, 자신의 의붓형제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함으로써 유대 율법을 어겼다(레 18:16). 마가는 이 일을 “이 여자(헤로디아)를 위하여” 헤롯이 벌인 것임을 분명히 한다. 요한은 레위기 말씀에 근거하여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것”의 부당함을 지속해서 “말하였다(엘레겐)” 이 동사는 미완료 형이다. 요한은 단지 한 두 번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지속해서 헤롯의 부당함을 외쳤다. 이런 요한의 행동은 헤롯과 헤로디아를 상당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헤롯은 사람들을 보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투옥 시켰다. 그런데 요한의 지속적인 선언은 헤롯의 부당한 행동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정통 유대인들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또한 유대 백성들 사이에서 헤롯 안티파스의 명예를 실추시키기에 충분했다. 요세푸스의 기록은 헤롯이 세례 요한을 선동죄로 처형했다고 밝힌다. 이는 복음서의 기록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19~20절에서는 왜 안티파스가 세례 요한을 죽이는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먼저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을 죽이고 싶어 했으나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믿었기 때문에(15절) 과감하게 실행할 수 없었고, 헤롯 안티파스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인 줄 알고 두려워하고 보호했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역설적인 표현인데, 안티파스는 요한의 의로움을 알고 있었고 이에 따라 번민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에서 왕의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그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선지자들의 전형적인 사역으로 간주되었고, 세례 요한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헤롯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헤로디아는 자신과 안티파스의 결혼이 당시 윤리적 잣대로 명백하게 손가락질을 받을 행동이었음에도 그것을 지적한 요한을 향해 악감정을 차곡차곡 쌓아왔다. 틈틈이 그를 죽일 기회를 찾고 있었던 차에 드디어 기회가 찾아오게 되었는데, 헤롯 안티파스의 생일을 맞이하여 세례 요한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게 된다. 안티파스의 생일 잔치에는 정치인들, 로마 군대의 지휘관들, 그리고 갈릴리 지역의 유명 인사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자기 딸에게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도록 했다. 이 춤은 안티파스를 흡족하게 했고 그는 즉흥적으로 헤로디아의 딸이 무엇을 요구하든지 들어주겠다고 사람들 앞에서 약속하였다. 소녀는 이 약속을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전하였고 어머니의 요청을 듣고 그것을 안티파스에 전한다(21~25절). 이 소녀는 헤로디아가 전남편 빌립과의 사이에서 낳은 살로메였다.
    
안티파스의 이런 부주의한 약속으로 스스로 덫에 걸리고 만다. 살로메의 뜻밖의 청원에 고민하지만, 자신이 공공연하게 약속했기에 어쩔 수 없이 살로메의 청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처형 방식 또한 유대 율법에 어기는 것이었다. 재판도 없이 일종의 즉결 처형 방식으로 목을 베었다. 이러한 처형 방식은 전쟁의 상황에서 예외적으로 인정될 수 있었으나 그것도 분명한 반역의 의도가 적발되었을 때나 가능했던 매우 드문 처형 방식이었다.
    
이렇게 참담하고 불명예스럽게 세례 요한은 죽음을 맞이했다. 주님의 죽음도 이와 같을 것이다. 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불명예스러운 죽음이 주님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요한의 처형 결정이 헤롯의 의사에 거슬러 주변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주님의 처형 결정과 비슷하다. 총독 빌라도는 자기 의사에 반하여 대제사장 무리의 압력에 의해 결정될 것임을 내다보게 한다. 세례 요한은 주님의 사역을 예비하였고, 그의 죽음도 예비한 셈이 되었다. 헤롯은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의 시신을 장례 치를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다.
    
    
나는?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요한의 투옥은 주님의 공생애 사역의 시작이 되는 표지였다. 마찬가지로 요한의 죽음은 주님의 사역이 어떻게 끝날지를 보여주는 표지 역할을 하고 있다. 요한의 억울한 죽음, 로마식 처형 방식, 주변의 강압에 따른 사형 결정, 매장 등은 주님께서 당하실 고난과 죽음을 암시해 준다. 또한 제자들이 둘씩 짝을 지어 파송되어 각지에서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드러내는 것과 사역을 마치고 돌아와서 사역 보고를 하는 중간에 이 이야기를 삽입함으로써 요한의 순교가 복음을 담당하여 전하는 자들이 치러야 할 혹독한 대가임을 보여준다. 이는 마가복음이 기록될 당시 네로 황제의 박해 아래 있던 로마 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살아가는 삶은 고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광의 면류관이 변치 않고 기다린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헤롯은 제자들의 사역 소문을 듣고 죽은 세례 요한이 부활한 것으로 생각했다(14~16절). 그가 오해한 것이지만, 부지중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한 셈이다. 죽음이 지배하는 땅의 질서에 매인 자들이 결코 행할 수 없는 일들을 주님은 행하신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 속에서 주님은 오늘도 성령님을 통해 일하신다.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 주님의 이름이 드러난다(14절). 파송 받은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내쫓고, 병자를 고친다. 이 일로 예수의 이름이 드러났다는 것은 제자들의 선포와 이적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사역 현장에서 주님의 이름이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가?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의 사역은 얼마나 주님의 이름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을까?
    
-요한의 의로움을 간과하면 안 되겠다. 세상의 불의를 외면치 말아야 한다.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전령으로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였다. 그리고 일상에서 헤롯의 죄를 책망한 일로 옥에 갇혀 죽임을 당한다. 요한의 죽음은 세상에 정의와 평화, 사랑과 용서를 선포하신 십자가 사건의 전주곡이다. 나는 어떠한가?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세상에 선포하기 위해 파송된 하나님 나라의 전령다운 삶을 살고 있는가? 세상의 악을 바로잡기 위해 의로운 말과 행동을 드러내고 있는가? 한국 교회는 이와 같은 모습 앞에 과연 떳떳한가?
    
-진리가 삶으로 연결되지 못하면, 죄가 삶을 지배한다. 헤롯 안티파스는 요한을 의인으로 알고 그의 가르침을 즐거워하지만, 진리에 관한 관심이 헌신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 사이에서 탐욕과 명예의 욕심에 지배당하고 만다. 말씀을 즐거워하고 아는 것만으로는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없다. 생활과 일상이 되어야 한다.
    
    
    
*주님, 말씀을 묵상하고 알아가는 기쁨만이 아니라, 일상이 말씀이 되는 온전한 기쁨을 맛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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