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쉬러 갔는데, 더 큰 일을 겪었다. [막 6:30-44]
 – 2024년 02월 25일
– 2024년 02월 25일 –
열두 제자 파송과 복귀 사이에 세례 요한 참수 이야기가 배치되었다. 오병이어 기사는 세례 요한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 후 곧바로 이어지는 두 기적 사건의 첫 번째 이야기이다. 특히 마태는 주님께서 빈 들로 가신 것을 세례 요한의 참수 소식 때문인 것처럼 전개하여 이 두 사건이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오병이어 기적은 곤경에 처한 무리를 위해서 주님께서 베푸신 기적의 사건이다. 이 기적 직전에 등장하는 헤롯 안티파스의 생일 잔치와 비교하여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매우 인상적이고 검소한 연회를 베푸셨다. 주님께서는 이 기적을 통해서 그들의 육신적 필요를 채우셨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사역이 가지는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셨다. 복음서 모두에 기록된 유일한 기적 사건이기에 이 사건은 예수님의 복음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1. 제자들의 귀환(30~31절)
마가는 헤롯이 요한을 죽인 사건 바로 뒤에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러 파송되었던 제자들이 돌아온 이야기를 다룬다. 제자들은 사역에서 돌아와 자신들이 행하고 가르친 것을 주님께 보고한다.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이라는 표현이 시선을 끈다. 제자들이 행한 것은 6:13을 가리키고, 가르친 것은 6:12의 ‘회개하라’는 선포를 가리킨다. 제자들이 각각의 현장에서 행하고 가르친 것은 주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과 다를 바 없었다. 최선을 다하여 사역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육체적으로 피곤한 것을 보시고 외딴 곳에 가서 쉴 수 있도록 배려하신다.
    
주님은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 사역이 왕성해질수록 많은 무리로 인해 음식 먹을 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던 것을 잘 알고 계셨다. 그런 피곤한 제자들을 위해 그들의 영적인 필요뿐 아니라 육체적인 필요에도 민감하게 대처하셨다.
    
    
    
2.큰 무리가 따름(32~34절)
주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목적지는 불분명했으나 주목해야 할 것은 제자들이 마치 배가 뭍에서 격리되듯 잠시 사역으로부터 격리된 상태였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이었음에도 사람들은 주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이동하는 것을 보면서 육로로 따라온다. 마가는 그들이 ‘모든 고을로부터’ 왔다고 묘사하며 그 규모를 가늠케 한다. 무리들은 예수와 제자들이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른 채 그저 배가 향하는 곳으로 이동하며 따른다. 놀라운 것은 주님과 제자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수많은 무리가 달려와 배가 안착할 장소에 먼저 도착했다는 점이다. 주님은 제자들의 쉼을 위해 한적한 곳으로 이끄셨지만, 그곳에 이미 수천의 무리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제자들에게 쉼은 힘들어 보인다. 그저 쉼을 위해 한적한 곳에 이르렀으나 그곳에 먼저 와서 기다리는 백성은 각자 절박한 현실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간절한 달음질을 마다하지 않았다. 주님은 이 모든 상황을 한눈에 파악하고 계셨다. 주님은 배를 타고 건너시면서 뭍을 따라 달음질하는 무수한 백성들을 지켜보셨을 것이다. 열광적이고 반응하며 주님을 ‘그 선지자’로 환영했다. 요 6:14~15는 오병이어 기적을 맛본 후에 자기들의 정치 지도자로 삼으려고까지 했다고 기록했다.
    
많은 무리가 주님을 따른 것은 병자든, 귀신에 붙들린 자든, 그들의 가족이든, 건강하지만 고달픈 삶의 희망을 붙들고 싶었던 사람이든 추측건대 많은 이들이 이러한 동기를 가지고 주님을 쫓아오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제자들을 쉬게 해주고 싶으셨던 주님의 바람은 그를 따라오는 큰 무리로 인해 어려움을 만났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열성적으로 따라온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34절).”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스플랑크니조마이)”는 주님께서 늘 상대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고 이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행동을 하실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느끼신 것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가는 직전의 헤롯 안티파스의 생일 잔치에 이어서 언급함으로써 이를 더 시각적으로 대조시킨다. 이스라엘 백성은 종교 지도자나 정치 지도자들의 영적인 돌봄과 인도의 부재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르치시고, 아픈 사람도 고쳐 주셨다(마 14:11; 눅 9:11).
    
    
    
3. 그런데…(35~37절)
한적한 들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주님께서 무리를 가르치시고 치유하시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신 것이다. 제자들은 사역에 열중하고 있는 주님께 날이 저물어 가고 있음을 알리고, 특히 아침부터 모였기 때문에 근처 마을로 보내 육신적 필요를 채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헤쳐,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근방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새번역_35절 하~36절).”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제안에 매우 의외의 반응을 하신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36절)”고 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음식을 공급하기로 하신 것은 그들의 육체적 필요를 채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사건을 기억함으로써 나중에 어떤 중요한 교훈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제자들은 매우 상식적인 답변을 한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빵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다가 그들에게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새번역_36절 하)” 주님의 의도를 알 리 없는 제자들은 지극히 상식적인 답변만 할 뿐이었다. 제자들에게 지금 이 상황은 모두 절망적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서둘러 무리를 “해산” 시키는 것 뿐이었다.
    
1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이니 이백 데나리온은 실로 엄청난 금액이었다. 과연 주님과 제자들에게 이만한 금액이 있었을까도 싶다. 이는 그만큼 모인 무리가 많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현실적으로도 제자들에게는 이 무리를 책임질 만한 능력이 없는 것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며 대답하기는 했지만, 눈에 보이는 현실이 비교할 수 없이 커 보였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선교사역을 하며 생생하게 경험했던 능력과 믿음은 어디로 갔을까? 주님께서는 분명히 “너희가”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이 지금, 이 상황을 충분히 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암시해 주셨다.
    
    
    
4. 기적이 일어나다!(38~44절)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현실적인 계산 답변에 특별한 언급 없이 제자들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는지 물으신다. 제자들은 다섯 개의 빵과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는 보고를 드린다. 당시 떡과 물고기는 갈릴리 사람들의 일상적인 식사 메뉴였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하시고 백 명씩, 오십 명씩 무리들을 앉히셨다. 그리고 “축사하시고” 무리에게 배불리 먹게 하셨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주님께서 단순히 무리의 육신적인 필요를 채우신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한적한 곳, 빈 들에서 기적적으로 떡을 공급하는 것은 출애굽기 16장의 만나를 생각나게 하고, 열왕기 하 4장에서 엘리사가 떡 이십 개로 백 명을 먹인 사건(왕하 4:42~44)을 상기하게 하였다. 구약의 이 두 본문은 모두 선지자로서 그와 같은 일을 행한 것이었다. 주님께서도 위대한 선지자로서 그와 같은 일을 하신 것이다. 특히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실 때 “만나를 다시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다(제2바룩서 29:8; 참조 계 2:17). 즉 오병이어의 기적은 메시아적 사건이라는 의미다. 특별히 요한복음 6장은 오병이어 사건 후에 주님께서 구약의 만나와 연관 지어 자신을 하늘로부터 오는 참 떡으로 설명하셨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초라한 오병이어를 취하여 그 옛날 모세의 광야 공동체가 경험했듯, 그저 하늘에서 양식 내리는 기적을 행하셨다. 초라한 현실, 불가능한 상황에서 답을 내셨다.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후 떡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눠 주신다. 받은 제자들이 흩어져 무리에게 나눠주면서 그날 한적한 그 곳, 저녁 빈 들에서 무리가 모두 배불리 먹고 열두 바구니가 남는 풍성한 기적을 맛본다.
    
무리가 먹고 배부르게 되었다는 표현은 미리 맛본 메시아 연회의 풍성함을 바라보게 한다(42~44절). 남은 것을 거두어들인 바구니 숫자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적으로 내다보게 하면서 하나님 나라 통치로 인해 새롭게 세워질 나라도 소망하게 한다. 이 잔치에 참여한 숫자를 남자만 오천 명으로 기록하는데, 당시 전통적인 유대인의 일반적인 계수 방법이었다. 그렇다고 여자와 아이들이 아예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서는 누구도 배제당하지 않는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곤경에 빠진 무리를 위한 메시아적인 잔치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전도사역을 성공적으로 마친 제자들에게 쉼을 권하시고 쉴 곳을 마련해 주시면서 시작되었다(30~31절). 동시에 주님과 제자들의 가는 곳을 알고 걸어서 찾아온 이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영적 지도자(목자)가 없어서 갈 길을 모르고 굶주리는 양들로 바라보시며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로마 식민지 아래에서 사회 경제적인 쉼뿐 아니라 영적인 쉼마저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들은 매우 지쳐 있었다. 주님께서는 이런 갈릴리 사람들의 형편을 세밀하게 돌아보신 것이다.
    
-나에게 이런 세밀한 목자의 마음과 삶이 있을까? 좀 더 깊이 살피고 좀 더 선명하게 공동체를 바라보고 살피는 목자로 사는 삶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겠다. 함께 사역하는 교역자들에게 우리가 추구하는 진실한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동기와 방향을 잘 돌아볼 수 있게 하고, 단지 사역(일)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예수님처럼 돌아보아야겠다. 일과 쉼이 규모 있게 균형을 맞추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쉬려고 간 곳에서 일어났다. 큰 무리가 몰려들어 주님과 제자들의 휴식 시간이 깨진 것이다. 계획된 바 없는 기적이다. 돌발상황이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주님께서 우리 공동체에 이런 모습을 통해 깨우치시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공동체의 능력, 예수님의 능력을 과시하고 드러내려고 뭔가를 시도하려다가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목자 없는 양” 같은 큰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주님이시다(33~34절). 쉼을 위해 한적한 곳으로 가셨으나, 그곳까지 찾아온 무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사려 깊게 가르쳐 주셨다. 음식을 드실 시간도 없고, 쉴 겨를도 없으셨으나 주님을 보기 위해 몰려온 백성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필요도 채워 주셨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고 인도해야 할 “목자”의 의무를 저버리고 자신들의 배만 채우고 있었다. 광야를 유리하는 굶주린 양 떼와 같은 무리가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오자, 주님은 그들의 영적, 육체적 필요를 모두 채워 주셨다. 그분이 우리의 목자이시다.
    
-기적의 시작은 열정적인 사역의 열매와 결과가 아니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기적은 열정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한 긍휼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질량보존의 법칙”을 뛰어넘으신 것이다. 자연 질서(질량 보존의 법칙)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때문에 그 법칙을 깨뜨리신 것이다. 하나님의 기적은 자기 과시가 아니다.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의 열매이다.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실 때,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법칙을 깨뜨려서라도 우리의 곤고함과 허무함을 사랑으로 채워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기적은 사랑이다.
    
    
-문제는 큰 무리가 아침부터 해 질 때가 되도록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한적한 곳’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걱정이 되었다. 제자들 안에서 주님께서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는 와중에 현실적인 의논들이 일어났을 것이다. 제자들은 주님께 날이 저물어 갈 때 마침내 말씀을 드렸다. “이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 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35~36절)” 제자들은 무리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근처 마을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라도 속히 확보해 주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셨다. 현실적으로 모인 무리를 다 먹이는 일은 가난한 제자들이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 제자들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외면과 방치, 계산에 따른 회피는 하나님 나라 제자의 삶의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주님의 인자한 음성이 오늘날 우리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가 되어야 할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육체적으로 굶주린 영혼들, 영적으로 고통스러워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나와 우리 공동체는 외면, 회피, 계산에 머물지 말고 이미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주님께서 부어주신 권능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주님처럼 불쌍히 여기고 먹이는 일에 부담감과 책임감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주님을 의지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지극히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계산기만 두드리지 말고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진정 기대하신 것은 “현실적인 대답과 대안”이 아니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때가 저물어 갈 때 제자들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 가니 무리로 보내어 마을로 가서 뭘 사 먹게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은 이 문장이 이인칭 명령형이다. 즉 기가 막히게도 제자들이 주님을 향하여 명령조로 말한 것이다. 굳이 직역하자면, “무리를 보내버리십시오!”이다. 제자들의 태도에 그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분주한 사역에 예민해져 있고 지쳐 있는 것이다. 또, 생각해 보자. 오병이어가 있다고 말한 제자가 “오병이어가 여기 있으니 이 작은 것이라도 사용해 주십시오”라는 믿음으로 주님께 이것을 드리지 않았다. 제자들은 ‘해가 저물기 전에 빨리 해산시켜야 한다.’라고 주님께 말했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주님의 말씀이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주님께서 그런 제자들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38절)”라고 말씀하셨다. 그제야 아이의 도시락을 가지고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의 도시락이었던 오병이어는 흔히 우리가 이해하는 소년의 믿음의 상징이나, 제자들의 믿음의 상징이 아니다. “그래 이 작은 것이라도 올려드려야지”라며 주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이의 믿음의 결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작은 것이라도 사용하여 주십시오.”라는 믿음의 고백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것밖에 없으니, 이들을 먹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절대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라는 증거로 제시된 것이 오병이어였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불가능의 증거로 가져온 오병이어를 기적의 통로로 사용하신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주님의 요청에 이것 가지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불신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열어 주신 것이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것 보십시오. 이것밖에 없습니다. 절대 안 됩니다. 못합니다. 이 꼴을 보시라고요. 이것이 그 증거입니다.”라고 외치는 그것으로도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내 인생에 열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될성부른 떡잎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싹수가 노랗다 못해 비틀어 말라졌어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의 주님께서 세상에서 소외된 한적한 곳에서 하늘 잔치를 열어 배부르게 먹여 주신다.
    
    
-빈 들에 모인 하나님의 백성을 배불리 먹이신다(38~44절). 창조 직후 아담에게 양식을 주시고, 광야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위해 만나를 준비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아들을 보내셔서 오병이어로 자기 백성을 먹이신다. 그리고 아들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 자기 몸과 피를 새 백성의 영원한 언약의 양식으로 제공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이천 년 전 갈릴리의 한적한 광야에서 베풀어 주신 하늘 잔치에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축사하신 오병이어를 오십 명씩, 백 명씩 앉은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와 우리 공동체는 이처럼 주님이 제공하여 주시는 하늘 양식을 나누고 있는가? 주님께서 베푸신 하늘 잔치에서 하늘 양식을 나누고 있는가? 나는 지금 누구에게 무엇을 나누고 있는가?
    
-헤롯이 주재하는 왕궁의 잔치는 화려했지만, 방탕하였고, 세상 권력자들만의 유흥이었다. 살기와 오만과 미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한적한 곳에서 베푸신 하늘 잔치는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에게 천국의 향연을 만끽할 수 있게 해주셨다. 참 목자되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였다. 거기다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
    
    
    
*주님, 긍휼의 사랑이 오늘 나를 감싸고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 안되는 이유와 증거를 인생의 잔치로 만들어 주시는 주님의 긍휼 안에 내가 살아가도록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입에 풀칠할 정도가 아니라 배불리 먹이시는 사랑을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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