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지금, 여기에서 그 여인의 믿음으로 [막 7:24-37]
 – 2024년 02월 29일
– 2024년 02월 29일 –
주님께서 갈릴리 북부 이방 지역을 순회하신다. 귀신 들린 딸을 가지 한 이방 여인이 주님 발 앞에 엎드려 치유를 간구했고, 주님은 유대의 가혹한 언어로 수로보니게 여인을 몰아붙이신다. 하지만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고백하며 치유의 은혜를 경험한다. 또, 시돈을 돌아 데가볼리 지역까지 내려오시며 사역을 이어가시다가,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특별한 치유 형식을 동원하여 고쳐주신다.
 
정결 문제에 대한 가르침 이후 주님께서는 이방지역을 찾아가신다. 이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통치가 그곳에도 임할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등장은 의식적으로 부정한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이루어질 것을 나타낸다. 연이어 등장하는 귀먹고 어눌한 자를 치유하는 이야기는 앞선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 통치가 이방지역에서도 실현되는 구체적인 예를 보여준다.
 
 
 
1.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24~30절)
지금까지 주님의 사역은 주로 갈릴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두로 지역으로 배경이 전환된다(24절). 이는 구약에서 예언된 두로와 다른 이방 민족에 대한 구원 예언의 성취로 본다(시 87:4). 또 정결 규례에 대한 언급 이후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이 무너질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두로 지역을 방문한 주님께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이 나아왔다. 마태는 이 여인을 가나안 여인이라고 소개한다. 3:8에서 주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 주님께 나아온 무리 가운데 두로 사람들이 소개되었다. 그러므로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앞 정결 규례의 관점으로 보면 주님을 찾아온 여인은 부정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이방인에다,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힌 딸을 둔 여인이다. 이 여인과 접촉한다는 것 자체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마가는 이 여인은 “헬라인”이자 “수로보니게 족속”에 속한 자라고 표현하며 그녀의 이방인 됨을 더욱 강조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녀를 배척하지 않고 대화를 나누시는 것 자체가 대단한 파격이다. 무엇보다 정결 규례에 얽매이지 않으시는 모습을 통해 이방지역에서 부정한 영에 들린 딸을 둔 이방 여인과 적극적인 대화를 나누시는 모습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장애가 된다면 유대교 전통을 얼마든지 깨뜨리신다는 점을 확고하게 보여주신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간청한다(26절). 여인의 간청에 주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라고 말씀하신다. 평소 주님의 언행과 전혀 일치가 되지 않는 어색한 말이다. 하지만 주님의 이 말씀은 주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큰 그림과 이 여인에 대한 훈련의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주님은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유대인들에게 먼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순서임을 분명하게 밝히신다. 이는 이방인을 완전히 배제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내포되었다는 것도 놓치면 안 된다. 즉 주님의 훈련 방식, 훈련 언어이다.
 
주님의 이런 반응에 여인의 반응이 더 놀랍다. 그녀는 먼저 주님을 “퀴리에(주님)”로 부른다. 여인은 주님의 말씀 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다. 구원사의 순서에 있어 이스라엘에 우선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소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는 “개”를 비유한 것도 의도를 잘 알아차렸다. 주님은 여인에게 ‘너는 개다’고 말씀하시고, 여인은 ‘그렇습니다. 저는 개입니다’고 답했다. 대화치고는 어색하고 어설픈 듯하면서도 경우가 딱딱 맞는다. 유대인에게 개란 부정한 동물이다. 이방인을 경멸할 때 차용되는 가장 극단의 표현이다. 그런데 주님과 여인의 대화에 사용된 ‘개’라는 헬라어가 ‘쿠나리아χυνάρια’이다. 쿠나리아는 “작은 개”를 뜻한다.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반려견이라고 해도 될듯하다. 당시에 보통 집을 지키거나 크고 사나운 들개들은 ‘쿠신’으로 표현했으니까…. 그래서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는 고백이 놀라울 뿐이다. 굳이 과장되게 이해한다면, 여인은 자신을 “주님의 개”라며 “저는 주님께 속했다”라는 믿음을 표현한다. 어쩌면 자신도 하나님 나라 잔치에서 얻을 수 있는 분깃이 있음을 분명하게 표현일 수 있다. 실로 놀라운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한 이해이다.
 
여인의 놀라운 대답에 주님은 즉각 반응하신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새번역_29절) ‘네가 그렇게 말하였으니’로 번역된 문장을 직역하면 “이 말씀 때문”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주님께서 여인의 믿음을 강조하신 것이다. 마태는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마 15:28)”라고 기록했다. 마가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 나라 복음이 유대 지역뿐만 아니라 이방지역에서도 선포되고 성취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2. 데가볼리 지역에 임한 하나님 나라(31~37절)
주님께서는 두로를 나와 북쪽 시돈을 통해서 데가볼리를 지나고 갈릴리 바다로 가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갈릴리 동편의 이방지역이다. 5장에서 귀신 들린 자가 회복된 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5:20)”라는 진술에 비추 보면 이미 지역에 퍼진 주님에 대한 소문의 근원을 짐작할 수 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주님께 데려왔다(31~32절).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마가는 왜 귀먹고 말 더듬는 자의 치유를 기록하였을까? 이는 이사야 35:5~6의 성취로 주님의 이방지역 하나님 나라 사역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 병자를 치유하여 주시는데 독특한 행동을 하신다(33절). “예수께서 그를 무리로부터 따로 데려가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보시고서 탄식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에바다” 하셨다. (그것은 열리라는 뜻이다.) (새번역_33~34절) 주님은 치유 이적을 베푸신 후 다시금 침묵을 명령하신다(36절). 그러나 귀먹고 말 못 하는 자가 회복된 것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며 “그가 하시는 일은 모두 훌륭하다. 듣지 못하는 사람도 듣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신다.” (새번역_37절)
 
이런 사람들의 반응은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 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5~6)”의 성취이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온전하게 임하면 못 듣는 사람이 듣게 되고 말 못 하는 사람의 혀가 노래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이방지역에서도 성취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실제이다!
 
 
 
나는?
-주님은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24, 31절). 비록 사역하는 대상이 유대인들에게 한정되었으나(27절), 이방인들의 필요를 외면치 않으신다. 유대인들은 정결법에 따라 이방인들을 부정한 자로 간주하지만 주님은 이방인을 치유하는 행위로 외적인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보여주신다. 나도 하나님께 깨끗함을 받은 자이니, 사람의 전통이나 관습, 문화로 차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주님은 이방지역으로 들어가셨다. 거기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야 한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오는 새 창조가 일어나야 한다. 주님은 유대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인의 메시아도 되신다.
 
 
-믿음으로 간청하는 여인의 소망을 이루어 주셨다(25~30절). 유대인들이 배척하는 이방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녀의 어린 딸을 고쳐주셨다. 믿음으로 반응하는 모든 사람을 자녀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다. 십자가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가 되게 하시고 함께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앉게 하신 주님의 사랑이 크고 크시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이방인’ ‘여인’의 간구를 듣고 주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을 ‘개’에 비유하면서 이방인은 메시아 나라의 축복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듯이 말씀하신다. 냉혹한 거절로 들릴 수 있는 이 말을 여인은 자신이 ‘개’임을 인정하면서도, 개에게도 부스러기를 먹을 권리가 있다며 자신이 얼마나 주님의 치유의 은혜를 믿고 소망하는지를 밝힌다. 그 믿음으로 여인은 딸을 살릴 수 있었다.
 
-주님은 혈통이나 신문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면 부스러기만 먹어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보시고 여인의 간청에 응답하셨다. 믿음이 있는 이방 여인…. 은혜받을 자격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부스러기 은혜만으로도 나음을 입을 것이라는 그녀의 믿음은 유대인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기도 하다. 언약의 외인이던 이방인들도 비천한 ‘개’가 아니라 존귀한 ‘자녀’가 되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모욕적인 말로 들릴 수 있는 것을 모욕적으로 듣지 않고 믿음으로 듣는 여인의 모습이 도전된다. 나는 말씀으로부터 들려오는 어떤 소리라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너는 쿠나리아(개)야!”라고 들려오는 음성을 여인처럼 믿음으로 받을 수 있겠는가?
 
-여인의 믿음은 자기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주님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들으려고 하는 것이다. 단어보다 문장, 문장보다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단어 하나, 한 문장에 집착해서 맥락과 의미를 오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쳐주신다(32~37절). 주님은 귀신 들린 자들과 각종 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로 인해 애통해하신다. 죽음의 권세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억압하는 현실을 탄식한다.
 
-“에바다”는 아람어로 “열리라”는 의미이다. 주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언하시고 회복을 명령하시자(사 35:5~6), 병자의 눈이 열리고 말문이 열린다. 주님을 통해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는 이방 땅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침투한(온) 것이다. 나의 귀와 입, 그리고 마음은 주님을 향해 활짝 열려있을까?
 
-주님은 이방 땅이지만 드러내놓고 이적을 행하지 않았다. 특히 데가볼리 지역에서는 병자 따로 데려가 고치시고, 병이 나은 사실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주님을 따르는 무리가 메시아에 대한 그릇된 기대와 열정을 가지게 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고난으로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주님의 길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사람들의 영광을 거절하시고 비난과 조롱 속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주님은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 가신다. 새로운 정결 기준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을 허문 주님은 이방지역으로 다니시며 소외된 이들을 주의 나라로 부르신다. 땅끝을 향한 이방 선교의 포문을 여신 분은 사도들이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먼저는 유대인, 다음은 헬라인(롬 1:16)”이라는 하나님 나라 선교 원리를 착실하게 감당하고 계신다.
 
-주님은 이르지 말라고 누차 경고하셨으나 널리 전파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36절). 그러니 듣고 보고도 믿지 못하거나 전하지 못한다면 문제는 복음에 있지 않고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 복음이 지금 우리에게도 그 여인의 믿음을 요구하신다.
 
 
 
*주님, 지금 여기에서 그 여인의 믿음으로 복음을 누리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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