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주님이 꿈꾸시는 나라가 내가 바라는 나라 되기를 [막 8:27-9:1]
 – 2024년 03월 03일
– 2024년 03월 03일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다.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지에 따라 각자의 정체성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로 생각하는지 물으신 후, 제자들의 생각도 물으셨다.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고 자신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하여 처음으로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완강하게 저항하고 주님은 베드로를 꾸짖으신다. 그리고 진정한 제자도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신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가는 길은 그의 참 제자도 따라서 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본문은 기독론(예수님은 누구신가?)과 제자도에 대하여 선명하게 드러낸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주님의 사역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권능과 힘의 메시아 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이 기대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걷고 계신다. 그 길은 고난과 죽음의 길이었다. 고난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다. 제자들이 기대하고 있는 길은 분명 아니었다. 주님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이 길을 가르치신다.
    
    
    
1. 길 위에서(27~30절)
벳새다에서 빌립보 가이사랴로 이동하신다. 이곳은 갈릴리 해변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진 헐몬산 끝자락에 있는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건설한 도시였다. 주님은 이 지역의 여러 마을을 순회하시는 길 위에서 갑자기 제자들에게 질문하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27절)” 여기서 사람들은 빌립보 가이사랴 사람들이다. 매우 의외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 지역을 처음 방문하시기 때문이다. 이 지역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주님에 대한 정보를 잘 알고 있을까? 한편 ‘누가’는 이 질문은 오병이어 직후 등장시켰다. 그렇다면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이방지역, 그것도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건설한 도시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이 주님에 대하여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럼에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로 알고 있다고 대답한다(28절). 이 칭호들은 모두 세례 요한이 죽임을 당할 때 등장한 칭호들이다(6:14~15). 헤롯 안티파스의 참수가 워낙 충격적이었고, 그의 이복동생 헤롯 빌립이 통치하던 가이사랴에도 금새 소문이 퍼진 것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대답에 별로 반응하지 않으신다. 결국 이 질문은 본 질문을 하기 위한 예비 질문이었다.
    
주님은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9절).” 베드로가 지체하지 않고 “주는 그리스도이시니이다”라는 유명한 대답을 한다. 그의 고백은 대표성을 갖고 있었고, 지금까지 주님과 함께했던 모든 사역에 근거한 대답이었다. 주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고 이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경고하다(30절_에피티마오)”는 주님께서 앞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 사용하신 단어이다(1:25; 4:39). “엄히 꾸짖다”라는 의미가 있다. 왜 그러셨을까?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메시아(그리스도) 상은 ‘그리스도’가 로마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재건할 자’라는 믿음이 있었다. 빌립보 가이사랴의 백성이 선지자로 알려진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라는 왜곡된 소문이 돌지 않도록 엄히 경고하신 것이다. 로마 황제를 기념하여 세운 도시에서 로마를 무너뜨리는 그리스도가 나타났다는 왜곡된 소문이 일어나면 주님이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가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주님은 베드로의 고백 진의를 간파하셨기에 침묵을 명령하신 것일 수도 있다.
    
    
    
2. 첫 수난 예고(31~33절)
이제 주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가야 할 길을 처음으로 말씀해 주신다. 첫 번째 수난 예고(31~33절)이다. 주님은 먼저 자신을 “인자”라고 칭하신다.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는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이 역사 속에 갈망해 온 힘센 권능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칭하시며 그가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다니엘 7장에서 예언한 바로 그 인자임을 스스로 연결하셨다. 인자가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방식은 사람들의 기대와 전혀 다른 고난을 통해서이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많은 고난을 받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버림받아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에 침묵하게 하시고 정작 자신이 가야 할 길은 드러내 놓고 말씀하신다. 이에 베드로가 항변한다(32절). “항변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경고하실 때 사용된 “에피티마오” 동일한 단어이다. 베드로의 항변은 강력했다. 그의 항변은 단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주님은 베드로의 말을 듣고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으셨다(33절).” “꾸짖다”도 역시 에피티마오라는 동일한 단어이다. 주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33절)며 강하게 꾸짖으셨다. 베드로의 항변은 매우 “사탄적”이었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은 사탄의 일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예수의 길을 가로막는 베드로와 제자들은 바로 그 마음과 행동을 멈추고 물러나야 한다.
    
    
    
3. 주님을 따르는 길(참 제자도_8:34~9:1)
주님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새번역_34절).”라고,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 “자기 부인”은 베드로와 제자들의 태도를 볼 때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짐”은 제자로서 감당해야 할 사명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가리킨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주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그를 따라가는 제자도로 이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주님을 따라가는 삶은 결국 십자가의 죽음의 길이며 자기 목숨까지 포기하는 삶의 방식이다(34~35절). 진정한 제자는 단순히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자기를 부인하며 따라가는 사람이다. 한편 주님을 부인하는 삶은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삶이며 마지막 심판 때 인자가 부끄러워하게 될 위험한 삶이다.
    
사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기를 처형할 틀인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가는 것을 제자도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은 제자들로서 매우 충격적이었다. 당시 십자가형은 정치적인 반역자들과 노예들을 처형할 때 사용하던 로마제국의 효과적이면서 가장 잔인한 처형 방식이었다. 특히 유대인 남성들에게 십자가형은 최대의 수치를 주는 사형 도구였다. 주님께서 이 정도로 각오를 다지며 가야 할 길을 제자의 길로 말씀하신 것이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단지 ‘사람의 일’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 도무지 이해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헌신을 요청하고 있다.
    
인자가 하나님의 영광과 같이 올 것을 밝힌 예수는 종말에 관한 말씀으로 제자도를 갈무리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권능”으로 임한다(5:30; 6:2, 14; 9:39; 12:24; 13:25, 26; 14:62). 이는 문맥상 변화산 사건(9:2~8)이나 십자가 사건에서 예루살렘 휘장이 찢어지는 것(15:38~39)을 가리킬 수 있다. 하지만 마가는 1:15에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온 것을 보여주었고, 사탄의 나라와의 분쟁을 통해 그 임재가 분명해 짐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그 임재는 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비밀이며 대부분 사람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온 것을 죽기 전에 볼 사람들은 그 비밀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누굴까?
    
주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던 무리와 제자 중에서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내어놓고 주님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일 것이다.
    
    
    
나는?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아직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베드로는 알아보고 이렇게 고백했다. 그러나 반드시 십자가에 죽고 반드시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다. 베드로는 하늘이 의도한 메시아가 아니라 땅이 기대하는 메시아만 고집하여 순간 주님의 길을 가로막는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 버린다.
    
-주님은 위대한 스승이나 영적 지도자 중의 한 분이 아니라 유일한 구원자(그리스도)이시다.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는 자기 고집대로, 자기 기대대로 예수를 끌고 가는 자가 아니다. 주님이 가시려는 길을 꾸짖는 자가 아니다. 주님이 가시려는 길을 따라 자기 고집, 자기 기대를 부인하고 죽기까지 주님의 뒤를 따르는 자가 제자이다.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일을 생각하고 추구하는 사람이다.
    
-주님은 고백에 따른 헌신을 요구하신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신다.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주님의 길이 제자가 따라가야 할 길이다. 분명 즐겁고 편안한 길은 아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목숨을 내어놓는 십자가의 길이다. 이 삶은 한순간이 아니라 한평생 지속되어야 할 결단이다. 주님을 잘 따라가기 위해 내가 결단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내 뜻과 내 가치 대신, 하나님의 뜻과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내야 하리라.
    
    
*그리스도인, 모두는 그리스도의 길을 가겠다고 모인 이들이다. 같은 땅을 밟고 살지만 실제로 서 있는 곳은 다르고, 지향하는 눈도 다르다면 제자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길을 고집하면 안 된다. 마이 웨이(My way)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삶이어야 한다.
    
*주님의 길은 “하나님의 일”을 따르는 길이다. 세상이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가는 것이다. 그 길이 고난이 기다리고 죽음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길이지만 주님은 꿋꿋이 나아가셨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맞이하실 것이다. 영광으로 나아가기 위해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길이었다.
    
*제자의 길은 하나님의 일을 따르는 주님의 뒤를 따르는 길이다. 그런데 이 길은 고난과 죽음, 부활을 향해 가는 길이기에 쉽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분명히 지고 나아가야 한다. 목숨을 잃을 것도 감수하며 나아가야 할 길이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길은 그렇게 따라나서야 할 길이다.
    
*특히 베드로처럼 주님을 가르치려는 길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이렇게 된다. 제자들은 온 천하를 얻으려고 꿈을 꾸었겠지만, 더 중요한 생명을 잃는 결정을 하고 만다. 주님과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자들은 주님이 영광중에 왕으로 등극하실 때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주님이 꿈꾸시는 나라가 내가 바라는 그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주님, 주님이 꿈꾸신 그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꿈꾸겠습니다. 그 나라를 더욱 소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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