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막 9:2-13]
 – 2024년 03월 05일
– 2024년 03월 05일 –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 가이사랴에서 내려오던 중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주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눈다. 베드로는 어떨결에 여기에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고, 구름 속에서 천상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신비로운 현상이 끝난다. 주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면서 세 제자들에게 침묵을 명령하신다.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것 같이 주님은 세 제자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어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 그리고 예언서를 대표하는 엘리야와 대화를 나눈다. 제자들은 그 의미를 모르고 겁에 질려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구름 가운데서 나서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인 것을 확인해 주면서 그 말을 들으라고 명령한다.
 
 
 
1.산 위에서 변화하신 주님(2~8절)
인자가 앞으로 고난을 받고 죽음까지 이르게 될 것을 처음으로 가르친 주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엿새 후 높은 산으로 이동했다. 마가는 변화산 상에서의 사건을 통해 주님이 왕으로 등극한 것으로 그린다. 주님의 옷이 세상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희어진 것은 부활을 암시한다. 이는 9절에서 명확하게 부활을 언급함으로 암시를 분명히 한다.
 
고난을 받을 왕이지만 마지막엔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자가 고난을 받을 것을 율법과 예언서를 통해 이미 예언 되었고, 엘리야와 모세는 종말론적인 인물들이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한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종말에 다시 나타나 이스라엘을 다시 해방시킬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신 18:15). 엘리야도 종말에 나타나 하나님의 마지막 구원을 준비할 것으로 예언되었다(말 4:4~6).
 
5~6절은 이 모습을 바라본 제자들의 반응이다. 불과 엿새 전에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고, 지금은 영광스럽게 변화한 주님을 바라본 베드로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주님을 ’랍비‘로 부르고 어떤 이유인지 드러나지 않았지만, 초막 셋을 짓고 이 놀라운 순간에 더 머물기를 원했다. 초막 셋을 짓고 이 산에 안주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 초막(스케네, 텐트)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베드로가 잊고 있었던 것이 있다. 주님께서 “고난을 받고, 버림받아, 십자가에서 죽은 후에야 안식이 오는 것이다. 마가는 베드로가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밝힌다. 그는 아직도 인간적인 관점에서 주님의 정체성과 사역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겁에 질린 세 제자들에게 구름 가운데서 하늘의 음성이 들려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구름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임재가 이 음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확인해 준다. 그리고 1:11에서 이미 한번 선포된 내용이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시 2:7)이지만 동시에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이다(사 42:1). 주님은 이 음성에 어떤 반응도 하지 않으신다. 이는 주님의 고난에 관한 말씀을 듣고 순종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제자들은 이 음성을 들은 후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 고난의 길로 가시기 위해 율법과 선지자와 나눈 대화와 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산에서 내려가 고난으로 나아가는 일만 남아있다.
 
 
 
2.주님의 경고와 제자들의 질문(9~13절)
주님께서는 세 제자들에게 그들이 본 것을 부활 전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것을 엄중하게 명령한다. 이 침묵명령은 마가복음에서 마지막 명령이다. 주님에 관련된 일에 대해 침묵을 요구하는 명령은 이 산에서 절정에 이르고 이후에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또, 이 명령에만 “부활 때까지만”이라는 시간 제한이 주어진다. 이로써 침묵명령의 목적이 분명하게 밝혀진다. 주님이 고난을 받고 죽은 후 다시 부활하기 전까지 주님의 올바른 정체성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활‘을 또 다시 언급하자 제자들은 혼란스러워 한다. 불과 엿새 전에 인자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며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가르쳤는데도 제자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부활에 관해 서로 토론하던 중 엘리야에 대해 질문한다. 이는 주님의 수난 가르침이 주님의 부활에 초점이 맞추어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 12:2에 근거하여 종말에 있을 대규모 부활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마지막 부활이 엘리야가 온 후에 일어날 것이라는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 견해에 동의하시지만 아직 엘리야의 회복 사역이 이루어짖 않은 것을 지적하시며 세례 요한을 다시 온 엘리야로 가리키신다. 한편 말 4:6은 다시 올 엘리야의 사역을 아버지와 자녀들 간의 관계 회복 사역으로 규정한다. 그 관계의 회복이 일어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저주가 있음을 확인하며 말라기의 예언은 끝난다.
 
주님은 인자의 고난과 이미 온 엘리야의 회복 사역이 실패한 것을 연결짓는다. 주님이 세례 요한을 이미 다시 온 엘리야로 분명하게 밝히면서 그의 회복 사역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가 사람들이 그를 제대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미 밝히셨다(막 6:14-29). 한편 세례 요한과 엘리야를 동일시 하는 것은 말 3:1에 예언된 주의 종을 준비하는 사역을 세례 요한이 완수 했기 때문이었다. 마가는 1:2을 통해 이사야 40:3과 말라기 3:1을 세례 요한의 출현을 예언한 구절로 이미 인용했다.
 
이를 통해 주님은 다시 온 엘리야로 나타난 세례 요한의 운명을 인자가 겪을 고난과 죽음을 미리 겪은 것으로 암시한다. 그가 먼저 와서 “준비한” 주님의 길은 바로 고난과 죽음의 길이었던 것이다(말 3:1). 주님도 그리스도로서 이제 그 길을 나서고 있는 것이다.
 
 
 
나는?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2~3절).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면서 용모가 변한 것처럼,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 가운데 영광스럽게 변화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비록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고난을 앞두고 있으나 부활과 재림 때에는 변화하신 모습처럼 하나님 아들의 영광과 위엄을 드러내실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그날의 영광을 바라보며 믿음의 걸음을 꿋꿋하게 걸어가리라.
 
-주님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4, 7, 8절). 주님은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을 대표하는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신다. 이는 주님께서 구약의 율법과 예언이 약속하고 있는 메시아임을 의미한다. 하늘에서 들린 소리도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한다. 제자들이 정신 차리고 둘러보았을 때 오직 예수님만 보인 것은 주님이 모세와 엘리야보다 크신 분이며,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주님을 모든 율법과 예언을 성취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가?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가?
 
-베드로는 주님의 영광에 놀라고, 위대한 모세, 엘리야와 한 자리에 있는 것에 도취된다. 그래서 그 자리에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한다(5~6절). 문맥상 이 자리는 모세와 엘리야가 장차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고난받고 죽으실 일에 대해 말하는 자리인데(눅 9:31), 베드로는 그저 이 놀라운 체험만 지속하고 싶었던 것이다. 혹시 신비적인 종교체험에 골몰하느라 일상에서 살아내야 할 제자의 삶을 도외시하고 있지 않는지 살펴볼 일이다.
 
-변화산은 내려가야 할 산이다. 갈보리산으로 올라가 죽임을 당한 후 부활하지 않으면 그 영광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가 좋사오니 자신이 지어드린 초막에 거하여 자신이 원하고 기대하는 나라를 임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어쩌면 또 다시 십자가의 길을 막로막는 사탄의 하수인 역할을 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초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를 포함하여 세 제자에게 하늘이 대답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신다.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 머물자는 베드로의 말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고 부활하셔야 하며 제자들도 그 뒤를 따라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다. 주님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보다, 주님의 말을 따르는 것이 참다운 제자의 척도다.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장면을 목격한 세 제자에게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 아무에게도 본 것을 이르지 말라고 하셨다. 자칫하면 주님을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능력의 메시아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세 제자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화의 순간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더 이상 나아갈 것이 없을 듯한 절정의 순간을 만난 것이다. 한편 이것을 보게 하신 것은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잘 갈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격려였다. 제자들에게는 주님에 대한 참다운 이해를 돕기 위한 배려였다.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9:1)”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이후 기다리고 있을 부활의 영광을, 온 세상, 만 왕의 왕으로 등극하시는 것의 영광을 미리 경함하게 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그 영광의 의미를 모른 채 그저 지금 그 순간안에 영원히 거하고자 초막 셋을 짓겠다고 했고, 야고보와 요한은 이 영광을 보고서도 주님 나라의 좌우편을 요구하며 헛된 기대를 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지금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주님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면, 주님의 길을 가로막는 자가 된다. 주님의 주시는 영광을 누리지도 못하고 주님과 아무 상관 없는 자가 되고 만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다.
 
-주님은 변화산을 내려와 갈보리 산에 오르셔야 한다. 제자는 그 길을 뒤따라야 한다. 그래야 온 인류를 구원할 수 있고 아버지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을 외치는 헛된 선동에 더 이상 속으면 안 된다.
 
 
 
*주님, 나의 삶도 내려와야 할 산이 있고 올라야 할 산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주님, 주님의 뒤를 따라 변화산에서는 내려오고, 갈보리 산을 함께 오르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말만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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