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믿음만이 우리를 살린다 [막 9:14-29]
 – 2024년 03월 05일
– 2024년 03월 05일 –
마가복음에서 귀신 축출 이야기는 네 번 등장한다(1:21-28; 5:1-20; 7:24-30; 9:14-20). 본문은 앞에서 등장한 세 이야기와는 다른 초점을 가진다. 주님의 정체성을 귀신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1:24; 5:7)과 귀신들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주님의 능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귀신 들린 딸을 둔 이방 여인의 믿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와 비교해 본문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이 드러나고 있다.
    
산 위에서 영광스러운 변형과 하나님의 음성을 경험한 세 제자는 산 아래에서 일상에 벌어지고 있는 불신과 귀신 들림의 현실로 돌아온다. 귀신 들린 아이를 치유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믿음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제자들의 문제는 아직도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33절)에 더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도가 문제의 핵심임이 드러난다.
    
산 아래에서는 남은 제자들이 무리에 둘러싸여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의 아버지는 주님께 와서 아이의 증상을 심각하게 말했고 고쳐주시기를 간청했다. 주님께서 믿음을 요구하자 그는 자신의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간청한다. 주님께서 아이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내시고 쓰러진 아이를 손잡아 일으키신다. 지켜보던 제자들이 조용히 자신들이 실패한 이유를 묻자, 주님께서는 기도(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
    
    
    
1. 산 아래 제자들이 직면한 위기(14~19절)
산에서 내려온 주님과 세 제자 앞에 남아 있던 제자들이 무리에 둘러싸여 서기관들과 ‘변론(쉬제테오)’하는 모습이 보였다. 새번역은 이 모습을 “논쟁”으로 번역했다. 그만큼 논쟁적이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온 무리가 주님을 보고 놀라서 달려왔다. 아마도 산 위에서 변화하신 것 때문에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얼굴에 광채가 여전히 남아 있지 않았을까? (출 34:29~30).
    
무엇을 변론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귀신 들린 아이 아버지의 대답이 이어진다. 제자들이 아이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다. 아이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예수께 데려온 것이지 제자들에게 데려온 것은 아니었다(17절). 주님께서 높은 산에 계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부탁했지만, 그들은 고칠 수 없었다. 제자들은 6장에서(6:7, 13) 귀신을 쫓아낸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할 수 없었다.
    
주님은 아이 아버지의 말을 듣고 한탄하셨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이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 (신 32:5; 32:20; 사 65:2; 렘 5:21~23; 빌 2:15) 마가는 6:6에서 주님이 나사렛에서 불신앙 때문에 기적을 행할 수 없었다고 했었다. 지금은 무리와 제자들의 불신앙이 아이를 귀신으로부터 구출해 내는 것을 막고 있다고 보신 것이다.
    
    
    
2. 믿음의 능력(20~29절)
마가는 귀신이 주님을 보자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경련을 일으키며 거품을 물게 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주님은 귀신을 상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아이 아버지와 대화를 이어가신다. 아는 어릴 때부터 고통을 겪었음을 알게 된다. 또한 귀신이 아이를 죽이려고 한 시도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아이 아버지는 이미 제자들이 실패한 상황에서 주님께서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고백이 이를 뒷받침한다. 아버지는 실낱같은 믿음을 표현했다.
    
아버지의 의심은 주님의 날카로운 질타를 유발한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23절)”이는 주님의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 없음”이 문제였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를 직역하면 “믿는 자에게는 모든 일이 되는 것이 가능하다”이다. 즉, 믿는 자가 직접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믿음을 가진 자에게 하나님이 가능하게 해 주신다는 의미이다. 이 말씀은 절망 가운데 있었던 아버지에게 그야말로 “복음”이었을 것이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믿나이다(24절)”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22절의 도움을 다시 반복한다.
    
주님은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귀신을 꾸짖는다. 이는 귀신 축출을 통해 무리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 있음을 의미한다. 주님은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되게 하는 귀신아, 내가 너에게 명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말아라.” (새번역_25절) 라고, 단호하게 꾸짖으시며 명령하셨다. 이에 귀신은 조용히 나오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고 마가는 기록한다. 그런데 귀신은 소리를 지른 것뿐 아니라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켜 놓고 나갔다(26절). 주님께 마지막 반항을 한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아이는 다시 일어난다(27절).
    
제자들은 집에 들어가 주님께 조용히 묻는다.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새번역_28절) 이미 귀신을 쫓아낸 경험이 있던 제자들의 당연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마가는 아버지의 반응이나 무리의 반응을 기록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배워야 할 믿음과 기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대답은 “그들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낼 때 기도하지 않은 것으로 보면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어떤 주문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도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계속되는 관계이다. 이런 관계를 나타내는 다른 단어는 “믿음”이다. 본문을 관통하는 개념은 믿음이며 그 믿음의 표현이 바로 기도이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어떤 제한도 두지 않는 것이 믿음이며 그 믿음이 실제 상황에서 드러났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기도하지 않으며,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나는?
*산 위에서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의 “외아들”이, 산 아래에서 귀신에게 유린 당한 “아들(외아들_눅 9:38)”에게 내려 오셨다. 산 아래에는 엘리야와 모세 대신에 악한 영이 있었다. 산 위에서는 순종하는 아들을 보시는 하늘 아버지의 신뢰와 기쁨이 있었으나(7절), 산 아래에서는 귀신 들린 아들 아버지의 탄식(18절)과 주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의 고백(22절)이 들려온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다.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산 위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산 아래로 내려 오신 것이다.
 
 
-산 위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았으나 산 아래에서는 한 아비의 아들이 귀신에게 사로잡혀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는 비참한 지경에 있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변화산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와 갈보리 산으로 올라가셔야 할 이유였다. 산 아래 인류의 죄와 질고를 지고 돌아가셔야 이들도 온전해져서 산 위의 주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다.
    
-주님은 산 아래로 내려오셔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무엇이냐고 물으셨다(16절). 주님이 산 아래에 내려와 제자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물으셨듯이 나의 삶에 일어나는 문제가 무엇인지 물으시는 분이시다. 과거에 주님이 귀신을 내쫓는 권세를 주셨고, 그 권세로 이적을 행하였음에도(6:7~13), 지금은 귀신을 내쫓지 못했다.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마음과 다를 바 무엇인가?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먼저 물으신다. “무엇이 문제이냐?”
 
-믿음 없는 세대를 향해 탄식하신다. 능히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쳤던 제자들의 실패는 “믿음의 결핍” 때문이었다.
    
-아이 아버지에게 믿음을 요구하시는 주님이시다. 제자들의 실패로 불신하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믿음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 믿음은 자기 신념이나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다. 주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에게도 주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기도하는 믿음을 늘 붙잡아야 함을 도전하여 주신다. 주님 앞에 나와 삶의 문제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리라.
    
-제자들은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받았고 그것을 사용하여 성공적인 사역을 수행한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실패한다. 주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기도 없음”으로 표현하셨다. 수단으로서의 기도가 아니라 신뢰로서의 기도를 가리킨다. 기도는 만능열쇠가 아니라 나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안에서 나를 통해 이뤄지도록 구하는 것이다.
    
-결국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도의 능력은 기도하는 사람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구체적인 증거이다. 제자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 자동으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내가 믿고 늘 의지할 것은 하나님뿐이다.
    
-산 아래 있던 아홉 명의 제자는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 능력을 사용할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귀신 들린 아이 아버지도 절망적인 마음으로 주님께 하소연한다. 주님은 그 아버지에게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그는 주님의 말씀에 속히 자신의 믿음 없음을 인정하고 이제 온전하게 믿겠다고 고백하며 자식의 치유 기적을 누렸다.
    
 
-어떤 어둠의 권세도 주님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귀신은 어릴 때부터 아이에게 들어와 그 정신을 지배하여 자주 물과 불에 몰아넣어 죽이려고 했다. 또한 주님을 보자 아이로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런 모습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주님은 귀신보다 강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을 마음 안에 모시고 주님 말씀 따라 살아가는 걸음 앞에 두려운 것 없다.
 
-잔인하고 무자비한 귀신은 주님과 그분의 권능을 알고도 마지막까지 발악한다(20, 22절). 주님보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을 꺾어놓겠다는 것이다. 사탄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항상 깨어있어 끝까지 믿는 도리이신 주님을 굳게 붙잡아야 할 이유이다.
 
 
-참담한 실패가 가져온 절망의 벼랑 끝에서 주님께 손을 내밀며 기대하는 아버지의 기도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도와주소서”였다. 하지만 주님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책망과 도전 앞에, 결국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솔직히 인정하고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며 간절히 매달렸다(22~24절).
 
-이것이 흔들리고 넘어져서 위태로울 때도 있으나 포기하지 않고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겠나? 이것이 겨자씨만한 믿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이 실낱같은 믿음으로 태산과 같은 불신을 밀어내고 주님의 자비를 구하며 나아가리라.   
    
    
    
*주님, 귀신이 다스리는 고난의 세상 속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이 믿음이 우리를 살리는 것을 믿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스데반의 설교_모세 이야기 [행 7:17-36]

스데반은 출애굽의 이야기 가운데 중요한 대목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모세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는 모세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바로 공주의 아들로 입양된 이야기로 시작하고, 청년 시절 애굽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2차 투옥과 하나님의 적극 개입 [행 5:12-26]

산헤드린 공회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고 하나님은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지속적으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신다. 이에 시기로 가득한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다시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