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아니라 주님이 가신 길로! [막 9:30-37]
 – 2024년 03월 06일
– 2024년 03월 06일 –
갈릴리로 들어오셔서 제자들에게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신다. 제자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누가 더 큰 사람인지를 놓고 서로 다툰다. 이에 주님은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도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다. 주님이 이루시려는 나라는 섬기는 자가 높임을 받는 나라이다. 세상 논리와 반대되는 하나님 나라의 논리이다.
 
수난에 대한 가르침은 8:31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 후 변화산에서 내려오실 때 세 제자에게 한 번 더 말씀하셨으나, 제자 공동체 전체에게 말씀하신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세 번째는 10:32~34). 아쉽게도 제자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주님의 사역에 걸맞지 않은 주제에 더 관심을 둔다. 주님은 이 기회를 통해 모든 복음서에서 함께 다룬 제자도의 핵심 구절을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 가운데 있는 제자들이 깊이 새겨야 할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1. 두 번째 수난 예고(30~32절)
“그곳을 떠나”라는 구절을 통해 갈릴리 사역이 마무리됨을 알린다. 10:1에서 유대 땅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넘어가셨다는 기록을 미루어 보면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가신다는 언급은 공개적인 사역이 아니라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것(31절)에 집중하는 여정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제자들에게 “인자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가르치셔야 했으므로 갈릴리를 지나는 동안 사람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으셨다고 부연한다(30~31절). 첫 번째 수난 예고와 차이점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는 대신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이 죽일 것이라고 표현한다는 점이다. 헬라어 문장은 수동태에서 능동태로 변화된다는 점이다. 또 주목해야 할 점은 수난 예고 후에는 반드시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이 이어진다. 본문도 예외가 아니다.
 
제자들은 첫 번째 수난 예고 이후 제자도에 대하여 자세히 가르쳐주셨음에도 여전히 주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부활을 이해하지 못해 엘리야의 재림을 물어보기도 했다(9:10~11). 그러나 첫 번째 수난 예고 때 베드로가 주님을 강하게 책망(꾸짖다_에피티마오)했다가 오히려 더 강한 책망을 당하고 사탄(사탄적)으로 불린 것으로 인해 쉽게 질문을 하지 못하고 두려워했을 가능성이 크다. “두려움”의 정서는 수난 예고 때마다 제자들을 휘감았고, 심지어 주님의 부활 후에도 여전히 제자들을 강하게 짓눌렸던 정서였다. 심지어 마가복음은 그 두려움의 정서 속에 마무리된다(16:8).
 
제자들은 이 말씀(수난 예고)을 깨닫지도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했다(32절).
 
 
 
2. 제자들 사이의 논쟁(33~37절)
33~34절은 제자들의 다툼을 기록한다.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에 실패하고 믿음에 문제가 있음이 드러났다. 또한 본문은 그만큼 주님의 정체성과 의도에 관해 얼마만큼 오해하고 있었는지 드러난다. 주님은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마지막 사역인 예루살렘에서의 고난과 죽음, 부활의 길로 묵묵히 나아가고 있는데, 제자들은 “누가 더 큰가?”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왕이 될 스승의 바로 뒷자리를 먼저 차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몰랐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주님은 열두 제자들을 불러 모아 가르치기 시작하신다(35절). 첫 번째 수난 예고 후 주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구하려 하는 자는 잃을 것이며, 예수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할 것이라고 가르치셨다(8:35). 본문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끝이 되어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할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제자들이 주님의 제자로서 가지고 있었던 환상을 깨뜨려 버린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 의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깨닫지를 못한다. 제자들이 세속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지위와 가치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완전히 뒤집히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두 번째 예를 드신다. 이 예는 첫 번째 예보다 더 충격적이다. 주님은 집 안에 있던 어린아이를 하나 데려다 품에 안고 어린아이를 그의 이름으로 영접하면 그를 영접하는 것일 뿐 아니라 결국 예수를 보낸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이 가르침이 왜 충격적인 이유는 현대에서야 어린아이를 순진한 존재로 여기지만, 당시 어린아이에 대한 인식은 결코 긍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1~2에서 당시 어린아이의 지위가 노예와 다름없었음을 묘사한다. 이는 아버지가 정해 놓은 시기 전에는 어떤 권리도 갖지 못하는 존재이다. 당시 어린아이들은 여자와 함께 있어야 하며 랍비와 그의 제자들이 가르치고 배우는 장소에 있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인식 속에서 주님께서 나를 영접하는 것이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에는 어떤 문제도 없었다. 당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은 보낸 사람의 완전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된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권위를 지닌다고 받아들이기는 매우 힘들었다. 로마제국 시대의 문헌에도 사춘기 이전의 어린아이들에 관한 관심이 전혀 없었다. 당시 의학 서적에도 어린아이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다. 자식이 없어서 상속자가 필요했던 로마 사람들은 어린아이보다는 성인을 입양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주님께서 이렇게 사회적으로 보면 전혀 존재감이 없는 어린아이를 예수 대신 영접하라는 예를 보이신 것은 제자들의 “누가 큰가?”에 대한 다툼을 잘 알고 계신 가르침이 틀림없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왕(메시아)으로 등극할 경우, 예수를 대표하여 그의 권위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놓고 서로 다투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주님은 주님의 특사가 될 자격을 모든 사람의 첫 번째 사람이 아니라 “끝”이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노예가 되는 것으로 정의하신 것이다.
 
만약, 이 가르침에 근거하여 본문에 등장하는 어린아이가 그 집의 노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고려하면 36~37절의 말씀은 35절에서 가르치신 내용의 시각적인 예로 제시된다고 할 수 있다. 주님은 그 어린 아이(파이디온_노예 아이를 지칭하기도 했다)를 “내 이름”으로 영접할 것을 요구한다. 즉, 제자들이 아무 지위도 없는 사람을 예수의 이름으로 영접하고 섬기면, 그들은 예수 자신과 그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고 섬기는 것이 되는 것이다.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일을 할 수 있는 주님의 대표자가 되는 길은 세상에서 아무런 힘도, 영향력도, 지위도, 중요성도 없이 잊혀가는 사람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영접하고 섬기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계속 보여 주신 예였고 십자가의 길로 가시는 이유였다.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함은 세상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위대함과 명예를 뒤집어엎는 개념이다. 주님께서 세상을 바라보시는 관점으로 보지 않으면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주님은 제자들에게 또다시 자기 죽음과 부활을 알리지만, 제자들은 혼란스러워하며 뜻을 묻기도 두려워한다. 그런데도 오히려 그들이 누가 더 큰지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주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더 큰 이(첫째)가 되려면 다른 이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주님의 수난 예고를 또다시 외면하는 제자들이다. 그 말뜻을 온전하게 깨닫지 못했지만, 더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 사실일까 두려웠고, 그러면 자신들이 예수를 따른 목적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자들의 침묵은 순종의 침묵이 아니라 거부의 침묵이었다.
 
-반면 주님은 죽음과 부활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셨다. 주님은 단순히 가르치고 기적을 행하여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와 십자가의 고난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셨다. 주님의 이 낮아지신 희생으로 오늘 우리가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다면 예수님을 본받아 지체들을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한다.
 
-주님은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주님은 제자들이 세상 나라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가치관을 갖기를 원하신다. 제자들은 다른 유대인들처럼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할 정치적인 메시아로 주님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주님이 왕이 되실 때 자신들도 출세하게 될 것을 꿈꾸었다. 하지만 주님은 첫째가 되려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세상 가치관을 뒤엎으신다. 공동체 안에서 나는 섬기는 자인가?
 
-예수님은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데려가겠다고 말씀하시는 그 길 위에서 제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꿈꾸고 있다. 더 나아가 누가 더 주님을 이용하여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지를 두고 경쟁했다. 제자들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동료 제자들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주님과 제자들은 같은 길을 가고 있으나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주님과 동상이몽 해서는 안 된다. 주님과 제자들은 모두 예루살렘 향해 같은 길을 걷고 있었으나 서로 관심사가 달랐다. 주님의 관심은 십자가지만, 제자들의 관심은 예루살렘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주님은 그들을 불러 진정으로 큰 자가 되는 길을 가르치신다. 지금 우리 공동체와 교회는 서로 무엇을 토론하고 있을까? 혹시 지위를 얻거나 명예를 추구하는 일을 토론하고 있지는 않는가? 혹시 높은 지위를 얻거나 복을 받기 위해서만 주님을 따르고 있지는 않는가?
 
-주님은 제자들에게 제자는 큰 능력을 베푸는 자가 아니라 작은 자를 영접하는 자라고 말씀하신다(36~37절). 어린아이를 영접하라는 것은 가장 힘없고 낮은 자만 섬기라는 말이 아니라 낮은 자부터 모든 사람을 섬기라는 뜻이다.
 
-주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세워 안으시고 이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자가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제자들이 오르고 싶은 나라는 누군가를 섬기고 영접하는 나라가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낮은 자는 무시하고 지배하며 이용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처럼 작고 연약한 자들 속에서 만날 수 있기에 그들을 영접하고 사랑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길… 온 인류를 생명으로 이끄는 십자가로 가는 길, 제자들의 길… 누가 더 큰가를 다투며 높은 자리로 가려는 길, 하나님 나라의 길… 첫째가 되려면 가장 끝째가 되어야 하는 길…. 이 길을 가련다…
 
 
 
 
*주님, 큰 자보다 섬기는 자가 되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르겠습니다. 내가 걷고 싶은 길을 경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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