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짠맛 가득 머금은 소금처럼 살리라 [막 9:38-50]
 – 2024년 03월 07일
– 2024년 03월 07일 –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지만, 제자들이 모르는 사람에 대해 예수님은 관대한 태도를 보이신다. 이런 상황 가운데 주님의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이 이어진다. 제자 공동체에 들지 않은 누군가 주의 이름으로 축귀를 행한 것을 보고 제자들은 금하고 주님은 정확한 기준을 제시해 주신다. 그가 예수께 속한 자라면 금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제자들은 믿는 누군가를 실족하게 할 수도 있음을 깨닫고 주의해야 함을 일깨운다. 또 제자들 스스로 실족할 만한 죄를 항상 경계해야 한다.
    
9:14-29에서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동안, 주님을 따르지 않고 있던 무명의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다’라는 것은 그가 주님의 이름을 단순하게 사용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갖고 사용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사도행전 19:13~16을 통해 보면 단순히 예수의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주님께서 이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보이셨다는 것은 이 추측에 상당한 설득력이 있음을 인정할 할 수 있다.
    
    
    
1. 반대하지 않는 자, 우리를 위하는 자(38~41절)
마가복음에서 유일하게 요한이 주님께 보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요한은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금했다는 것이다.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는데, “자기들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38절에서는 “따르는” 문제가 두 번 반복된다. 이는 요한을 대표하여 제자들의 배타적인 태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요한의 표현은 “주를 따르지 않는 자”가 아니다. “우리를 따르지 않는 자”였다. 흥미로운 것은 9:14~29에서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다. “주의 이름으로(엔 토 오노마티 수)”가 의미하는 것은 “주의 권능으로”이다. 주님의 이름이 가지는 능력을 사용한다는 뜻이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길은 없다. 하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다는 것과 주님께서 요한의 보고를 듣고서도 관대하였던 것을 미루어 보면 열두 제자 중의 하나는 아니었으나 믿음을 가지고 따르던 사람 중 하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관련하여 눅 10:1~17에서는 예수로부터 보냄을 받아 복음을 선포하고 치유하며 귀신을 쫓아냈던 72명의 제자가 언급되고 있다.
    
39~40절은 주님의 관대한 처분에 대하여 기록한다. 주님은 비방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두 가지를 언급하신다. 먼저, 주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자들이 “즉시로” 주님을 비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39절). 또,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40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제자들의 배타적인 자세에 대한 경고도 포함된다. 하나님 나라 사역은 당파나 파벌 의식을 가진 자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명분과 권위에 신경 쓰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공헌하기 어렵다.
    
41절은 주님의 이름으로 물 한 그릇 주는 것의 가치를 설명한다. 요한은 예수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경쟁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주님은 요한과 제자들이 그런 생각에 젖어 있을 때, 제자들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친절에 초점을 맞춘다. “물 한 그릇”이 연상시키는 것은 제자들 자신이 극단적으로 힘든 상황에 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주님은 제자들이 모든 사람에게 핍박받고 미움받을 것을 경고한다(13:13). 그때가 되면 물 한 그릇 대접하는 것도 많은 용기가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든, 작은 냉수 한 잔의 섬김이든 주님을 위한 일과 섬김에는 그에 따른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2. 실족에 대한 가르침(42~50절)
“실족(스칸달리조)”하게 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돌에 걸려 넘어진다는 의미다. 죄를 지어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유적으로는 어떤 사람을 죄를 짓도록 이끌어서 진정한 제자가 못 되게 할 뿐 아니라 믿음을 잃게 만드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은 주님을 따라다니던 많은 무리 중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넘어지게 하여 믿음을 잃게 만드는 행동은 엄청나게 무거운 돌(연자 맷돌)을 목에 매어 바다에 던지는 것보다 더 나쁜 행동이다.
    
43~48절은 죄를 범하게 하는 요소들에 대한 극단적인 처방을 가르치신다. 43절의 “범죄하게”로 번역된 단어는 “실족하게”라고 번역된 단어와 같다(스칸달리조_43, 45, 47절). 이 세 구절에서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몸의 한 부분(손, 발, 눈)이 제자를 실족하게 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 그 부분을 잘라내는 것이 몸 전체가 지옥(게헨나)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을 것임을 가르치신다. 이 부분은 제자들 자신의 문제가 걸려있는 주님의 가르침이었다. 이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해하는 것을 금지한다(14:1; 왕상 18:28). 특히 열왕기 상 18장에서 보여주듯 자해는 바알 숭배 사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제자도에 있어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49~50절의 소금에 관한 말씀은 매우 난해한 구절이다.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49절)”라는 말씀은 에스겔 16:4과 43:24과 연결하여 소금이 가지는 정결 기능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런데 소금과 불이 같이 등장하는 이유는 “불”이 주는 핍박과 연결된 이미지 때문이다. 즉, 소금이 제물을 정결하게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불로 연단을 받아 깨끗하게 되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이는 곧 십자가를 향해 가는 주님을 뒤따르는 제자들의 삶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따라올 것을 말씀하셨다.
    
또, 소금을 예로 들은 주님의 말씀은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 없어진다”라는 것을 통해 제자들의 삶에서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세상과 구별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음을 말씀하신다(참고 마 5:13~16). 소금으로서 제자의 삶은 세상을 맛나게 하는 기능과 동시에 썩지 않게 하는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
    
마지막으로 가르치시는 것은 제자 공동체 안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평한 공동체를 이루어 가라고 말씀하신다. 이 소금은 레 2:13의 언약의 소금을 가리킨다. 제자들이 형성하는 공동체는 언약의 공동체이다. 어느 곳에서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화평한 공동체를 만들어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소금을 예로 들어 가르치시는 말씀은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난과 핍박을 당하며 정결하게 될 제자 공동체는 그 과정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소금으로서의 맛을 잃을 수 없는 것이다. 고난과 핍박 중에서 맛을 잃지 않고 주님의 제자로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열쇠는 바로 그 공동체가 언약의 공동체가 되어 그 안에서 하나님의 화평(화목:에이레뉴오_평화를 유지하다)을 유지하는 것이다.
    
    
    
나는?
-같은 믿음 안에서 서로 인정하며 포용하기를 원하신다(39~41절). 주님은 제자의 범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모든 사람”으로 확대하신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면 하늘의 상이 있다고 하신다. 오늘날 마치 우리 교회와 우리 공동체만 주님을 위한 것처럼 생각하면서 다른 교회와 공동체를 무시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주님께 책망을 들을 일이 분명하다. 비록 소속과 사역이 나와 다를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경쟁자가 아닌,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는 동역자로 여겨야 한다.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역하는 다른 교회나 공동체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교회이다.
    
-반대하지 않는 자는 영접하는 자이다. 자신들만의 특권을 은근히 주장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자신을 반대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위하는 자라고 하신다. 차별과 배제를 통해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세상의 방식을 거절하고 포용과 용납을 통해 수용하는 공동체를 이루시려고 주님은 이 땅에 오셨다.
    
    
-성도들을 향한 작은 선행이 아주 큰 상으로 이어진다(41~42절). 마찬가지로 성도들을 실족하게 하는 행위가 큰 벌로 이어진다. 주님은 작은 자 중 하나라도 괴롭게 한다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셨다. 늘 돌아보고 살펴야 한다. 혹시 내 부주의나 이기심으로 다른 형제자매의 신앙생활을 어렵게 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런 측면에서 실족하게 하는 자는 이미 실족한 자이다. 자신들만 권력을 향유하는 나라를 추구할 때는 형제를 사랑하기보다 미워하고 섬기기보다 실족하게 할 수 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과감하게 그런 세계관과 단절하지 않으면 결단코 하늘의 상급(구원)을 기대할 수 없으리라.
    
    
-죄의 심각성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하신다(43~49절). 주님은 범죄하게 만드는 것을 철저하게 끊으라고 강조하신다. 손과 발과 눈을 제거하라는 것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명령이 아니다. 영혼 구원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포기하라는 말씀이다. 나의 육신이 죄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어떤 조치를 해야 할까? 지옥에 대하여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
    
-소금은 제자도의 상징이다(50절). 만약 제자들이 서로 큰 자가 되려고 다투다가 자신이나 누군가를 넘어지게 만든다면, 맛을 잃은 소금처럼 되고 말 것이다. 제자는 자신과 공동체가 더욱 정결하고 화목함으로써 제자의 맛과 멋을 잘 드러낼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며 순종해야 한다.
    
-화목하게 하는 소금, 짜게 하는 소금…. 세상은 권력 지향적이어서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갈등을 유발한다. 하지만 제자들은 화목한 세상을 추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세상을 탐욕의 부패로부터 지키기 위해 짠맛을 간직한 소금이 되어야 한다. 소금에 절여진 그리스도인의 희생적인 삶만이 남을 실족하게 하고 배제하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 짠맛이다.
    
    
-하나님 나라는 샬롬의 나라이다. 누구든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여김받아 살아간다. 하지만 죄는 그 반대이다. 나만을 위한 이기적이고 차별과 배제와 분열의 문화를 만들어 낸다.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유지하며 전수하기 위해 기만과 폭력을 불사한다. 주님은 매우 과장법을 사용하시면서까지 단호하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들을 제거하고 멀리하라고 요청하신다.
    
-그것은 먼저 “배타주의”라는 장애물일 것이다. 제자 무리에 속하지 않았으나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자를 배제하고 차별하려 했다. 하지만 주님은 거절하시고 오히려 주의 이름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려고 하는 자들은 모두 제자이며 이웃이라고 확장시켜 주신다.   
    
-또 주님께서는 “차별”이라는 장애물을 치우셨다. 자신을 반대하지 않는 자, 그리스도께 속한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자는 모두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으신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 가운데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결코 그리스도의 자비를 덧입을 수 없다고 하신다. 그럴 바에야 바다에 수장되는 것이 더 낫고, 손과 발과 눈을 잃는 것이 더 나을 만큼 차별이라는 죄에 따르는 결과는 끔찍하다고 강조하신다. 나만 살려고 남을 배척하고 차별하는 죄는 결국 자신을 치명적으로 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불로 연단 받아(소금 침을 받아) 정결해지고 거룩해진 제자들은 소금기 가득 머금은 쓸모 있는 존재이다. 그렇게 희생과 대가를 감수하며 이 세상보다, 하나님 나라 원리대로 사는 제자도로 공동체를 화목하게 한다.
    
    
    
*주님, 주님의 제자답게 차별하지 않고 화목하게 맛을 간직한 소금처럼 살겠습니다.
*주님, 짠맛 가득한 소금처럼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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