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바리새인들의 오만한 시험 [막 10:1-12]
 – 2024년 03월 08일
– 2024년 03월 08일 –
가버나움을 떠나 유대 지방을 거쳐 요단강 건너편으로 이동하신 주님은 모여든 무리를 향해 가르침을 계속하신다. 주님과 바리새인들의 긴장은 점점 높아만 간다.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시험하려고 이혼과 관련하여 민감한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이혼 허용의 명분으로 모세의 율법을 주저 없이 꺼내 들었다. 하지만 이혼에 대한 주님의 의견은 모세의 율법보다 더 근원적인 원리를 말씀하셨다. 주님의 가르침은 단호하고 명료했다. 주님은 결혼의 숭고함을 강조하시며 이혼 사유에 깃든 인간의 완악함을 신랄하게 꼬집으셨다. 결혼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제도이다. 남자와 여자 간의 일생에 걸친 약속을 전제로 한다. 이 거룩한 언약을 깨고 다른 사람과 재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간음에 버금가는 행동이다.
    
 
    
1. 바리새인들의 시험과 예수의 가르침(1~9절)
마가는 바리새인들이 질문하는 동기가 주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다. 지리적으로 보면 주님이 헤롯 안티파스의 관할 지역으로 들어가자, 이 질문을 가지고 주님을 시험한 것이다. 세례 요한은 헤로디아가 헤롯 안티파스와 결혼하려고 이혼한 일의 부당함을 지적하다가 참수를 당했다. 헤롯은 주님을 세례 요한의 부활이라고 여기며 신경을 쓰고 있으므로 주님께서 헤롯과 헤로디아의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하도록 덫을 놓은 것이다. 또한 율법적으로도 그들의 질문은 정상적인 율법 해석을 놓고 벌이는 토론이 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당시 이혼할 수 있는 권리가 유대인들 사이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율법에 대하여 엄격하게 해석하는 샴마이파에서는 간음 이외의 사항은 이혼의 근거로 허락하지 않았다. 반면 “요리를 잘 못하는 경우와 같은 사유도 이혼할 수 있다며 율법 해석에 좀 더 자유로운 힐렐파에서는 거의 모든 이유를 수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유명한 힐렐파에서 랍비였던 아키바 같은 경우에는 남자가 더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 마음을 빼앗긴 경우도 정당한 이혼의 근거로 하락했을 정도였다.
    
주님께서는 당시 이혼 근거로 해석하고 있던 신 24:1~4에는 분명 이혼을 명하고 있지 않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가진 허구를 질문을 통해 드러낸다. 모세는 이혼을 명령한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이혼하는 남편과 아내 양편의 권리를 위해 이혼 증서를 “허용”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3절). 예수는 바리새인들에게 모세가 진정으로 명령한 것은 이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도록 요청하고 있으나 그들의 대답은 핵심을 비껴간다(4절).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1~4를 인용해서 대답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이혼을 명령하거나, 이혼에 대한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법적인 이혼과 재혼에 대한 대비책으로 이혼 증서를 사용해 여성의 권리를 보호해 주는 데 있다.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가려면 모세가 이혼을 명령했다는 사실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데, 주님은 이를 정면으로 지적하신 것이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이 이혼을 허용하였다고 답변하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4절). 바리새인들이 난감해졌다.
    
주님은 모세가 이혼 증서를 써주고 이혼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마음의 완악함은 하나님을 의지적으로 거부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 상태로는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는 삶을 살 수 없다. 모세가 이혼을 규제하는 율법을 주었으나 주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은 그것이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명기 24:1~4를 근거로 하나님이 유대인 남자들에게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한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율법을 남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것이다.
    
율법에 접근하는 그들의 태도와 방법에 문제 있음을 주님의 가르침을 통해 드러난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이 주어진 본래 의도는 무시한 채 율법을 연구하여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에 더 힘을 쏟은 것이다. 반대로 주님은 창조 때부터 드러난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 의도를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그 의도는 창세기 1~2장에서 드러난다. 주님의 질문은 창세기 1~2장에서 무엇을 “명” 했는지 물어본 것이었지만,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장에서 모세가 “허락”한 것을 대답으로 제시한 것이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한 몸으로 결합한 관계로 묶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묶으셨으므로 하나님이 결합의 주인이 되는 것인데, 어떻게 남자가 그 결합을 깰 수 있는 주인 노릇을 하며, 자기가 원치 않는 물건을 버리듯이 이혼을 할 수 있는지 질문으로 대답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2절의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선명해진다. “율법이 허락하는 과정이 있더라도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은 옳지 않고 불법이다.
    
    
    
2. 제자들의 질문과 주님의 가르침(10~12절)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이 끝나고 주님의 가르침을 구하는 제자들(10절)에게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가르치신다(11~12절). 주님의 가르침이 매우 급진적이고 단호해서 제자들이 놀란 듯하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혼뿐 아니라 이혼 후 재혼하는 것도 간음이라고 선언하신다. 신 24:3~4는 이혼한 여자가 재혼했다가 다시 이혼하였으면 그녀와 재혼하는 것을 금하고, 그것을 “가증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수치 되는 일”이라는 다소 모호한 기준을 제시하지만, 주님은 그저 남편과 아내가 공히 상대방을 “버리면(동기는 완악함)” 그 자체가 간음을 범한 것과 동일하다고 강조하신 것이다.
    
이혼이 마음의 완악함에서 시작된다면 재혼을 그 완악함의 연장으로 보신 것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마태는 제자들이 충격받는 모습을 고스란히 표현했다.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남편과 아내 사이가 그러하다면,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새번역_마 19:10) 예수님 당시 시대는 실제로 이혼 증서는 재혼을 허락하고 있었던 것으로 문헌에 남아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혼과 그 후의 재혼까지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으로 가르치셨다.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세우신 결혼의 신성함과 영속성을 강조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혼했거나 재혼한 사람들을 정죄하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마태는 “음행”을 이혼할 수 있는 유일한 전제 조건으로 언급했으나 마가는 이마저도 소개하지 않음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결혼의 숭고함에 대해 한층 더 강조한 것이다.
    
    
    
나는?
-늘 하시던 대로 가르치시는 주님이시다(1절). 주님은 가시는 곳마다 인내하시며 무리를 가르치신다. 상황과 여건에 따라 좋은 결과가 보이지 않고, 수고의 열매가 없다고 해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면 안 된다. 당장의 결과에 상관없이 나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리라.
    
-바리새인들은 이미 이혼에 관한 주님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질문했다(2절). 바리새인들은 당시 헤롯 안티파스가 아내를 버리고 이복동생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삼은 일을 책망하다가 죽은 세례 요한의 사건을 염두에 두었었다. 요한처럼 주님도 같은 곤경에 처하기를 바란 것이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고수하기 위한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자신들의 정체성인 말씀조차 쉽게 이용하는 이들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질문한 이유는 평소에 급진적인 해석을 하던 주님께서 이번에도 율법과 배치되는 해석을 하도록 유도하여 세례 요한처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한 것이다. 알을 위한 질문이 아니라 시험을 위한 오만한 질문이었다. 나의 유익과 만족, 권리로 착각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무리하게 들어 쓰는 오만과 교만에 빠지면 안 된다.
    
    
-주님은 바리새인의 이혼에 관한 질문에 대한 대답보다 결혼의 의미를 가르치신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공적인 결혼 관계 속에서 일생 정절을 지키는 것이다.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육체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적으로도 하나가 되어 삶의 모든 면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결혼은 두 죄인의 결합으로 상대방을 도우며 그리스도인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서로 섬기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혼이나 재혼의 여지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신다. 이를 통해 새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은 완악한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특히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동일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명령이었다. 누구든 이혼의 빌미가 될 만한 그릇된 일에 절대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신명기 24장을 통해 이혼 증서를 써주라는 가르침을 주신 것에 대하여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기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것일 뿐, 결혼제도에 두신 본래 하나님의 기대는 이혼하지 않는 것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남자들의 자유로운 이혼을 허용하는 구절로 악용해 왔지만, 신 24:1~4이 가리키는 핵심은 한 번 이혼하고 재혼한 아내가 혼자 되었다고 하여 그녀와 다시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그 본래의 취지를 왜곡하면서까지 자신들의 부정을 정당화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불가피한 경우 이혼을 할 수 있으나 결혼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어기는 어떤 부정한 관계도 모두 간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그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적용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하여도 간음하는 것과(자기를 우상화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음으로)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미 바리새인은 율법을 어기고 간음에 동조했을 뿐 아니라 율법의 완성으로 오신 주님을 시험하여 영적인 간음까지 행하고 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한다. 이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보여주고, 하나님과 관계 맺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은 완악하여 하나님의 뜻에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완악한 인간에 맞춰주셔서 율법을 주신 본래의 목적을 이루려 하신다. 이혼 증서를 써주라는 것은 이혼당한 여인을 위한 생존 배려였다. 다시 재혼할 기회를 열어주어 생존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를 유지 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이혼 증서를 받은 여인이 시집을 가서 맞이한 둘째 남편이 그녀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주었거나 혹은 죽으면 여자는 전남편과 다시 결합할 수 없다는 명령이다. 모세는 이런 행동을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런 행동의 핵심은 자기 결정권, 자기 의도가 하나님께서 정한 하나님의 법보다 우선하도록 자기 마음대로 행하기 위해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이용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처럼 바리새인들의 질문 속에 담긴 당시 유대인들의 저열한 이혼 방식과 그로 인해 그 땅에 만연하게 된 가증한 삶을 한탄하신 것이다.
    
    
*말씀을 나의 유익과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오용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 바리새인들이 완악하게 이용하는 말씀을 저는 말씀이 이끄는 대로 온전히 따르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 말씀을 이용하여 곤경에 빠뜨리거나, 말씀을 도구 삼아 저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모든 시도에서 보호해 주시고, 혹시 이런 일을 당할 때 감당하고 헤쳐 나올 힘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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