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길가에서 뛰어 일어나 길을 따르다 [막 10:46-52]
 – 2024년 03월 12일
– 2024년 03월 12일 –
주님께서 여리고에 이르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허다한 무리가 주님의 뒤를 따른다. 혼잡하기 그지없는 여리고 거리에서 누군가의 나사렛 예수시다는 말을 들은 구걸하고 있던 소경 바디매오가 힘껏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는 간절하게 보기를 원했고 그의 요청에서 믿음을 보신 주님은 그를 치유해 주신다. 그는 주님께서 올라가시는 예루살렘 길에서 제자로서 주님의 뒤를 따른다.
 
10:46~13:37은 수난 전까지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을 묘사한다. 본문은 소경 바디매오를 통해 앞서 언급한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을 매듭짓는다. 제자의 길을 거절한 부자, 자리다툼을 벌이는 제자들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바디매오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어린아이와 같은 사례로 등장한다.
 
 
 
1. 여리고의 소경 거지 바디매오(46~47절)
주님은 제자들과 요단 동편 데가볼리와 베레아를 지나 내려오다, 요단강을 건너 서편 여리고에 도착한다. 여리고는 요단강 서쪽 약 8km, 예루살렘 북동쪽 약 30km 떨어진 저지대 도시이다. 해수면보다 1km 낮은 이 도시는 유월절이 가까울 당시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떠나온 무수한 순례객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마가는 “허다한 무리”가 예수 일행과 여리고를 통과하여 빠져나가고 있었다고 기록한다.
 
이렇게 혼잡한 길가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마가는 그를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 맹인, 거지”로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그가 어떻게 소경이 되었는지 밝히고 있지 않는다. 그는 평생을 구걸로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길 가”에서 사람들로부터 직접적으로 거절과 은혜를 맛보아 알아 왔다. 특히 유월절 기간 여리고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객들을 대상으로 거절보다 더 많은 은혜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넉넉한 마음이던 그 기간만큼은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일 년 중 가장 큰 자비를 기대할 수 있는 은혜의 시기였다. 그러나 아무리 순례객들의 자비가 넘쳐난들 그의 비참한 길가 구걸의 삶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때 누군가 외친 “나사렛 예수다!”라는 소리가 그의 귓전에 울려 퍼진다. 주님은 지금까지 여리고에 내려오신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소문은 이미 이 지역에도 충분히 퍼져 있었다. 바디매오의 마음속에 갈릴리 지역에서 일어난 놀라운 일은 자신에게도 언젠가 주님께서 치유해 주실 그날을 소망하기에 충분했다. 그 나사렛 예수가 지금 자신이 평생 구걸하고 있었던 이 길을 지나가시는 것이다. 무수한 순례객들로 붐비는 거리에서 누군가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했어도 충분히 파묻힐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시력을 잃었으나 누구보다 청력이 뛰어났던 바디매오는 이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디매오는 놀랍게도 주님을 “다윗의 아들 예수”로 고백한다. 나사렛 예수에 대한 특별한 소문들을 들은 그는 주님을 다윗의 아들로서 바지 비를 베풀어 이스라엘을 회복할 메시아로 이해하게 한 것이다. 비록 맹인이었지만 바디매오는 아무도 볼 수 없었던 주님의 정체성을 마음의 눈으로 보았다. 그렇게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다윗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의 자비임을 주저하지 않았다.
 
 
 
2. 바디매오를 부르신 예수님(48~50절)
바디매오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때 많은 사람이 그를 꾸짖어 조용히 하라고 제지한다. 이 모습은 제자들이 어린아이를 꾸짖듯이 많은 사람이 그의 외침을 금하고 있음을 비교해 준다. 무리의 이러한 행동에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주님의 행렬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무리의 꾸지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디매오는 더욱 큰 소리로 간절하게 외친다. 마침내 주님의 걸음이 멈춰 섰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가 가시는 예루살렘으로의 길이 낮은 자를 섬기러 가시는 길임을 바디매오로 보이신다. 제자들과 무리는 예수께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시는 영광스러운 “다윗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바디매오에게 주님은 자신과 같이 가장 미천한 자의 자리까지 내려오시는 자비하신 “다윗의 아들”이었다.
 
주님은 가시던 길을 멈추신다. 그리고 바디매오를 사람들을 시켜 자기 앞으로 세우신다. 조금 전까지 바디매오를 꾸짖었던 그들은 이제 그를 주님께 인도하는 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바디매오에게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라는 말을 전한다. 주님의 가장 위대한 초청에 그는 겉옷을 던져 버리고 뛰어 일어난다. 그가 입었던 겉옷은 그이 유일한 보호 장구이자,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받이로 사용했을 만큼 구걸 필수품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버려두고” 주님께 나아왔다.
 
이런 바디매오의 모습은 앞서 베드로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10:28)”라는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겉옷을 버렸다는 것은 소유 전부를 버렸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 그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과 함께 주님이 있는 곳으로 나아온 곳과 눈이 뜬 후 주님을 따라간 것은 한 부자가 재물을 버리지(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10:21) 못하고 결국 주님을 떠나간 모습과 비교가 된다.
 
 
 
3. 믿음으로 보게 된 바디매오(51~52절)
주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는지 물으신다. 직전 단락의 두 제자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하셨다(10:36). 그때 제자들은 주저함 없이 자신들의 속내를 주님께 아뢨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주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자신은 “보기 원한다”라고 대답한다. 다윗의 아들 예수만이 자기 눈을 뜨게 해줄 유일한 분이라는 믿음을 표현한 것이다.
 
주님은 바디매오를 향해 이전의 치유 공식과 달리 단호하게 “가라”는 말씀으로 치유하신다. “보기를 원하나이다”라는 그의 고백에서 믿음을 보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선언하신다. 그러자 즉시 그가 보게 되었다. 그리고 주님이 가시는 길을 따른다. 이 장면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과 가난한 소경 거지가 그 나라에 들어간 것을 선명하게 대조해 준다. 또한 주님을 따르지만, 그 길을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 기회를 잡은 것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제자들과 비교된다.
 
제자들은 세상에서 받을 영광에 눈이 멀었으나 가장 낮고 비참한 자리에서 가장 높으신 주님의 섬김을 받은 바디매오는 눈이 떠졌다. 즉시로 바디매오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다. 여리고 길가의 비참한 구걸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길을 함께 걸어가기 위해 주님을 따른다. 참된 제자는 스승이 되신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참된 믿음을 가지고 뒤따르는 존재이다.
 
 
 
나는?
-여리고에서 수많은 사람이 주님을 알아보았으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붙잡은 사람은 맹인이자 구걸하던 바디매오뿐이었다. 제자들은 주님의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는 질문에 세상의 영광을 구했으나 바디매오는 메시아만 하실 수 있는 “눈 뜸”을 구하였다. 여리고 사람들은 영적으로 맹인이었으나, 바디매오는 영적으로는 이미 밝은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주님은 수많은 무리에 둘러싸여 여리고를 빠져나가기 직전 바디매오의 간절한 외침에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상대해 주신다. 그의 믿음대로 더 이상 암흑의 세월을 끝내고 광명의 삶을 살게 해주셨다. 그를 치유해 주심으로 자신이 다윗의 자손으로 온 메시아임을 확인해 주셨고, 그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불러 주셨다.
 
-바디매오는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맹인이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 위에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바디매오는 “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간 누리지 못한 삶을 사는 대신에, 새로운 삶의 이유와 능력을 주신 분을 따르기로 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그의 유일한 재산이며 동전을 받는 생계 수단인 겉옷마저 내팽개치고 달려 나왔다. 주님의 부르심에 이런 날 선 반응의 순종을 본 지 얼마인가?
 
 
-바디매오는 주님의 이름을 간절하게 부르짖었다(46~48절). 주위의 야단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주님 외에 소망이 없기에 더욱 간절하게 끈질기게 부르짖었다.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에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렇게 소리 지르는 것뿐이었다. 그는 주님을 메시아로, 자신을 치료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으로 믿었기에 사람들의 꾸중과 반대를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도 반대와 방해를 꿋꿋하게 이겨내며 믿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삶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주님은 바디매오의 부르짖는 소리를 수많은 사람의 아우성 속에서 정확히 들으셨다. 이처럼 부르짖는 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고통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 공동체는 주위에서 외모나 신분 때문에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거나 제지하지 않기를 경계해야 하겠다.
 
-한편 주님은 간구와 부르짖음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서도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르짖는 바디매오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러 가신다는 것 때문에 간절히 부르짖는 한 사람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신다. 힘들고 고달픈 인생의 탄식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며 시선을 돌리신 주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리라.
 
-주님을 따르는 길을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 바디매오는 주님이 부르신다는 소리를 듣고서 겉옷을 내버리고 나왔을 뿐 아니라 눈을 뜨자마자 주님을 따른다. 그는 단지 신체적인 구원뿐 아니라 영적인 구원까지 함께 받은 것이다. 많은 재물 때문에 주님을 떠난 부자와 대조적이기만 하다. 내가 주님께 신속하게 나아가기 위해 내버려야 할 것이 무엇일까?
 
-길가에서 뛰어 일어나 길을 따르다.
 
 
 
*주님, 바디매오의 간절하고, 분명한 믿음의 행동과 결단이 선명합니다. 제가 가야 할 길임을 압니다.
*주님, 주님처럼 잘 듣고 외면하지 않는 목양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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