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예루살렘 입성 [막 11:1-11]
 – 2024년 03월 13일
– 2024년 03월 13일 –
주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며 스가랴서에 예언된 새로운 왕 메시아로 공식적으로 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는다. 비록 주님이 메시아로 선언하지 않았지만, 나귀 새끼를 준비시키고 그 위에 앉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은 스가랴 9:9의 의도적인 성취로 보인다. 그는 진정한 다윗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구할 왕으로 오셨다.
    
    
    
1. 예루살렘 입성을 위한 준비(1~6절)
주님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서쪽으로 들어가고 계셨다. 베다니는 감람산 동쪽에 있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남매가 사는 동네였다(요 11:1; 눅 10:38). 마가는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주님은 그들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매일 아침 들어가신 것으로 보인다. 주님께서 두 제자를 보내 나귀 새끼를 데려온 것은 고대의 징발 형태로 볼 수 있다. 당시 왕이나 정부의 관리들이 급히 사용한 짐승이나 사람을 징발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두 제자가 어린 나귀를 데려온 과정은 주님께서 일러준 그대로 되었다. 주님께서 왕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모든 준비가 되었다(4~6절). 주님께서 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계신다.
    
이 모든 상황은 주님이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공의롭고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는 바로 그 왕임을 보이시기 위함이었다(슥 9:9).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의 다소 이해가 되지 않을 명령임에도 순종한다. 나귀의 주인도 주님의 요청을 전하자 기꺼이 나귀를 내어 준다. 마가는 두 제자와 나귀 주인의 순종과 헌신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순종과 헌신으로 전진한다.
    
    
    
2. 예루살렘 입성(7~11절)
두 제자가 묶인 나귀를 풀어 주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온다. 두 제자는 아무도 타지 않았던 나귀 새끼였기에 자신들의 겉옷을 급히 안장 대신 놓았다. 주님이 나귀에 오르셨다.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사람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는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주님을 둘러싸며 함께 예루살렘으로 입성한다. 그리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9~10절)”라고 외쳤다.
    
세상 제국의 왕들에 비하면 초라하고 볼품없는 입성이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그 나라가 겸손과 평화로 임하는 나라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세상 나라가 권력과 돈의 힘으로 영광을 구하는 나라라면 주님의 나라는 자신을 낮추고 섬기고 희생함으로 세워가는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며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삶은 주님을 따라 겸손과 평화의 길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자 사람들은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며 소리를 지른다. 오랜 세월 압제와 가난 속에 힘겨워하던 이들은 가득한 구원의 열망을 담아 호산나를 외쳤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예수께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요청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은 이스라엘만의 회복이 아니라, 온 세상을 죄로부터 건지는 구원이다. 만물이 새롭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되찾으시는 구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귀를 타고 임하는 나라이다. 보이는 영광으로 그 나라를 취하고자 하는 유혹이 강렬할지라도 하나님 나라 백성은 어린 나귀를 타신 주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군마로 무장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자기 부인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겸손과 평화의 입성 이후 주님은 맨 먼저 성전을 “둘러보신다(11절).” 사자를 먼저 보낸 후 홀연히 성전에 임재하여 하나님 나라를 배척한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말 3:1~2)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신 것이다. 강렬한 입성 이후 성전을 둘러보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오늘날 주의 성전이 된 나와 가정, 교회 공동체를 둘러보시는 주님의 모습이 연상된다. 과연 주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어떤 반응을 하실까?
    
    
    
나는?
-주님은 겸손과 평화의 왕이시다. 베다니에 도착한 주님이 두 제자를 맞은편 마을로 보내어 아무도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신다. 이는 주님께서 메시아로서 왕적인 신분을 드러내시고 스가랴 9:9(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아무도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를 가져오라는 주님의 명령에 두 제자는 군말 없이 순종한다. “주가 쓰시겠다”라는 말에 사람들은 제자들이 나귀를 가져가도록 허락한다. 제자는 누구일까? 주님께서 내 삶에 들어오셔서 “주가 쓰시겠다”라고 요구하실 때 무엇이든 주께서 쓰시도록 내어드리는 사람이 제자이다. 나를 주님이 쓰시기에 가장 편리한 도구 되도록 내어드리는 사람이다.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이며 축복이다. 나귀의 주인은 “주가 쓰시겠다”라는 제자들의 대답에 기꺼이 나귀를 내어놓는다(5~6절). 그 나귀는 가장 존귀한 분을 태우고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구원 역사의 시작을 이루는 데 쓰임 받는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것임을 고백하며 언제라도 주님이 쓰시도록 내어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허다한 무리들은 주님께 충성을 다짐하는 의미(왕하 9:13)에서 자기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환호한다. 그런데 그 충성이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으로는 이어지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런 충성 맹세는 일시적이고 세속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목이 터지라 환호하고 찬송해도 주님의 참된 의도를 모른다면 그 시간은 공허로 채워질 뿐이다. 호산나 구원의 찬양이 세대를 이어 끊어지지 않는 메아리가 되게 하려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그분이 가신 길을 깨달아야 한다. 나의 입술의 찬양이 공허하게 울리는 찬양이 되지 않도록 말씀으로 늘 내 마음을 채워야 하리라.
    
-주님은 성전의 주인이시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가장 먼저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의 모든 것을 낱낱이 살펴보신다(11절). 그러나 날이 이미 저문 것처럼 성전 역시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가장 거룩하고, 정직해야 할 성전이 타락의 온상이 되어 버렸다. 주님은 오늘도 성전인 내 마음과 삶, 그리고 우리 공동체를 면밀하게 살피실 것이다. 어떻게 바라보실까?
    
    
    
*주님,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따라 겸손과 화평을 일구며 살겠습니다.
*주님, 둘러보시는 주님의 시선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살겠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스데반의 설교_모세 이야기 [행 7:17-36]

스데반은 출애굽의 이야기 가운데 중요한 대목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모세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는 모세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바로 공주의 아들로 입양된 이야기로 시작하고, 청년 시절 애굽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2차 투옥과 하나님의 적극 개입 [행 5:12-26]

산헤드린 공회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고 하나님은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지속적으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신다. 이에 시기로 가득한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다시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