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을 심판하시다 [막 11:12-26]
 – 2024년 03월 14일
– 2024년 03월 14일 –
예루살렘에서의 둘째 날이 밝았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건과 성전을 청소하신 것을 다룬다. 또한 주님은 믿음과 용서에 대한 가르침도 덧붙이셨다. 두 번째 날 주님과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시장하셨던 주님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다가가 열매를 찾으신다. 하지만 열매가 없자 나무에 저주를 선포하신다. 그 후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매매상과 환전상들의 좌판을 엎으시고 쫓아내신다. 날이 저물자 다시 성을 나오시고 그다음 날이 되어 제자들이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확인한다.   
    
    
    
1.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12~14절)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더불어 구약의 예언서에서 자주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쓰인다(렘 8:13; 호 9:10; 욜 1:7; 미 7:1). 대부분은 영적으로 열매 맺지 못하는 상태의 이스라엘이 받을 심판에 대한 예시로 사용된다(렘 8:13).
    
주님과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 도중에 시장기를 느낀 주님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발견하고서 다가갔지만, 열매를 찾기 어려웠다. 당연했다.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13절). 그런데 주님은 열매를 찾지 못한 그 무화과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열매를 따 먹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를 선포하신다(14절). 이 모습을 제자들이 지켜보았다.
    
무화과나무는 몇 차례 열매를 맺는다. 건기가 시작되는 4월에 맺는 첫 번째 열매를 “파게”라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열매인 파게는 맛도, 볼품도 없어서 가축 사료로 쓰이거나 가난한 자들, 혹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온 여행자들이 허기를 달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파게’ 이후 4~5차례 열매가 맺힌 후 8~9월에 맺히는 열매를 “테헤나”라고 하는데, 이때가 가장 맛이 좋다. 본문은 유월절(3월 말에서 4월 초) 기간에 있었던 사건이다. 이때는 파게가 맺힐 시기이다. 그런데 잎이 무성한데 “파게”가 없었다. 주님은 파게를 찾으신 듯하다. 하지만 잎이 무성한 그 무화과나무는 파게가 없었다. 그래서 저주하신 것이다.
    
이를 통해 주님은 신학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셨다. 13절의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의 “때”로 번역된 단어는 “카이로스”이다. 흔히 이해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했으니 이를 조합하면 “지금은 이스라엘의 때가 아니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이어지는 성전 청결 사건과 연결하면 “무화과의 때가 아니다”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성전 때는 지났다”라는 뜻으로 타락한 성전에 대한 심판을 가리킨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성전 청결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이다. 무화과나무 저주 선언과 뿌리째 마른 결과가 성전 청결 사건을 앞뒤로 감싸고 있다. 이는 이 두 사건이 서로서로 해석해 준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은 성전 청결 사건을 가리키는 선언이 되고 성전 청결 사건은 뿌리째 마른 무화과나무를 통해 기능이 다한 성전을 설명해 주고 있다.
    
    
    
2. 성전을 심판하시다(15~19절).
주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는 자들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셨다(15절). 또,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않으신다(16절). 이러한 행동은 성전 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행위였다. 이 모든 매매 행위와 환전 행위는 당국의 허가를 받아 이루어진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은 누구였을까?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당연히 제물이 필요하다.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하고 이를 판단하는 자는 제사장이었다. 만약 흠이 있다면 제물로 드릴 수 없었다. 이에 제사장들은 제물을 드리는 백성의 편의를 위해 성전에서 인정하는, 성전에서 직접 기른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팔았다. 물론 직접 가져오는 것보다 훨씬 비쌌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기에 비싸더라도 구매했다. 또, 돈을 바꾸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의무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반 세겔의 성전세를 로마제국의 화폐(드라크마)에서 세겔로 바꾸어 내야 했다. 로마제국의 동전에는 황제의 우상이 새겨져 있었기에 그 동전을 그대로 바치면 우상숭배가 되는 셈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환전할 때 당연히 일정한 수수료를 받고 환전을 한 것이다. 종교 당국은 이 모든 것을 허가해 주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주님은 돈벌이 장소(강도의 소굴)로 전락한 성전을 심판하신 것이다. 타락한 성전 시대가 이제 끝이 났음을 선언하신 것이다. 16절에서 “물건(스큐오스)”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70인 역에서 삼분의 일 이상이 성전 기물, 즉 제의에 사용되는 그릇들(제기)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이 그릇들을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하신 것은 성전 제사를 폐지한다는 의미이다. 주님은 타락한 이스라엘의 시대가 끝이 났음을 보여주기 위해 상징적인 행동을 하신 것이다. 주님은 나중에 웅장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성전 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13:2)”라며 성전의 완전한 멸망을 예언하신다.
    
주님은 예레미야 7장 11절을 인용하며 종교 지도자들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사 56:7)’이 되어야 할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비판하신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들어와서 하나님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즉, 자신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가증한 일들을 행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은 그들이 당신의 집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보는 것이 아니냐고 물으신 것이다. 이 말씀을 배경으로 주님은 성전의 본래 역할인 “만민이 기도하는 집”과 확연히 대조되는 ‘강도의 소굴’이란 표현으로 종교 지도자들의 성전을 이용한 타락을 비판하셨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의 행동과 선언을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모의한다. 8:31에서 주님께서 직접 밝히신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번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는데 이제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갈릴리 논쟁 이후 바리새인들과 헤롯당도 예수를 어떻게 죽일 것인지 의논한 바 있기에(3:6) 모든 유대의 종교 지도자 그룹에서 주님을 죽이려고 작정한 것이다.
    
    
    
3. 뿌리째 마른 무화과나무, 성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믿어라(20~26절).
주님과 제자들이 전날에 본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까지 마른 것을 보았다(20절). 이는 타락한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게 이루어질 것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당부하신다. 성전이 타락한 상황일수록 하나님만 믿으라고 하신다(22절). 그리고 하나님만 믿는 새로운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이어야 하는지 간략하게 설명해 주신다.
    
    
먼저 믿음의 공동체여야 한다. 이 믿음을 “산을 움직이는 믿음(23절)”으로 표현하셨다. 구약에 따르면(욥 9:5~6; 시 68:8 등) 산을 움직이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믿음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불러일으킨다. 공생애 기간 중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 또 여리고의 맹인 거지 바디매오에게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34; 10:52)”라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이적을 낳은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산을 옮기는 믿음(고전 13:2)”이라고 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산에 들려서 바다에 빠지라”라는 말로 표현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을 가리킨다. 특히 “이 산”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특정한 산을 가리키시는 것이다. 예루살렘에는 대표적으로 감람산과 성전이 서 있는 성전산이 대표적인 두 산이다. 23절의 맥락은 성전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성전에 대한 주님의 상징적인 심판 행위를 나타낸다. 즉, 강도의 소굴로 변한 성전에 대한 심판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다시 언급하시는 것이다. 마가복음에서는 “바다”가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데, 거라사의 군대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빠져나올 때 돼지들에게 들어갔고 바다에 빠져 몰사했다(5:13). 주님은 그렇게 거라사 지방을 사로잡고 있었던 더러운 귀신을 심판하셨고 그 땅은 정화되었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 본다면 산이 들려서 바다에 빠지는 일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심판임과 동시에 구원의 사역이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을 믿으라고 하신 것이다. 타락한 성전은 반드시 심판당한다. 그리고 새로운 구원을 펼치신다.
    
    
그리고, 기도의 공동체여야 한다(24절). 기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이다. 주님께서는 타락한 성전을 비판하시면서 원래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막 14:17; 사 56:7)”이라고 말씀하셨다. 새로운 공동체는 성전의 원래 모습을 회복할 것이다. 그것은 “믿음과 기도”이다.
“그러므로(24절)”로 시작한다는 것은 23절에서 언급된 산을 옮기는 믿음이 기도로 표현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믿기에 기도하는 것이다. “받은 줄로 믿으라.”라고 할 때 “받다(엘라베테)”라는 현재완료형이다. 그리고 직설법 단순 과거이다. 이미 받았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라는 말씀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구체적인 신뢰 행위이다.
    
    
마지막으로, 용서하는 공동체이어야 한다(25절). 개역 개정이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으로 번역한 부문은 “만약 누군가에 대해 적대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면”이라고 직역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과 다툰 일이 있으면”으로 의역할 수 있다. 마가는 “용서”에 대한 주제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기도와 함께 언급되고 있다. 왜 그럴까?
    
죄 사함(용서)은 성전 제의를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타락한 성전 제의는 더 이상 죄 사함의 효과를 낼 수 없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기도의 공동체가 서로 용서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게 된다. 타락한 성전이 죄 사함의 기능을 온전하게 살릴 수 없으니 믿음과 기도의 공동체가 성전을 대체하여 죄 사함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된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듯이 “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는 더 이상 성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이다(2:10).
    
    
무화과나무와 성전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가르친 주님은 어떻게 그 심판을 피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지만(마치 산을 바다에 던지는 것같이)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가능하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성전을 하나님이 잘 들어주시는 기도의 장소로 생각했지만, 주님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믿음의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은 들으신다. 기도는 어디서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기도하느냐가 중요하다. 그것은 이루어질 줄 믿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또한 장소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것이다. 그 상태에서 드리는 기도는 믿음의 기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믿음을 통해 드러나려면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잘못한 것을 먼저 용서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워야 한다.
    
이처럼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는 주님의 가르침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나는?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12~14절)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도 열매를 기대하고 계심을 느낀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저주를 통해 하나님께 불순종한 백성들의 삶을 책망하신다. 겉으로는 잎사귀가 무성하여 열매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껍데기뿐인 종교인들의 삶을 책망하신다. 나에게도 주님이 기대하시는 열매는 맺지 못하고 껍데기 신앙을 더욱 화려하게 치장하기에 여념이 없는지 깊이 돌아볼 일이다.
    
-주님께서는 원하시는 때 원하시는 열매를 요구하신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와 그 실현은 그리스도의 때가 되었는데도 자기 때만 주장하다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지적하신 것이다. 아울러 그들에게 임할 파멸을 선포하신 것이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이스라엘은 외적인 제의 활동만 활발한 성전의 모습만 있을 뿐이었다. 나와 우리 공동체는 어떨까?   
    
    
-타락한 성전의 모습에 분노하신다. 주님은 이방인의 뜰에서 유월절 제물을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내시고, 성전 세금을 낼 수 있도록 돈을 바꿔주는 자들의 상을 뒤엎으신다. 이들은 성전 제사장들과 결탁하여 제물로 사용될 짐승을 비싼 가격에 팔고 엄청난 환전 차액을 챙겼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나와 기도할 수 있는 은혜의 공간이 속임과 탐욕이 가득한 강도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성전이라고 불리는 우리 자신(고전 3:16)은 어떤가? 우리 공동체 안에서 돌아보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혹시 이 시대의 편리성과 효율성, 그리고 경제성, 합리성을 빌미로 사적인 탐욕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는가?
    
-기도와 예배보다는 장사에만 몰두하는 자들의 소굴이 된 성전의 멸망 선포는 어쩌면 당연하였다. 성전과 제사를 완성하실 메시아는 영접하지 않고 그림자인 성전 행위에만 몰두하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었다. 그 진정성도 인정받을 수 없다. 혹 하나님을 위한다는 공동체의 사역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것임을 외적으로 드러나고 있는가? 인간들만 좋은 모습으로 그저 편안할 뿐인가?
    
    
-모든 종교 지도자가 주님을 죽이기로 했다.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주님의 행위는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주님을 죽이려고 궁리하면서도 사람들이 두려워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는(18절) 그들의 모습은 그들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지금 내가 누리고 지닌 지위나 권세로 하나님을 따르는가? 사람을 의식하는가? 나는 지금 공동체를 위한 어떤 일이든 하나님을 의식하는가? 성도들을 의식하는가?
    
    
-믿음과 기도와 용서는 주님을 통해 구원받고 회복된 공동체의 중요한 특징이다. 새로운 성전 되신 주님을 통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서로 용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성전을 대체할 성전은 믿음의 공동체(교회)이다. 이제 동물의 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사죄의 은총을 받는 새 성전 공동체에서는 형제를 용서하는 사랑이 사죄에 합당한 반응임을 강조하신다.
    
-나도 거저 용서받았으니 거저 형제를 용서하라 하신다.
    
    
    
*주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향한 저주는 껍데기만 남은 성전을 향한 저주였음을 다시 확인합니다. 나의 삶이 열매 없고 껍데기뿐인 저주받을 삶이 되지 않도록 믿음과 기도와 용서의 걸음을 쉬지 않겠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스데반의 설교_모세 이야기 [행 7:17-36]

스데반은 출애굽의 이야기 가운데 중요한 대목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모세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는 모세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바로 공주의 아들로 입양된 이야기로 시작하고, 청년 시절 애굽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2차 투옥과 하나님의 적극 개입 [행 5:12-26]

산헤드린 공회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고 하나님은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지속적으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신다. 이에 시기로 가득한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다시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