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나를 위한 위선과 외식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전부를 드리는 마음으로 [막 12:35-44]
 – 2024년 03월 18일
– 2024년 03월 18일 –
막 12:35-44 나를 위한 위선과 외식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전부를 드리는 마음으로
 
서기관과의 대화 이후 주님은 무리를 향해 가르침을 주신다. 하지만 그 가르침이 서기관들 전체를 향한 날선 대립각을 세운다. 주님은 하나님이 약속한 메시아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기대하는 ‘다윗의 자손’을 뛰어넘는 인물이 될 것을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한편 메시아에 대해 잘못 가르치고 있던 서기관들의 행동에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므로 도덕적인 문제가 있음을 경고하신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영성은 자기가 가진 모두를 하나님께 드리는 가난한 과부가 보여주었음을 가르치셨다. 
 
 
 
1.주님의 자문자답(35~37절)
주님이 서기관과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무리 앞에서 “어찌하여 서기관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이 질문은 주님이 어떤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드러낸다. 서기관들이 전통적으로 해석하고 있었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로 오시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메시아로 오셨는가”를 그들이 잘못 가르치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서기관들의 해석은 하나님이 메시아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완전한 계획을 모르고 있음을 드러낸다. 
 
주님은 시편 110:1을 인용하며 서기관들의 해석이 불완전함을 드러낸다. 만약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면 성령의 감동을 받은 다윗이 어떻게 메시아를 “내 주”라고 불렀는지를 반문하신다. 조상이 자기 자손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신 것이 맞지만, 하나님의 메시아, 주님(퀴리오스)으로 오셨다는 사실이다.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환호하였던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으나 이는 다윗의 군사적인 통치를 이어받는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기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의 주민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기쁘게 받아들였으나, 곧이어 예수를 못 박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되고 만다(막 15:13). 세상이 기대하는 하나님 나라가 있는 반면, 하나님의 방식은 섬김과 희생을 통한 다스림이다. 주님의 가르침이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를 가늠할 수 없으나 그들의 반응을 가히 폭발적이었다. 
 
 
 
2.서기관들에 대한 경고(38~40절)
주님이 서기관들에 대해 경고하신다. 그들은 긴 예복을 입고 자기들의 권위를 세우기를 즐기는 자들이다. 주님이 권위는 그의 가르침과 연결되어 있으나(1:22; 11:27), 그들은 외적인 예복을 통해 자기들의 권위를 얻으려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명예와 권력욕은 그들이 잘못 이해하는 메시아에 대한 시각과 관련이 있다. 
 
율법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그들이 세속의 가치관과 다를 바 없는 전제를 가지고 율법을 해석하기에 그들이 이해하는 메시아가 와서 세울 하나님 나라를 세속적인 정치체계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원하고 추구했던 것은 제자들이 원했던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9:35; 10:31, 43~44). 또한 서기관들이 추구했던 특권과 명예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잔인한 태도를 드러낸다. 자기들의 높은 지위를 이용해 과부들을 등쳤다. 그들은 쉐마와 이웃 사랑의 이중 사랑의 계명을 알고 있었지만 지키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이미 쓰러져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는커녕 짓밟았던 것이다. 
 
주님은 또 서기관들의 긴 기도를 정죄하셨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지만, 주님이 비판하는 것은 긴 기도를 통해 사람들에게 존경받기 원했던 그들의 동기였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임에도 그들은 사람을 향해 하며 사람의 인정을 받기 원한 것이다. 이것이 “남에게 보이려고”하는 기도이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치는 책임을 맡은 중요한 직분이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한 권력과 명예, 재물은 하나님 나라 가치에 맞지 않는 것들이었다. 주님은 그들이 더 엄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3.과부의 헌금(41~44절)
서기관들의 가식적인 영성에 대해 경고하신 후 주님이 원하시는 영성이 무엇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가르침이 이어진다. 주님께서 성전의 헌금함 맞은편에 앉아 무리가 헌금하는 것을 보셨다. 주님은 부자들이 헌금을 많이 하는 것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으신다. 당시 헌금함은 쇠로된 입구 부분으로 인해 헌금할 때 동전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부자가 헌금할 때는 제법 큰소리가 났다(마 6:2). 사람들에게 과시하려고 많은 동전으로 헌금함에 부어 넣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가 동전을 넣을 때는 작은 소리밖에 나지 않았을 것이다. 주님이 주목하신 것은 이 작은 헌금이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진실로(아멘)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말씀을 시작하셨다. 주님은 중요한 가르침을 시작하실 때 이 표현을 사용하셨다(마가복음에만 13회 사용되었다). 주님은 과부의 작은 헌금이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더 많이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과부는 자기의 모든 것을 드렸기 때문이었다. 직전 본문과 연결하여 해석하면 과부의 이 행동은 “자기의 전부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 예”가 된다. 
 
 
 
나는?
-주님은 성전에서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일 뿐 아니라 다윗의 주이심을 가르치신다(35~37절). 서기관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후손으로 가르쳤지만, 주님은 시편 110편을 인용하여 다윗이 성령 충만하여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른 것을 일깨우며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 이상의 존재임을 말씀하신다. 서기관들의 부분적이고 편협한 가르침은 그리스도를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하게 만드는 기초가 되었다. 
 
-마찬가지이다. 주님에 대한 그릇되고 편협한 지식이 죄인으로서 구원받아야 할 삶의 목표와 방향을 망각하고, 기껏해야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한 도우미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에서 “뜻(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함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주님을 바르고 정확하게 알기 위해 더욱 힘쓰고 애써야 하리라.
 
 
-보이기 위해서 그리고 높아지기 위한 경건은 참 경건이 아니다(38~40절). 당시 율법교사인 서기관들은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특별한 옷을 입어서 사람들이 그들을 쉽게 알아보고 존경하도록 했다. 또한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아 자신의 특별한 지위를 뽐내었고, 잔치 때에는 주인과 가장 가까운 명예로운 자리를 원했다. 
 
-당시 과부들은 자신의 재산을 서기관들에게 맡겨 관리해야 했는데, 서기관들은 많은 과부들의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길게 기도하면서 자신의 경건을 선전하였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경건한 척 했지만 실상은 권력과 부를 더 사랑한 세속적인 사람들이었다. 
 
-경건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경건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지 말고 경건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많은 지식과 높은 지위가 더 넘어지기 쉬운 조건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 나라는 여러 부자의 헌금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가난하지만 자신의 전부를 온전히 드리는 자들을 통해 이뤄진다. 주님은 스스로 주목받기를 원한 서기관이나 많은 헌금을 낸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한 과부를 주목하셨다. 그리고 부자가 낸 많은 돈보다 이 과부가 낸 두 렙돈을 더 많은 헌물로 인정해주신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늘 “많은” 헌금보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실제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부에게는 자신의 소유 전부와도 같았던 “두 렙돈”이었다. 눈에 보이는 액수가 아니라 드리는 자의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가 썩어질 인간의 소유와 소유욕을 숭배하지 않고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헌신으로 새롭게 세워지기를 기도하리라. 헌금은 돈이 아니라 나를 드리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미 알고 있던 지식에 참 지식이 없고, 지금껏 존경하던 신앙인이 단지 종교인이었으며, 으레 지나쳐온 소자가 성자임을 깨달았을 때 허탈함과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든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길만 걷고, 모두가 주목하는 사람만 바라보다가 주님의 가르침을 놓치기 쉽다. 신앙인으로 출발했다 종교인이 되기 십상이다. 주님은 본문의 가르침을 통해 끝까지 신앙인으로 살아내기를 원하신다. 
 
*늘 주님의 주님되심을 잃지 않고 살아내기 위해 익숙하게 알고 있는 지식에 안주하거나 맹신하지 말고 성령께서 성경을 온전히 깨우쳐 주시는 은혜안에 거해야 한다. 말씀을 읽고, 깊이 생각하며, 말씀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이제껏 익숙하게 여겨왔던 말씀을 깨뜨려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받아들여야 한다. 주님을 익히 안다고 자부하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헛발질하고 있을지 모른다. 
 
*서기관의 위선을 바로 보아야 한다. 오늘날 종교인을 바로 보아야 하는 것과 통한다.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지식만큼이나 그들의 행위도 정상이 아니었다. 주님은 오죽하면 서기관들을 대놓고 “삼가라”고 하셨다. 존경과 따름의 대상이 아니라 경계와 주의의 대상으로 삼으라고 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특별한 종교적 위상을 늘 뽐내었다. 하지만 주님의 눈에는 종교성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한 거짓 위선에 불과했다. 심지어 과부의 가산도 삼킨 그들이다. 그들은 후에 주님의 생명도 삼킨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마땅한 본을 보여야 할 그들은 본은 커녕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고 약자들을 갈취하였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그들을 기다릴 뿐이었다. 오늘날 주님이 경계하신 서기관과 다를 바 없는 위선과 외식으로 회칠한 종요인 목사들이 꽤 많다. 높은 자리를 차지할수록 잠재되어 있던 교만이 고개를 든다. 내가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를 진리의 ㅣ말씀 거울 앞에 나를 더욱 노출 시키리라. 
 
*주님의 시선이 한 여인에게 향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거액의 헌금을 투척하는 부자들 사이로 몸을 수그리고 조심스럽게 두 렙돈을 드리는 여인에게 말이다.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 모아 따로 가르칠 정도로 여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셨다. 두 렙돈은 하루 품삯의 64분의 1밖에 안 되는 지극히 적은 돈이다. 하지만 주님은 오늘 하루를 굶더라도 헌신을 마다치 않은 가난한 과부의 희생에서 그 마음을 읽으셨다. 
 
*종교지도자들에게서 발견하지 못한 순수한 희생에 눈을 떼지 못하셨다. 머지않아 예수님도 친히 온전한 희생의 완성을 보여주실 것이다. 마음이 담긴 헌금이 주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주님 주변에 서성이면서도 주님이 누군지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주님을 제대로 알 때 마음, 소유, 삶을 드리며 주님과 동행할 수 있다. 주님을 끝까지 바라보면서 믿음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주님, 나를 위한 외식과 위선으로 포장한 종교인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전부를 드린 과부의 마음을 따라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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