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음모와 배신 사이, 한 여인의 순전한 사랑 [막 14:1-11]
 – 2024년 03월 22일
– 2024년 03월 22일 –

제자들이 종말에 취해야 할 태도를 가르치신 주님의 가르침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고난 이야기를 시작한다. 유월절과 무교절을 배경으로 한 여인이 주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붓는 이야기가 주님을 잡아 죽일 음모의 이야기들 사이에 펼쳐진다. 이 여인의 행동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주님을 죽이려는 자들의 행동과 선명하게 대조가 된다.  


이틀 후면 운명의 날이다. 종교지도자들은 주님을 죽일 흉계를 도모하나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명절 이후로 미룬다. 그러나 뜻밖의 호재가 생기는데,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자발적으로 주님을 넘기겠다고 찾아온 것이다. 한편 이 추악한 이야기들 사이에 값이 비싼 순전한 나드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아낌없이 부은 여인의 행동에 대해 주님이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주신다. 그녀는 다가올 “그 날”을 준비하며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을 한 것이다. 




1.예수를 죽일 음모(1~2절)

‘이틀이 지나면’ 유대 최대 명절 유월절이다. 이어서 한 주간을 무교절로 지킨다. 유대력으로 보면 니산월 13일째이다. 보통 유월절은 니산월(4~5월) 14일에 유월절 어린 양을 잡고, 그날 저녁(15일 시작) 유월절 만찬을 먹는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을 잡고자 했으나 민심의 동요를 우려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최대 명절에 섣불리 주님을 잡을 수 없었고, 주님을 따르는 큰 무리가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세 차례에 걸친 논쟁에서 상당한 권위의 타격을 받은 그들의 자존심이 하루라도 빨리 주님 잡아 죽이고 싶었지만, 상황을 녹록치 않았다. 


명절이기에 주님을 죽이는 데 민심의 힘을 얻어 로마를 압박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때이지만, 반대일수도 있었다. 자칫 민심의 소요가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로마로부터 엄청난 압박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특히 유월절과 무교절로 이어지는 기간에 원래 가이사랴에 있었던 로마 군대의 지휘 본부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순례자들을 통제할 정도로 백성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에 민감했다. 요세푸스도 유대인의 명절 기간 동안 일어났던 여러 소동들에 대해 기록으로 남겨 놓을 정도로 명절 기간은 매우 민감한 시간들이었다. 




2.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3~9절)

꽤나 음흉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에서 갑자기 베다니 시몬의 집으로 장면이 전환된다. 유월절 이틀 전 주님은 이 집에 계셨다. 마가는 시몬을 베다니 나병환자로 소개한다. 과거 주님으로부터 치유받아 온전하여진 그의 집에서 주님은 대명절을 앞두고 식탁 교제를 하고 계셨다. 주님 일행의 식사 시간이 무르익어 갈 무렵 돌발 사건이 발생한다. 마가는 누구인지 밝히지 않지만, 요한은 마르다의 자매 마리아라고 밝힌다. 이 여인이 가져온 “옥합(알라바스트론_문자적으로 손잡이가 없다는 의미)”은 굉장히 비싼 향유가 담긴 통이었다. 그 안에 담긴 “나드”는 인도에서 자라는 식물에서 추출한 당시 가장 고급스러운 향유였다. 마가는 그것을 “순전한(피스티코스_순수한) 나드”라고 소개한다. 이것을 “깨뜨려” 주님의 머리 위에 부었다(3절). 


당시 식사 관습으로 볼 때, 남자들만 참여하는 시간과 공간에 여인이 끼어든다는 것은 매우 파괴적인 행동이었고, 무례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그녀가 가겨온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은 것이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표출되었다. 마가는 그녀의 행동이 어떤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다고 서술한다(4절). 마태는 이들을 제자들(마 26:8)이라고 했고, 요한은 유다라고 기록했다. 흥미로운 것은 마가가 사람들이 분노했다(아나나크룬테스) 라고 사용한 단어는 야고보와 요한의 행동에 화가 난 제자들의 반응(막 10:41)을 묘사할 때 쓴 단어이다. “허비하는가?(아폴레이아)”라고 번역된 단어도 직역하면 “파괴하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아주 좋은 것을 파괴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 정도로 ‘어떤 사람들’은 안타까워했다는 것이다(4절). 


그렇다면 왜 이렇게 안타까워했을까? 마가는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라는 격앙된 어조 속에 담긴 거의 일 년 치 노동자 임금이 한순간에 날아갔기 때문이라고 서술한다. 이렇게 격앙한 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는 불평에서 유월절 같은 명절 동안 특별하게 더 구제가 필요했던 당시 상황을 엿보게도 한다. 겉으로 보면 매우 그럴싸한 논리로 불평한다. 주님을 제외하고 모두의 시선은 여인의 행동이 매우 못마땅했다. 이는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에 사용된 동사 “책망하다(에네브리몬토)”라고 번역된 단어는 말이 코를 힝힝거리는 것을 흉내 내어 만들어진 단어이다. 사람들의 책망이 상당히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뉘앙스를 떨쳐버릴 수 없는 표현이다(5절).


반면 주님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주님은 사람들의 반응을 만류하신다. “가만 두라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를 직역하면 “그녀를 가만 두어라. 왜 그녀에게 짐을 지우느냐?”이다. 그들의 책망은 여인에게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왜냐하면 여인은 주님에게 좋은 일을 했기 때문이다(6절). “좋은 일(칼론 에르곤)”은 “명예로운(아름다운) 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주님은 가난한 자들이 항상 그들 중에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고 설명하신다(7절). 하지만 주님은 그들과 “항상 함께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 여인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는 주님은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되며 이 여인의 행동은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8절). 

주님의 이러한 말씀은 다시 한 번 자신의 고난을 예언하는 것이었고, 세상에 오신 목적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주님의 말씀대로 여인은 “힘을 다하여” 주님의 죽음을 준비한 것이다. 


한편 여인의 행동은 1~2절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ㅡ이어지는 10~11절의 가룟 유다의 행동과 선명하게 대조가 된다.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가려는 자들의 행동과 비교할 때 이 여인의 행동을 “좋은 일, 기억될 일”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9절)”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실함에 근거한 행동은 기쁜 소식과 더불어 잊히지 않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3.유다의 배반, 죽일 길을 찾은 종교지도자들(10~11절)

하나님의 때를 준비한 여인의 행동의 제자도의 참된 모범으로 제시되었으나, 이와는 정반대의 행동을 한 제자의 이야기가 곧 이어진다. 가룟 유다는 주님을 죽이려고 호시탐탐 기회 노리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주님을 넘겨주기로 결심한다(10절).  왜 그랬을까? 마가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아마도 여인의 행동에 대한 주님의 반응을 보고서 주님께서 죽음의 길을 자처하고 있음을 확고하게 확인해서일까? 만약 그렇다면 유다 자신이 꿈꾸어 왔던 혁명을 통한 새 나라의 기대는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다는 스스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신속하게 결행했다. 어둠을 틈타 주저 없이 대제사장들에게 향했다.

대제사장들은 주님을 죽일 방도를 찾지 못해 모든 계획을 명절 이후로 미뤄놓고 있었다. 하지만 불현듯 찾아온 예수의 제자 가룟 유다의 협조(?)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11절). 그리고 돈을 주기로 약속한다. 마가는 이 부분을 마태의 가룟 유다가 먼저 요구했다든가(마 26:15), 요한처럼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든가(요 13:27), 누가처럼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였다든가(행 1:18) 라는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음모에 가담하며 주님이 넘겨짐을 당할 모든 준비가 갖추어져 간다. 




나는?

-악의 세력은 쉬지도 않는다. 자기들 끼리 모략을 꾸미고 돈도 주고받는다. 이들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등장하나 그들이 맡은 것은 악역이다. 결국 영원한 저주에 처해질 뿐이다. 바로 그런 자리에 주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가룟 유다가 있다는 것이 무척 가슴이 아프다. 


-종교지도자들은 ‘출애굽’의 은총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에 ‘새 출애굽’을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는 모의를 했다. 그들에게 걸림돌이라고는 주님을 향한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뿐이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었다면 여론도 문제가 되지 않을 터이지만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기득권 유지를 위한 정적 제거에만 있었다. 


-세상은 오늘도 악한 웃음 속에 저희들끼리 더러운 돈을 주고받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멸망의 길인 줄도 모르며 열심히 달려간다(1~2, 10~11절). 그 걸음에 동참하면 함께 멸망하는지도 모르며 불을 보며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악에 뛰어들지 않는가? 


-종교지도자들이 잠시 미뤄둔 배반의 결의를 되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주님의 제자 가룟 유다였다. 그는 제 발로 그들을 찾아가 그들의 귀를 기쁘게 하는 제안으로 악행을 부채질 한다. 개인의 가치와 철학이 먼저였고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였다. 자신의 이익, 명분, 주장에 눈이 멀어 세상에게 주님을 넘겨주는 이름뿐인 제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시 가장 귀한 향유, ‘나드’라도 아낌없이 깨뜨려 주님의 머리에 부어드린다(3~9절). 사랑에서 헌신이 나오는 것이 확실하다. 여인의 헌신을 받으신 주님은 여인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의미까지 부여하고 들려주시면서 그녀의 행동을 칭찬하셨다. 그저 주님의 은혜가 감사하고 주님을 사랑하기에 드린 것인데, 온 세상의 구주이신 주님의 죽음을 준비한 행동이 되었다. 


-이름 모를 여인은 극상품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리는 헌신으로 최고의 경배를 바쳤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허비”라고 했다. 하지만 주님은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그 헌신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 것이라며 여인도 의도하지 않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셨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여 그저 순수하게 드린 값진 것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그 헌신을 귀하게 사용하시는 주님의 일하심을 볼 때가 있다. 나도 주님을 사랑하여 아낌없이 부어드릴 내 삶의 향유가 무엇일까?


-기억할 것은 그렇게 주님을 향한 순수한 감사와 헌신에 대해 사람들은 차가운 마음으로 비판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헌신이다. 사람들은 더 합리적이고 대의적인 명분을 이야기 하며 비판하지만, 사실상 주님께 부어드린 향유가 아까웠기 때문임을 말씀은 증명한다. 마찬가지이다. 그저 내가 드린 주님을 향한 사랑의 헌신이 세상 기준으로 너무 아깝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여인과 같은 사랑의 헌신으로 형제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돌아보는 사랑을 순종할 수 있음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남의 헌신에 왈가왈부하기보다 나 자신부터 온전히 주님께 드리는 것이 어떨까?



*주님을 향한 사랑은 많은 계산이 필요치 않았다. 비록 일 년치 노동 품삯의 가치라도 주님에게는 아까운 것이 아니었다. 앞에서 사랑한다고 하면서 뒤돌아서 변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을….


*이름 모를 여인의 헌신은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시는 주님의 걸음을 응원하는 가치 있는 행동이었다. 주님이 걸어가신 대속의 길을 무수히 지새웠던 밤들 가운데 유독 빛나는 하늘의 별같은 이야기였다. 대대로 기억되어야 할 주님의 죽음을 예비한 가치 있는 반짝임이었다. 


*순전한 나드의 가치보다 더한 사랑의 무게를 담아 주님께 드렸다. 주님의 죽음을 정확히 바라보며 한 행동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주님의 죽음을 예비하고 주님께는 고난 받는 메시아로서의 기름부음이 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합리적인고 이상적인 계산을 하며 여인에게 낭비라고 질책했지만, 주님은 그녀의 행동을 인정해 주셨다. 


*사랑에는 계산이 없는 법이다. 주님께서 계산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끝까지 사랑받는 자가 얼마나 될까?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은혜는 받기를 원하면서 정작 주님께 드려야 할 헌신은 쉽게 포기하지는 않는가?




*주님, 주님을 사랑하는 법을 여인에게서 배웁니다. 계산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메시아로서 기름부음 받으신 그 길 때문에 내가 무한사랑의 구원 받았음을 믿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스데반의 설교_모세 이야기 [행 7:17-36]

스데반은 출애굽의 이야기 가운데 중요한 대목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모세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는 모세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바로 공주의 아들로 입양된 이야기로 시작하고, 청년 시절 애굽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2차 투옥과 하나님의 적극 개입 [행 5:12-26]

산헤드린 공회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고 하나님은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지속적으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신다. 이에 시기로 가득한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다시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