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주님의 길… 제자들의 길… [막 14:22-31]
 – 2024년 03월 24일
– 2024년 03월 24일 –
묵묵히 걸어가신 죽음의 길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다. 주님께서는 자기 죽음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알리시지만 제자들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그렇게 마지막 식사를 마치시고 제자들과 감람산으로 나간다. 그곳에서 주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다 버릴 것이라 하신다. 목자이신 주님이 돌아가실 때 제자들은 양들처럼 흩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 흩어짐은 다시 모이기 위한 흩어짐이다. 갈릴리에서…. 그리고 세계 모든 열방 가운데서 주님께로 모이기 위한 흩어짐이다.
    
    
1.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22~26절)
주님의 유월절 만찬은 본래 지켜야 할 유월절 만찬인 니산월 15일에 진행되지만, 하루 먼저인 14일에 진행되었다. 마가는 이미 12절에서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인 14일에 식사를 준비하고 진행했음을 알렸다. 본래 유월절 식사는 유대인 가장들이 포도주잔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림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자녀들이 이 밤이 다른 밤보다 왜 다른지 물으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을 설교한 것이다. 이때 누룩 없는 빵, 급히 잡은 양고기, 쓴 나물들의 의미들을 설명하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며 하나님의 간섭과 보호 속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주님께서는 유대인의 가장처럼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떡과 포도주를 통해 살과 피의 의미로 설명하신다. 주전 587년 이스라엘 성전은 무너졌다. 백성은 포로로 끌려갔고, 이방인들은 무참히 이스라엘을 짓밟았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언약의 하나님의 계명인 토라를 불순종한 결과다. 이 절망의 시기 구약의 선지자들은 새 시대의 도래, 성전의 회복, 계명의 회복 등을 전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인 기대, 즉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며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이스라엘의 회복이었다.
    
이런 관점으로 ‘떡을 떼시는’ 행위는 새 언약을 세우기 위해 찢길 자기 몸을 상징하며, ‘잔’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로 이해된다. 주님의 죽음이 구약에서 예언된 새로운 언약의 갱신을 위한 희생적 죽음임을 보이시는 것이다. 이 식사는 마치 주님께서 유대인의 가장처럼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가족 가장으로서 식탁에 놓인 ‘빵’과 ‘포도주’의 새로운 의미를,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인 제자들에게 설명하신 것이다. 이 식사가 출애굽보다 더 새롭고 더 큰 구출을 기념하는 것임을 선언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주님은 빵을 자기 몸과 일치하시며 떼어(또는 쪼개시는, 찢으시는) 제자들에게 주신다. 자기 몸이 찢기시게 될 것을 내다보는 상징적인 행동이다. 또 “받으라.”라는 명령은 제자들이 주님의 죽음의 효력을 누려야 함을 시사한다.
    
*이스라엘이 유월절 음식(어린 양, 쓴 나물,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음으로 출애굽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 구원의 결과들을 누렸듯이 제자들도 빵을 먹음으로써 주님의 구속적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 효력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언약의 피”라는 의미도 이와 연결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시내산 언약은 출애굽을 위한 유월절 어린 양의 피와 시내산 언약을 위해 희생 제물의 피가 필요하듯, 하나님과 새로운 하나님 나라 공동체 사이에 맺어지는 새 언약도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주님의 피가 필요하다.
    
마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 의미를 기억하도록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이를 지키라 하셨다.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킨 것처럼 말이다.
    
    
    
2. 주님의 길…. 제자들의 길. (27~28절)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밝히신 22~26절은 앞뒤로 제자들의 실패 예고로 감싸여 있다. 가룟 유다의 배신 예고(18~21절)와 베드로의 부인 예고(27~31절)이다. 이 예고들은 안타깝게도 43~49절(가룟 유다), 50~52절(모든 제자), 66~72절(베드로)을 통해 차례대로 성취된다. 자기 죽음을 알고 묵묵히 걸어가시는 주님의 승리 이야기와 자신들의 실패 가능성을 듣고 알면서도 모두 실패하고 마는 제자들의 슬픈 실패 이야기가 이어진다.
    
감람산으로 올라가시는 중에 제자들에게 닥칠 위기를 말씀해 주신다. “다 버리리라(원문은 넘어지리라는 것에 가깝다)”, “다 흩어지리라”(27절)로 표현하시며 이 상황이 예상하지 못할 엄중하고 당황스러울 상황일 것을 미리 알려 주신다. 스가랴 13:7을 인용하신 말씀인데, 초점은 “흩어짐”에 있다. 그런데 스가랴 9-14장은 하나님의 칼이 목자를 치자 그 양 떼가 흩어진다는 것으로 결말짓지 않는다. 그 흩어진 양들 중 삼분의 일은 연단되고 정화되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은 주님의 고난과 죽음은 그의 백성(제자들)을 흩어지게 하겠지만 이에 따라 정결하고 진정한 그리스도 공동체가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러한 실패와 흩어짐의 예고를 하신 것은 자신들이 연단되고 정화되는 기회가 되는 고난임을 알게 하시려는 뜻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러나 내가 살아난 뒤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새번역_28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이다. 가룟 유다가 나를 배신 할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나를 버리고 넘어질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흩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다….. 주님을 배신할 수도 있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할 수 있다. 모두가 뿔뿔히 흩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고난과 방황은 연단의 시간이 되어 결국 부활한 나를 다시 찾게 될 것이다. 너희들이 나를 찾으려면 갈릴리로 오면 된다!! 너희들의 배신도… 나를 버림도… 흩어짐도…. 다시 갈릴리로 모이기 위해 필요한 고통과 아픔의 시간일 뿐이다.
    
*목자를 치면 양 떼는 흩어질 것이다. 그러나 목자가 부활하면 양 떼는 그 음성을 알고 다시 모인다!! 마가복음은 부활하신 주님과 갈릴리에서 함께 모인 제자들의 모습에서 마무리된다.
    
    
    
3. 그런데 베드로…. (29~31절)
주님의 충격적인 “버림받음과 흩어짐”의 예고 앞에 늘 그렇듯 베드로가 선뜻 나선다…. 에고야….. 그저 그 무거운 분위기 그대로 착잡하게 있어야 하는데….. 대뜸, “다 버릴지라도 나는!”이라고 큰소리친다. 자신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제자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자신감이 어디서 왔을까? 그것참 신기하다. 주님께서 분명히 모두 다 흩어질 거라고 하셨는데 자신만은 떠나가지 않을 거라고 확고하게 말한다.
    
그런데 이 확고한 의지의 베드로에게 주님은 더 구체적으로 베드로가 주님을 어떻게 부인하게 될지 말씀하신다. 그 유명한 닭 울음소리와 함께 주님을 부인하게 될 베드로다…. 다른 성도들은 그렇게 해도 나는 하지 않겠다…. 이런 결심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내 똑같이 되어 있는 상황을 직면한다. 그리고 더 깊은 좌절을 경험한다… 사흘 후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여인들의 외침을 듣고 베드로는 누구보다 더 빨리 주님의 무덤으로 내달린다…. 여러 복잡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심정 중에 호언장담했던 자신의 부끄럽고 부끄러운 그날 밤의 행동을 가장 먼저 용서받고 싶어 했을지 모른다.
    
미리 알려 주셨으나 대비하지 못하고 기어이 실패의 길을 걸어간 모든 제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주님의 부활은 너무나 벅차고 벅찬 감동이었겠으나 부활의 주님 앞에 누구도 머리를 들 수 없었다. 이런 모습… 전혀 낯설지 않다…. 그 모습이 나의 모습이니까….
    
    
주님의 길은 “기록된 대로”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십자가의 길 이었으나 꿋꿋하게 먼저 걸어 나가셨다. 그러나 제자들의 길은 알려 주시고 경계해 주셨건만…. 모두가 대비하지 못하여 실패하고만 좌절의 길이었다. 하지만 이 실패가 그들을 하나님 나라 제자의 길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한 사람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연단과 정화의 시간이 된 것이다. 기꺼이 갈릴리로 다시 모이게 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을 향해 스스로 달려가게 하였다. 어떤 시련이 와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자리 앞에서 흩어져 버렸던 그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 안에서는 절대 뒷걸음치지 않았다….
    
고난과 죽음… 얼마나 두렵고 두려운 일인가… 가장 두려운 것들 앞에서 누구나 실패할 수 있고 외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의지 한계다. 스스로 확신하는 믿음의 분명한 모습이다. 하지만 부활의 주님 앞에 다시 모이고 성령님의 임재를 받은 제자들은 적어도 주님의 이름 앞에 다시 부끄러운 흩어짐이 반복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수난과 죽음의 십자가의 길을 앞서가신 주님처럼… 하나님 나라 복음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 스스로들 흩어진다. 기꺼이 돌베개 베기를 마다치 않는다. 이방인의 지역으로 흩어지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며 나아간다…. 부활의 주님을 보고 성령의 능력이 그들을 붙잡으니 어설픈 자기 확신과 호언장담이 아닌…. 주님처럼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의 걸음을 내디딘다. 하나님 나라 제자들의 길…. 주님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길이었다.
    
    
    
나는?
-자신의 죽으심의 의미를 차분히 설명해 주신다.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제자들이 이 나라가 어떻게 세워지는지 분명하게 가르치시고 이를 대대에 지키며 가르치라 하신다.
    
-빵과 포도주…. 찢기고 십자가에 매달릴 주님의 몸, 죗값을 치르기 위해 남김없이 흘려야 할 언약의 피… 식사의 자리에서 기억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이다…
    
-평소대로 라면 우리는 오늘 주일에 성만찬을 행한다. 고난주간을 시작하면서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서다… 하지만 코비드 사태가 이 만찬을 함께 모여 지키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이 의미를 되새겼으면 한다. 각 가정에서 예배를 드린 후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생명의 떡이 되신 주님의 몸과 언약의 피를 흘려주신 주님의 피를 자녀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으면 좋겠다….
    
-한편, 이렇게 귀한 자기 죽음을 알려 주시는 주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 특히 제자들의 배신과 흩어짐과 부인함을 예고하시는 그 마음이 어떠셨을까?
    
-분명 갈릴리에 다시 모일 것을 아셨기에 주저하지 않고 그들에게 무안을 주신다.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신다. 배신할 자가 있다고 했을 때 서로 자기는 아니라고 하고 베드로처럼 자기만은 흩어지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목청을 높이지만… 결국 자신을 팔고, 함께 가지 않고 뿔뿔이 흩어지며, 자신을 부인하게 될 것을 아시면서도… 말이다….
    
-주님 앞에 철저히 자신의 본모습을 보고 그토록 포장된 자신들의 모습이 한없이 연약함을 깨달아야…. 자신의 믿음과 확신이 아니라 주님을 전적으로 바라보고 의지할 수 있기에… 자기 확신이 아니라 “주님 확신”으로 꽉 채워져야 하기에… 이 무안하기만 한 시간이 필요하다.
    
-신앙생활 늘 기적을 경험하며 기고만장한 것만으로 채워질 수 없다. 주님 앞에서 주님께 듣는 무안함… 부끄러움… 황망함….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완전히 본심이 들켜버린 수치심…. 이런 시간이 있어야 자기 확신을 의지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자신의 의지는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주님만 확신”으로 자기를 채워 갈 수 있다.
    
-들켜버린 본심 때문에 주님을 더욱 죽이려 한 종교지도자들, 이런 마음과 행동을 하지 않을거라고 스스로 확신하지만 결국 그렇게 되고야 만 제자들, 똑같이 주님의 예고(경고)를 받았지만, 제자들은 예고대로 실패했지만, 갈릴리로 모여들었고, 종교 지도자들은 여전히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고 자신들의 하나님 자리를 고수했다.
    
-종교 지도자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끌어 내리셨다. 가장 비참할 지경으로 그들을 던지신다. 제자들은 이 실패가 디딤돌이 되어 스스로 땅끝을 향해 자신들을 내던진다.
    
-지금 연약하고 부족하여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실패가 더욱 주님께 가까이 가는 디딤돌이라면 주님은 기꺼이 기다려 주신다. 외면과 흩어짐이라도 그것은 연단과 정화의 시간이 되기에 갈릴리로 먼저 가셔서 기다려 주신다…. 다시 모일 제자들과 함께 먹을 생선을 굽고 빵을 준비하셔서 말이다.
    
-실패를 결론 삼지 않고 부활의 주를 따라 다시 모일 것을 바라보시며 기다려 주시는 주님이 감사하다… “알려 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주님의 길을 흉내 내야지…. 더 알려 주고, 더 기다려 주어야지….
    
-결국 자기 확신은 실패한다. 가룟 유다의 왜곡된 메시아 확신이 그를 비참함으로 내몰았다. 제자들과 베드로의 지나친 자기 확신은 비참한 흩어짐과 부인으로 나타났다. 자기 힘, 자기 확신은 자기를 비참하게 할 뿐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를 처절하게 경험한 후에야 부활의 주님을 비로소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제자의 길은 “주님만 바라봄의 길”이다. 나를 바라봄이 아니라 주님만 바라봄의 길…. 그 길을 가기를 원한다.
    
    
    
*주님, 아버지가 원하신 그 길을 묵묵히 걸으신 주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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