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겟세마네 동산에서 [막 14:32-42]
 – 2024년 03월 25일
– 2024년 03월 25일 –
유월절 식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성만찬을 제장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기 시작하신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직 예수가 무엇을 놓고 기도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주님을 통해 마가복음의 독자들은 그이 진정한 인성을 가늠할 수 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신실하게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신다. 주님 앞에 다가오는 죽음은 쉽게 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주님은 가능하면 그 잔을 옮겨달라고 구하지만 아버지의 원대로 될 것을 기도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수용한 것이다. 반면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무감각한 모습을 보인다. 
 
 
 
1.겟세마네에 오르시다(32~34절)
주님께서 겟세마네에 오르셨다. 기도하기 위해서이다. 가장 중요한 사역인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준비하는 기도다. 마가복음에는 1:35과 6:46에서 주님께서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신 것을 이미 보여 주었다. 이를 통해 보면 주님은 사역의 시작과 진행 중, 그리고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진행하며 기도로 마무리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기도에 동행했다. 이들은 중요한 사건 때마다 주님과 함께 한 제자들이었다. 
 
주님은 그들에게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는(33절)” 모습을 보이셨다. 개역개정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마가다 자주 사용한 “에륵싸토(시작했다는 뜻. ‘매우 놀라 괴로워하기 시작했다’_새번역)”와 “괴로워 하다(엑땀베이스따이)”, “불안해 하다(아데모네인)”와 같은 단어들을 함께 사용하여 자신의 심리를 표현하셨다. 주님은 심히 고통을 느끼며 힘들어 하셨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34절)”라는 토로를 통해 주님이 지금 겪는 고통은 너무도 극심하여 그의 목숨까지 위협할 정도였다. 또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그레고레이테)”는 동사는 현재형이다. 
 
 
 
2.주님의 첫 기도(35~38절)
주님의 마음속 극심한 고통은 주님을 기도로 이끌었다.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큰 소리로 기도했던 것이 분명하다. 땅에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은 유대인들이 보통 손을 들고 서서 기도하던 것과 다른 것이다. 주님의 기도는 또 시편의 애가 기도와 같은 패턴을 보인다. 이 패턴은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려는 기도는 불순종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믿음의 표시임을 보여준다. 
 
주님께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마가가 그대로 전하는 아람어 “아빠(36절)”에서 볼 수 있다. 이 표현이 아이들이 아비를 부르는 ‘아빠’라고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 마가가 아람어를 그대로 전달했던 이유는 분명 주님께서 하나님과 가졌던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 표현은 사도 바울도 그의 편지에서 두 번이나(롬 8:15; 갈 4:6) 언급할 정도로 초대 교회 신학에 영향을 끼쳤다. 
 
주님은 먼저 아버지가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 ‘잔’을 옮겨달라고 간구한다. 10:38~39에서 이미 ‘잔’이 자신의 죽음을 은유하는 것으로 언급했었다. 또한 구약에서 잔이 가지는 하나님의 진노와 그에 따르는 심판의 이미지를 고려하면 주님이 얼마만큼 다가오는 죽음을 괴롭게 생각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순종할 것을 기도하셨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6절)” 주님은 자기의 원하는 것과 필요를 하나님께 간구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 뜻을 복종 시키셨다.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정렬시키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나의 뜻을 매다는 것이다. 
 
그렇게 강렬하게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돌아왔지만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따로 당부하신다(37절). 베드로에게 따로 당부하신 이유는 그가 14:29와 31절에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강력하게 다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강력하게 다짐했던 베드로가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했던 이유를 주님은 “육신(쌁스_육체가 가진 약하고 상하기 쉬운 어떤 측면)”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3.주님의 두 번째, 세 번째 기도(39~42절)
마가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후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셨다고 기록한다(39절). 첫 번째 기도의 방식인 엎드려 기도한 것과 같은 내용으로 기도한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제자들을 보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마가는 제자들이 “눈이 심히 피곤”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제자들은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여 먹고 겟세마네 동산까지 이동한 것을 고려하면 이해할 만한 상황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주님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상태는 되지 못했다. 마가는 “그들은 무어라 대답할 줄 모르는 상태(40절)”라고 말한다. 이 표현은 주님이 심히 고통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곤을 견디지 못해 잠든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41~42절은 주님의 세 번째 기도이후 다시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말씀하신 것이다. 개역 개정이 “이제는 자고 쉬라”고 번역된 문장은 “아직도 자면서 쉬고 있느냐?”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데, 37절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를 고려할 때는 이 번역이 타당할 수도 있음을 제시한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을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신다.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의 무리들과 함께 오고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주님은 간절하게 기도하시며 마지막을 준비하신다. 극심한 고뇌가 큰 고통으로 엄습한 주님은 가까운 세 제자에게 함께 깨어 기도하라고 부탁하셨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이 기도하시는 동안 잠만 잤다. 
 
-주님은 늘 가시던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다. 유다가 자신을 넘기기 좋은 곳임을 알면서도 주님은 이 장소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고난과 죽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신 것이다. 
 
-주님에게 십자가의 길은 큰 괴로움과 슬픔 그리고 죽도록 고민스러운 일이었다(32~34절).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의 길을 피하게 해달라고 아버지께 호소하셨다. 마가는 이 주님의 기도를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 5:7)”고 표현했다. 그렇게 고난 가운데 순종을 배우신 주님은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히 5:8~9). 그런 주님의 기도는 우리 구원을 위한 기도이자 지금 고난과 슬픔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시고 알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괴롭고 힘들 때 망설이지 말고 주님께 나아가자.  
 
-주님과 가장 가까운 세 제자도 주님이 가장 힘들어 하시는 순간에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 유월절 식사 준비로 많이 피곤했겠지만 주님이 부탁하시는 상황은 쉽게 잠들 수 없는 비장함이 있었다. 그럼에도 세 제자는 자신들을 압도하는 피곤함을 이기지 못했다. 평소와 달리 극도의 괴로움과 슬픔을 호소하시면서 함께 깨어있어 달라고 부탁하셨을 때는 현재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감지해야 한다.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주님 곁에서 자고 있던 세 제자의 마음은 이미 주님에게서 멀어져(도망가고) 있는지 모른다. 
 
-깨어 기도하지 못하면 시험에 빠진다(38절). 제자들은 주님을 절대 버리지 않겠다고 큰 소리쳤지만, 함께 기도하지는 못했다. 나의 육신의 감정과 확신을 의지하지 말고 깨어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그럴 때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성령의 소원을 따를 수 있게 된다. 
 
-죽음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장담한 요한과 야고보,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한 베드로는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깨어 있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기도를 미룰 핑계를 찾지 말고 깨어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드릴 기도의 본이다. 주님의 기도는 인간적인 소원으로 시작하셨으나 언제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셨다. 그렇게 세 번 기도하신다. 그렇게 극도의 괴로움과 슬픔을 이기시고 십자가를 향해 힘찬 걸음을 내딛으셨다.
 
-주님은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바라셨다. 그런데 자기 뜻을 꺾기 위해 땀이 핏방울 되어 떨어질 만큼 간절히,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다. “일어나 함께 가자”며 십자가의 길로 나를 이끄실 때 내 욕망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하는 것은 기도로만 가능하다. 
 
 
 
*주님, 주님의 괴로움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주님, 제자들처럼 기도해야 할 때 깊이 잠들까 민망합니다. 깨어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뜻을 꺾기 위해 땀이 핏방울이 될 만큼 기도해본 적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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