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빌라도, 영원히 각인된 비겁한 재판 [막 15:1-15]
 – 2024년 03월 28일
– 2024년 03월 28일 –
산헤드린은 결국 주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긴다. 주님은 빌라도에게 심문받으신다. 산헤드린은 사형을 선고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 지역을 다스린 로마 총독의 공관은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랴 마리티마에 있었으나 유월절 동안 치안을 위해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다.
 
빌라도 앞에 끌려가 로마의 법정에서 재판받는 과정에서 간접적이기는 하나 주님은 다시 한번 자신이 메시아이며 유대인의 왕인 것을 인정하게 된다. 반란죄와 살인죄가 있는 바라바는 풀려나고 의롭고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은 사형이 확정되어 채찍질 당한 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진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이 약속한 구원을 이루는 목적과 계획의 과정으로 진행된다.
 
 
 
1. 빌라도의 심문(1~5절)
대제사장들의 체포와 재판은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졌다. 거의 즉결심판에 가까운 심문과 판결은 정해진 수순대로 끝났다. 개역 개정에는 번역이 되어있지 않지만, 1절은 “그리고 즉시(카이 유띠스)”로 시작한다. 종교 지도자들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제 로마 총독의 재판을 남겨 두었다. 이른 아침 빌라도에게 예수를 넘겨주기 전에 예수를 죽이는 일이 적잖이 정치적 부담이 될 수 있는 그를 위해 확실한 정치적 명분을 주기 위해 “새벽에” 마지막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었다. 로마와 정치적 마찰을 최소화하고 민란 가능성을 완벽히 차단하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더불어 의논”한 후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넘긴다. “결박(데오_묶다)”했다는 것은 예수를 공식적인 죄수로 취급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넘겨 주니(파라디도미)”라는 표현을 통해 주님께서 이미 예언하신 대로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_10:33)” 성취되었다.
 
빌라도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심문한다(2절). “유대인의 왕(이우다이우스 바실류스)”이라는 표현은 로마식 표현이다. 로마 사람들이 유대인이 말하는 “메시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표현에는 예수가 그동안 로마 정부와 유대인 공동체를 곤란에 빠뜨렸던 수많은 메시아를 자청한 인물 중의 하나로 본 것이다. 1세기 당시 적어도 60여 명의 자칭, 타칭 메시아들이 유대 지역에 출몰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로마의 정책은 소위 메시아로 불리는 “유대인의 왕”을 신속하고 잔인하게 제거하는 것이었다. “누가”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고 했다는 무리의 고발이(눅 23:2) 빌라도의 질문 전에 나온다. 즉, 대제사장들의 입에서 먼저 이 표현이 나왔다는 의미이다. 매우 정치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빌라도의 사형 선고를 끌어내겠다는 심산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빌라도는 “네가(수)”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다. “네가”라는 표현은 매우 귀찮다는 듯이, 비아냥거리는 표현인데 이는 예수가 진정 유대인의 왕으로 자기 앞에 잡혀 왔다는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에 주님은 “네 말이 옳도다( 수 레게이스)”라고 대답하셨다(3절). 이를 직역하면 “네가 말했다(말한다)”이다. 부정이 아닌 긍정의 의미지만 그렇다고 강하게 확언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빌라도가 질문하는 의도 속에 담긴 것처럼 반란을 이끌었던 다른 메시아로 동일시되는 것을 거부함과 동시에 자신이 참 메시아임을 인정하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대제사장들은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 것을 계속했다(3절). 이는 반복되는 고발을 일방적으로 쏟아냈다는 의미이다. “누가”의 기록을 통해서 종교적 선동을 통해 정치적 반란을 도모한다는 논리를 반복했을 것으로 추측된다(눅 23:14). 그들은 확실하게 예수를 제거하기를 원한 것이다.
 
빌라도는 반복하여 묻는다(4절). 빌라도가 보기에 자기의 생명이 걸린 재판임에도 예수는 답답하리만치 자기를 변호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 것이다. 침묵을 지키며 자기의 행위를 방어하지 않는다. 대제사장들이 고발하는 많은 내용은 결국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으로 연결되어있고, 이는 로마 정부의 입장에서 반역죄에 해당하는 매우 심각한 사안임에도 주님은 답답하리만치 자기방어를 하지 않고 침묵만 지키고 계셨다. 빌라도가 놀랍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5절) “누가”는 이 대목에서 빌라도가 1차 무죄를 선고하고 예수가 갈릴리 출신이라고 해서 헤롯 안티파스에게 사건을 넘긴 것으로 기록한다(눅 23:4~7).
 
 
 
2. 십자가 처형에 넘겨진 예수(6~15절)
빌라도가 예수의 처형에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단락이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사형 선고하는 것을 미적거리자, 종교 지도자들과 무리는 어떻게든 “민심”을 이용하여 압박하기에 이른다. 당시 명절 사면이라는 전례가 있었는데, 피지배국의 민심을 다독이는 지배국의 통치 관행이었다. “마태”는 좀 더 자세하게 “무리가 청원하고 총독이 재가해 죄수 한 사람을 사면하는 전례(마 27:15)”로 소개한다. 즉 철저하게 총독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한 민심 달래기용이었다. 따라서 사면 대상자는 대개 민중에 대한 영향력을 가진 정치범일 가능성이 컸었다.
 
바라바의 뜻은 “아버지의 아들”이다. 그는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을 저지른 자들과 함께 체포된 상태였다. “누가”는 좀 더 확실하게 그가 살인을 저질렀음을 확인해 준다(눅 23:19). 빌라도는 이런 흉악범과 예수 중에서 예수를 풀어 달라고 요구할 것으로 짐작한 듯하다(9절). 그리고 재차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르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는다(12절). 이처럼 빌라도는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무리의 반응에 충격을 드러낸다. 빌라도는 14절에서 무리에게 예수가 무슨 나쁜 일을 했느냐고 반복해서 물었다. 이는 예수가 대제사장들의 시기로 넘겨진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10절).
 
빌라도의 판결은 매우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는 예수의 무죄를 인식하고 있었다(10절). 하지만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15절)”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 처형으로 넘겼다. 이해할 수 없는 젊은 유대인 한 명을 사형시키는 것이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무리를 자극하는 것보다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는 정의를 추구하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단지 로마 제국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관리일 뿐이었다.
 
주님은 십자가형에 넘겨지기 전에 처형을 신속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채찍질을 한 후 넘겨진다(15절). 당시 채찍질에 사용된 채찍은 가죽으로 만든 채찍의 끝에 동물의 뼈나 쇳덩어리가 달려 있었다. 유대인들은 40대로 제한했지만, 로마의 법에는 제한 규정이 없었다. 실제로 채찍질을 당하다가 사망하는 죄수가 많을 정도로 로마의 채찍질은 잔인했다고 한다.
 
 
 
나는?
-종교 지도자들은 신성 모독 혐의로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수 없었기에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빌라도에게 고소한다. 빌라도는 로마의 허락 없이 유대인의 왕을 자처한 혐의를 추궁하나, 주님은 침묵하셨다.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면 십자가형에 처함에도 주님은 침묵하셨다. 주님의 침묵에 빌라도가 당황한다. 그것은 죽음을 초래할 침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자신이 구세주임을 분명히 밝혔으나 무죄 석방을 위한 어떤 변명도 하지 않으신다. 메시아의 능력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으시지만(마 26:53~54; 요 18:36). 이 일 때문에 이 땅에 오셨고 또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심으로 준비하셨기에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묵묵히 가신다. 주님의 말씀과 침묵에서 우리를 향한 깊은 사랑, 온 인류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전해 온다.
 
-주님은 죄가 없으신데도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마땅히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할 바나바를 살리셨다. 이 구원의 은혜는 자기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이 땅의 모든 죄인, 모든 바라바에게 해당한다.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죄인인 우리를 놓아주신 주님의 은혜가 크고 크시다.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 때문에 잡혀 온 줄 알고 있었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 무죄를 변호하지 않는 자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준다. 그를 죽여야 자신이 살기 때문이었다.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하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그냥 석방하면 되었다. 하지만 대제사장들과 군중들의 눈치를 보느라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국 구세주께 사형 판결을 한 최초이자 최후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총독 빌라도는 대제사장들, 백성과 더불어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삶 속에서 “더 중요한 것”을 지켜야 할 때가 있다. 나의 명분, 명예, 관계 때문에 혹시 이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가? 정말 지켜야 할 것을 지키며 살고 있는가?
 
 
-유월절에 죄수 한 명을 놓아주는 전례를 따라 빌라도는 바라바와 예수 가운데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당연하게 종교 지도자들에게 반감이 있는 무리가 그들의 시기로 잡혀 온 예수 편을 들 줄 알았다. 하지만 군중은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외친다. 비밀리에 진행된 재판을 들으러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이들이라면 당연히 종교 지도자들에게 고용된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외침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반역하는 외침이었다.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거짓에 선동되지 말아야 한다. 군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며 빌라도를 압박한다. 자신들을 위해 오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거짓 지도자들에게 속아 메시아를 죽이는 엄청난 죄에 동참하고 만 것이다.
 
-주님이 이전에 경고하신 대로 거짓 지도자에게 속으면 멸망으로 간다. 사람을 따르다가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 나를 선동하는 거짓 주장과 속임은 무엇일까?
 
 
 
*주님, 진리에 대한 분별력을 주십시오.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주님,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정의를 저버린 빌라도의 비겁함이 오늘 나에게 재현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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