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모욕, 희롱, 욕…. 십자가에서 주님이 온전히 다 받으셨다! [막 15:16-32]
 – 2024년 03월 29일
– 2024년 03월 29일 –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예수는 로마 군인들에 의해 “유대인의 왕”으로 굴욕적인 모욕을 받은 후 골고다로 끌려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습을 묘사한 마가의 글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은 극단적인 굴욕과 그 굴욕 속에 아이러니하게 드러나는 예수의 진정한 정체성(유대인의 왕)이 교차하는 극적인 장면이 전개된다.
    
    
    
1. 군인들의 모욕(16~20절)
“브라이도리온(프라이토리온_총독 관저)”으로 끌려온 주님을 군인들이 모욕하고 굴욕을 주기 시작한다. 자색 옷(17절)은 고대 세계에서 사치스러운 옷으로 주로 왕이 입는 옷이었다. 가시관은 물론 왕관을 상징한다. 군인들은 마치 왕을 대하듯 예의를 갖춰 ‘유대인의 왕’으로 호칭하며 인사했다. 그리고 갈대(홀을 상징)로 예수님의 머리를 계속해서 때렸다. 가시관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맞을 때마다 가시가 머리를 찔렀다. 로마 군인들의 이런 행동은 주님을 조롱하는 것이 분명하나 부지불식간에 주님의 참된 정체를 고백하고 있다. 종교 지도자들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32절)”로 비웃었지만, 이 역시 주님이 왕이심을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강조하는 것이었다.
    
빌라도는 심문 과정에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을 세 차례나 반복했다(2, 9, 12절). 그리고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의 명패도 “유대인의 왕”이었다. 예수를 죽이는 데 관여한 자들의 입을 통해 예수님이 왕으로 고백 되는 것이다. “언어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조롱하는 말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겠지만, 이 복음서를 읽고 있는 성도들은 예수의 참된 정체성을 말하고 있는 꼴이 된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참으로 놀랍다. 겉으로 보이고 들리는 역사 안쪽에 하나님이 이끄시는 참역사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실재하며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께서 수난 속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고백 되었다는 것은 그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 오히려 예수님이 메시아요, 온 우주를 통치하실 왕이 되는 순간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2. 십자가에 달리시고 조롱받으시다(21~32절) 
십자가의 가로 기둥은 라틴어로 “파티불룸”, 세로 기둥은 “시티페스”라고 불린다. 십자가형을 당하는 자들은 “파티불룸”만 지고 형장으로 갔다. 형장에는 이미 “스티페스”가 세워져 있었다. 거기서 스티페스와 파티불룸을 끼워서 맞췄다. 보통 십자 모양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는 영어 “T”모양이 가깝다고 전해진다. 로마 군인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했다. 당시 로마 군병들은 피지배국 사람에게 강제 부역을 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시몬은 구레네 출신이다. 오늘날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북동부에 있는 도시이다. 그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고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은 듯하다. 그는 피부색이 눈에 띄었을 수 있고, 이 때문에 여러 사람 가운데서 로마 군인의 눈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시몬에게는 아들이 최소 두 명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알렉산더와 루포”였다. 흥미로운 것은 마가가 이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또 마가복음을 읽는 독자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동일한 예로 40절에 소개된 여인들 가운데 마리아를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로 소개한 부분이다. 1차 독자들은 이미 이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알렉산더와 루포도 역시 성도였을 가능성이 크다. 일부 학자들은 로마서 16:13의 루포와 동일 인물로 일치시킨다. 이 점을 근거로 이 아들들이 로마에 있었을 가능성도 자연스레 형성된다.
    
*살다 보면 재수 없는 날이 있게 마련이다. 재수 없는 일 중에서 가장 참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는 나쁜 일에 자신이 뽑히는 일이다. 그 많은 무리 속에서 하필 내가 “걸려서” “재수 없는 일”을 해야 한다면, 그야말로 재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그랬다.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잘못해서 지는 것도 아니라,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의 십자가를 대신 져야 한다면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가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면서 얼마나 많은 투덜댐과 불평을 가졌을지 상상이 간다. 하지만 시몬은 아무 잘못도 없이 그 수모를 당하시던 주님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마가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현장인 골고다에는 제자들이 아무도 없었음을 확인해 준다. 주님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다던 베드로도 없었다. 오히려 재수 없이 뽑힌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의 현장에 있었다. 그런데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를 져 보았다. *예상치 못한 고난과 시련, 재수 없음을 통해 예수님을 깊이 만나게 되고 더 깊이 알게 되었다면 그 시련과 재수 없음은 곧 축복이다.
    
    
로마 군병들은 주님을 “골고다(해골의 장소)”로 데리고 갔다(22절). 죄수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곳, 해골이 쌓인 곳, 죽음의 장소라는 의미다. 흔히 “갈보리”라고도 부르는데, 영어 “Calvary”는 해골을 뜻하는 라틴어 칼바리아(Calvaria)에서 왔다. 군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나누었다(24절). 이로써 시편 22:18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행적을 3시간 단위로 기록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새벽에” 빌라도에게 넘겨졌는데, 오늘날의 시간으로 “오전 6시”로 추측된다. 그리고 심문을 받고 사형이 확정되어 군인들에게 조롱받으신 후 제 삼시(오전 9시_25절)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이 시간에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했다. 이후 제육시(낮 12시_33절)에 온 땅에 어둠이 뒤덮였고 제구시(오후 3시)까지 3시간 동안 계속됐다. 그리고 마침내 제구시(오후3시_34절)에 주님은 큰 소리를 지르시고 돌아가신다. 이후 날이 저물었을 때(추측건대 제열두시_오후 6시_42절)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주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장사했다.
    
    
27절의 강도 두 사람은 바라바와 함께 민란에 참여했던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누가’는 이들을 “행악자”로 언급했다(눅 23:32). 주님을 잡으러 올 때 너희가 강도에게 하는 것처럼 칼과 몽둥이를 들고서 나를 잡으러 왔느냐(14:48)고 하셨는데, 지금은 두 강도 사이에, 마치 그들과 같은 강도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면서” 예수를 조롱했다(29절). 고개를 흔드는 것은 조롱의 표시이다. 그러면서 “너 자신이나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30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 보고 믿게 해 보라(32절)고 조롱했다.
    
이 사람들의 조롱은 사탄의 마지막 유혹이었다. 주님은 마음만 바꾸시면 당장이라도 십자가에서 내려가실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시면 인류의 구원은 불가능하게 된다. 마태는 종교 지도자들이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마 27:43)”라고 조롱했다고 기록한다. 그들의 말이 맞다 하나님은 능히 그러하실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이 소리는 사탄의 최후 유혹이었을 것이다.
    
주님은 이 유혹의 소리를 끝까지 견디어 내셨다.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빌 2:8). 이로써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는 주님의 기도가 응답 되었다. 또 종교 지도자들은 “그가 남은 구원했지만,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구나(31절)”라고 조롱한다. 역설적으로 이 말은 사실이었다. 주님은 많은 사람을 구원하셨고 또 구원하실 것이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다.
    
    
    
나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장면은 고통으로 가득 찼다. 뺨을 맞거나 가시관에 찔리시는 것에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고통 그 연속이었다. 그런데…. 이 “고통”을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아마도 고통스러움에 함몰되어 정작 중요한 그 무언가를 놓치지 않을까? 라는 의도가 있는 듯 간략하게 서술하고 지나간다.
    
-하지만 고통은 간략하게 서술하지만, 오히려 “모욕”, “희롱”, “욕지거리” 이런 것은 상세하게 표현한다. 굳이 표현하자면 육신의 고통보다 마음의 고통을 더욱 상세하게 다룬다. 주님께서 모욕을 제대로 당하신 것이다. 지난 3년 동안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주님이셨다. 군사들, 지나가는 사람들, 대제사장들이 “함께” 조롱하였다. 더 나아가 “네가 그리스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믿어 줄게!” 믿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으니 할 테면 해 보라는 식의 농락이다.
    
-이렇듯 주님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온갖 수치와 조롱을 당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를 향한 모든 예언을 다 성취하셨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처참한 십자가에서 죽음이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역사 뒤에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졌다.
    
    
*종교 지도자들의 조롱에서 나의 내면을 만난다. 아…. “이렇게 하면 믿어 줄게….” 이 얼마나 큰 조롱인가?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런 조롱은 2천 년 전 그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상황과 여건만 다를 뿐. 하나님의 전능 하심을 전제로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면 더 잘 믿어 줄게요.”라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일까!
    
-육신의 고통뿐 아니라 정신의 고통을 더 가혹하게 온몸으로 받으시는 주님을 보게 된다. 과연 이런 고통이 있을까 싶다. 부활을 알고 믿으며 이 본문을 읽어도 속상하고 막 그런데….어휴….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조롱하는 그들 앞에 주님이 짠~~~ 하고 내려오셔야 하는데…. 그러면 믿는 거 참~~ 쉬울 텐데…. 아니 속이 다 시원할 텐데….
    
-늘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지나며 마음속에 드는 생각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사실 주님을 위한 생각보다 나를 위한 생각과 바램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겠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 때문에 이렇게 무시당하고 외면당할 때 초자연적이고 신비적인 능력을 발휘해서 조롱하는 그들을 확 밟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대제사장들의 조롱과 다를 바 뭐겠는가?
    
-주님처럼…. 아버지의 뜻이 드러나기까지…. 부활의 영광이 나타날 때까지. 육신의 고통, 정신적 고통…. 묵묵히 인내해야지…. 그것이 믿음이지….
    
    
    
*주님, 예수님처럼 주의 말씀과 뜻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저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온갖 모욕을 당하신 주님을 사랑하고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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