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십자가의 주님을 증언하리라 [막 15:33-47]
 – 2024년 03월 30일
– 2024년 03월 30일 –
예수는 온 땅을 뒤덮은 어둠과 마지막 외침(시 22:1)과 함께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죽을 때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은 성전 기능이 정지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예수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로마 장교는 그를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제자들은 모두 숨은 상태에서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한 공회의 회원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를 매장한다.
    
본문은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 시작 전까지 약 6시간의 서사를 다룬다. 마가가 묘사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장면은 짧지만 강렬하고 생생하다. 온 땅에 임한 어둠, 예수의 절규, 운명과 휘장의 찢김, 그리고 백부장의 고백과 증인들과 같은 장면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녹아들어 있다.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죽임을 당한 예수님의 장례를 산헤드린 공회원인 요셉이 치른다는 점이다. 또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십자가의 죽음과 장례를 목격한 증인의 자리는 당시 가장 신뢰성이 떨어지는 여인들이 채웠다.
    
    
    
1. 예수의 죽음(33~41절)
주님은 제 삼시(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 마가는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어둠이 온 땅을 뒤덮었다고 기록한다(33~37절). “어둠 “이 상징하는 것은 아모스의 예언에 잘 드러나 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날에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게 하며 모든 사람에게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가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애통하듯 하게 하며 결국은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암 8:9~10)” 온 우주가 하나님 아들의 죽음을 애통해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제구시(오후 3시)에 시편 22:1을 외치고 죽는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마가가 시편 22:1을 기록한 것은 시편 22편 전체를 노래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 인용 관습이 일상이었고 주님의 십자가형을 마가는 시편 22편의 예언의 성취로 해석한 것이다. 주님께서 이 시편을 마지막으로 노래하고 숨을 거둔 것은 자기 죽음을 종말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성취로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주님은 그 참혹한 십자가의 고통의 시간들을 “말씀을 암송하며 견디셨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곁에 있던 사람들은 주님의 외침을 들으며 “엘리야를 부른다”라며 오해하고 신 포도주를 마시게 하려 하자 가만두라고 한다.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고 조롱한다(35절). 실로 놀랍다. 정오부터 3시까지 흑암을 경험했음에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말라기 4: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를 근거하여 엘리야가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돌아온다고 믿었다. 하지만 주님은 엘리야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기를 온 힘을 끌어모아 찬양하고 계셨다. 하지만 그 찬양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음에 대한 절규이기도 했다. 이 절규의 핵심은 “죽음”이다. 그토록 아버지로부터 받아 마시기 힘들어했던 고통의 잔은 바로 “죽음”인 것이다. 죽음은 인류 역사가 증언하듯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아들 예수에게 죽음은 아버지 하나님과의 단절이었기에 그보다 더 큰 고통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은 큰 소리를 지르고 사망한다. 주님이 부르짖은 절규를 요한은 “다 이루었다(요 19:30)”로, ‘누가’는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가는 단지 죽음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주님의 죽음의 장소와 무관한 곳에서 일어난 일을 소개한다.
    
예수가 숨을 거두는 순간 성전의 휘장이 위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기록한다(38절). 이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갈라진 것(1:10)처럼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갈라진 것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하늘이 갈라지며 하늘의 소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른 것처럼(1:11), 다시 한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들린다. 그런데 이 고백은 하늘로부터가 아니라 로마 군대의 백부장으로부터 나온 고백이었다.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인이 하늘로부터 시작되어 이방인의 입술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더 중요한 것은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중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했었지만 마가는 마태와 달리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한다(8:29). 마가복음의 시작(1:1)과 하늘의 소리(1:11; 9:7)를 통해 반복해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불렀고, 귀신들도 알아보았으나 예수의 가족과 가까운 제자들도 예수의 진정한 정체성을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까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방인인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고백한 것이다. 백부장의 고백은 귀신들이 그렇게 이 고백을 할 때 반복해서 비밀로 지킬 것을 요구하신 것과 비교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오해를 막기 위해서였다. 예수는 인간의 지혜로 따라갈 수 없는 선생이었고, 어떤 질병도 고치지 못할 것 없는 치유자였으며, 어떤 귀신도 당해내지 못하고, 풍랑도 잠재울 수 있는 영적 능력자였지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오직 십자가 위에서 고난받고 죽임을 당할 때 나타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의 처음과 마지막은 “하나님의 아들”로 시작해서 끝이 난다.
    
    
    
2. 예수의 장례(40~47절)
로마 백부장의 놀라운 고백에 이어 예수 공동체중에서 완전히 사라진 남자 제자들과 달리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르던 몇몇 여인들은 멀리서나마 주님의 죽음을 지켜보고(40절), 그의 매장도 지켜본다(47절). 마가는 그녀들의 이름을 소개했다. 막달라 마리아(눅 8:2~3), 작은 야고보와 요세(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마 27:56; 눅 24:10; 요 19:25, 글로바의 아내), 살로메(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마 20:20)가 특별하게 언급된다. 이렇게 언급한 이유는 본문에 따르면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대표적인 여인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외에 예루살렘에서 따라온 여인들(41절)”도 있었다. 역설적으로 마가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목격자로서 가장 신뢰성이 낮은 이방인과 여인들을 통해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인하고 있다.
    
예수가 죽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당돌히(톨마오_감히~하다, 담대히 ~하다)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신을 요구한다. 마가는 그를 “존경받는 (산헤드린)공회원이자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43절)”라고 소개한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경건한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산헤드린 공회원임에도 자신의 안전을 위협할 수도 있는 요청을 한 것은 신 21:23에 근거하여 죄인이나 혹은 적의 시체라도 죽은 당일에 매장하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날은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었다는 사실도 요셉의 행동을 이해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신명기는 밤새 시체를 나무 위에 매단 채 놓아두는 것은 땅을 더럽히는 행동이었고, 안식일에 매장하는 것은 금지되었기에 빨리 처리해야만 했다.
    
그런데 빌라도는 예수가 벌써 죽었는지 의아해했다. 대개 십자가형에 처한 죄수들은 하루 이상, 어떤 경우는 이삼일 걸려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백부장에게 확인받은 후에야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주었다(44~45절). 마가가 이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한 것은 예수가 실신이나 코마 상태가 아닌 완전히 죽은 상태였음을 확인하려는 동기인 듯하다. 그런데 빌라도가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준 것은 로마 제국의 절차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대개 십자가형에 처한 이들은 명예로운 장례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 21:23에 근거한 유대인의 풍습에 어느 정도 타협한 것으로 보면 된다. 한편 예수의 시체를 공회원에게 내어줌으로써 예수의 제자들이나 가족들이 매장할 기회를 박탈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가를 비롯한 복음서 저자들은 제자들이 주님의 장례를 진행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요셉은 미리 세마포를 구입해 놓았다가 시체를 처리했을 것이다. 마가는 주님의 장례 절차를 매우 압축하여 기록했다. 장사한 무덤이 요셉 자신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새 무덤이었다든지(마 27:60), 이 장례 절차에 같은 공회원이었던 니고데모와 함께 시체를 닦고 향료와 함께 세마포로 싸며 진행한(요 19:39~40) 것에 대해 침묵한다. 이 모든 과정을 멀리서 지켜보았던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무덤의 위치를 파악해 놓았다(47절).
    
    
    
나는?
-제자들, 따르던 무리, 종교 지도자들, 백성에게 버림받으신 주님이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버림을(외면) 받으신다. 처음 유다에게 배신당하셨고, 제자들에게도 외면당하신 주님은 마지막으로 하나님 아버지께도 버림을 받고 돌아가셨다. 십자가의 죽음은 버림받은 아들에게도 고통이었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신 아버지께도 큰 고통의 순간이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다.
    
-주님의 돌아가심이 곧 우리의 생명이요, 아들을 버리신 아버지의 아픔이 우리를 살리시는 사랑임을 잊으면 안 된다.
    
-정오(제육시)가 되자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 이 어두움은 주님이 운명하신 오후 3시(제구시)까지 지속되었다. 아모스 선지자는 심판의 날인 여호와의 날에 대낮에 어두움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었다(암 8:9~10). 또 예수님께서도 종말에 인자가 재림할 때 해가 어두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었다(막 13:24).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한 것은 주님의 죽음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보여 준다(욜 2:2; 습 1:15). 세상의 빛(요 1:9; 8:12)인 주님이 돌아가신다면 세상에 어둠이 내리는 것은 당연하다.
    
    
-주님의 마지막 절규(34절)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나 절망의 부르짖음이기보다, 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우리를 향한 질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버림을 받았다고 외치실 만큼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크고 두려운 것임을 잊으면 안 된다.
    
-동시에 주님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인 신뢰와 함께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었다. 주님께서 부르짖은 시편 22편은 다윗이 고난 가운데 노래한 시편이다. 다윗은 사람들로부터 심한 조롱과 멸시를 당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부르짖었으나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탄식한다. 하지만 그의 시편 결말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구원을 구하는 기도,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주님은 모진 고통 속에서 시편 22편으로 기도하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결코 버리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붙들고 계심을 확신하셨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치신 것이다.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 때문에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 속에서 마지막으로 힘을 다해 기도하신 것이다.
    
    
-주님의 최후 외침(시 22:1)은 자기 죽음으로 많은 생명을 살릴 것에 대한 확신 가득한 증언이었다. 하늘이 갈라지고 하늘의 소리가 들림으로(1:10) 시작한 공생애 사역이 주님의 큰 소리와 성소 휘장(하늘과 땅의 경계)이 찢어짐으로 마무리되었다. 주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신실한 마무리였음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정해 주신 것이다.
    
-주님이 운명하시는 순간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다. 주님이 운명하실 때 왜 성소 휘장이 찢어졌을까? 이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이었다. 지성소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곳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다. 대제사장조차 1년에 한 차례밖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던 그 휘장이 찢어졌다(찢겼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누구나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동시에 부패하고 타락한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는 것으로 결론지은 것이다. 이제부터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주후 1세기)에 따르면 이 휘장에는 하늘이 그려져 있었다. 성소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하늘이 찌어졌다는 말이다. 주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진 사건과 놀랍게도 일치한다. 마가는 예수님의 일생을 하늘이 갈라진 것부터 시작하여 하늘이 갈라진 것으로 끝이 난 것으로 기록했다.
    
-하늘이 갈라져 성령이 내려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었고, 성소 휘장의 하늘이 갈라져 타락한 성전은 끝이 나고 주님의 찢긴 몸이 우리를 구원하는 길이 되었다. 갈라진 하늘, 찢어진 휘장.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신 주님의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백부장은 고난과 죽음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다(39절).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1:1)”으로 시작한다. 시작과 끝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 시킨다. 백부장의 이 고백은 매우 중요하다. 당시 로마 제국은 로마 황제가 신의 아들로 신격화되고 있었다. 그런데 백부장은 그동안 숭배해 오던 황제가 아니라 힘없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왜 백부장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했을까? 마가는 “그렇게 숨지는 것을 보고”라고 기록했다. 골고다에 있었으니,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을 볼 리 없었을 테고 처형 현장에서 경험한 “온 땅에 임한 어두움(33절)”과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시는 것(37절)을 보았다. 백부장은 다른 죄수들과 달리 의연하게 죽으시는 것을 보았다. “누가”가 증언한바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시고 죽으시는 모습에서 죽음의 순간에도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는 가운데 평화롭게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이 순간만이 아니라 그는 총독 관저에서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줄곧 함께 있었다. 즉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전체 과정을 보았다는 뜻이다.
    
-놀랍게도 이방인 백부장의 입으로 “하나님의 아들(1:1, 11; 9:7, 15:39)”이라는 사람의 고백이 처음 나왔다. 종교 지도자들조차 주님이 “찬송 받으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인정했을 때(14:61~62) 이를 빌미로 사형을 선고하고 모욕했었다. 또한 제자들조차 예수님이 놀라운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해 주실 메시아로만 알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동안 예수님을 만나 보지도 못한 로마 백부장은 주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 것이다. 이적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그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 보았다. 마가는 그는 단지 “예수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39절)”라고 기록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생생한 증인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마가는 이 기록을 통해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난 사람만이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을 전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참믿음은 직분이나 영향력에 달리지 않았다. 주님의 제자들이 모두 도망친 가운데서도 주님을 섬겨오던 여인들은 끝까지 십자가 곁을 지켰다(40~41절).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나는 재빨리 몸을 피하는가? 아니면 믿음으로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가?
    
-위기에 진짜가 드러나는 법이다. 위기의 순간, 남은 자들이 드러난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공회원임에도 온갖 구설수와 오해를 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묘에 중죄인 예수를 품위 있게 매장하여 고난받는 종이 부자와 함께 묻힌다는 성경의 예언(사 53:9_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이 이루어진다. 무리의 거역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남겨진 믿음의 사람을 통해 흔들림 없이 이루어진다. 내가 속한 땅, 세상 속에서 이런 “남은 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주님, 십자가의 주님을 기억하겠습니다. 내가 만난 십자가의 주님의 증인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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