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모세의 축복과 죽음 [신 33:18-34:12]
 – 2024년 04월 26일
– 2024년 04월 26일 –
이스라엘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이 이어지고, 34장에서는 모세의 죽음이 기록된다. 모세는 나머지 다섯 지파가 풍요와 땅, 은혜, 번영, 힘을 갖게 될 것을 소망하며, 결론적으로 피난처이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모세의 유언(축복)이 가지는 의미는 야곱의 유언과 비교하여 책망이 없고, 그가 하나님의 사람(예언자)으로, 각 지파의 이름이나 거주지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복을 기원하는 일종의 시적인 표현으로 축복했다는 점에 있다. 34장은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을 거절당하고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 약속의 땅을 살핀 후 모압에서 죽은 이야기와 후계자 여호수아의 위임과 관련된 안수를 언급한다. 그리고 모세에 대한 후손들의 탁월한 사후 평가를 담고 있다.
    
    
1. 다섯 지파들에 대한 유언(축복_33:18~29)
18~19절은 스불론과 잇사갈에 대한 축복이다. 표제는 ‘스불론에 대하여’라고 되어 있으나 그 내용은 스불론과 잇사갈 지파를 위한 것이다. 모세는 두 지파에게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라고 요청한다. 그런데 스불론 지파에게는 장막에서 나감으로, 잇사갈 지파에게는 장막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축복한다. “장막”이라는 표현이 공통으로 나오는데, 이들이 이스라엘 내륙의 땅을 분배받은 것에 따른 표현일 수도 있다. 19절의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할 것이라고 축복한다. 이는 스불론과 잇사갈이 땅과 바다, 모든 자원의 복이 임하기를 축복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20~21절은 갓 지파에 대한 축복이다. “광대하게 될 것”이라는 축복이다(20절). 넓은 땅을 갖도록 축복하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도록 기원한다.” 혹은 “그들을 돕는 자에게 복이 있으리라”라는 식의 해석도 가능하다. 참고로 “갓”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행운”이라는 것과 관련하여 “가장 좋은 땅을 차지한(가장 최상의 몫을 차지한)” 것과 관련지어도 이상하지 않다. 갓이 얻은 분깃은 가장 윤택한 곳이다. 여기에 갓 지파의 지도자들이 “여호와의 공의와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주님의 공의를 지키고 율법에 복종하였다_새번역)” 세우는 것에 역할을 할 것을 예견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즉, 갓 지파는 이스라엘에 “공의와 정의”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축복이다.
    
22절은 단지파에 대한 축복이다. ‘사자’에 비유하는데, 이 사자가 어린 사자이기보다 젊은 사자를 가리킨다고 유추하는데, 단지파가 그만큼 용맹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23절은 납달리 지파에 대한 축복이다. 납달리는 야곱의 첩 빌하의 아들이다. 모세는 “은혜가 풍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축복을 선언한다. 그들에게 주어진 땅은 북쪽 갈릴리 지역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 지역에 여호와의 복이 가득하며, 남방과 서방(갈릴리 호수)을 얻을 것이다.
    
24~25절은 아셀 지파에 대한 축복이다. 모세는 아셀 지파의 복이 가장 클 것이라고 축복한다. “아셀”이라는 말 자체가 “행복”을 의미하는데,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길 것이다”라고 축복한다. 아셀지파가 거할 땅(갈릴리 고원지대)의 특산물이 올리브인데, 이와 관련된 것일 수 있고, 결실이 많은 지역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와 자손 번성을 기원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고 추측한다. 또 “문빗장은 철과 놋”이라는 축복은 그들이 안전하고 안락할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26~29절은 다시 여수룬을 언급한다. 모세의 유언(축복)이 시작되는 부분에서(33:5) 등장했고 마무리하고 다시 등장한다(26절). 특히 26절은 “여수룬을 돕기 위해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묘사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처소이고 그의 팔 아래 있으며, 여호와께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실 것이라고 언급한다(27절). 그렇기에 이스라엘은 안전하게 거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풍요로운 약속의 땅에 거한다(29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온갖 축복을 독차지하게 된다. 그들은 여호와로 인해 구속받은 백성이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방패이며 영광의 칼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굴복하게 될 것이고, 그들의 등(높은 곳들)을 밟아 영광을 얻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모든 대적과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하신 전사 여호와의 보호를 바라는 이스라엘의 행복이다.
    
    
2. 모세의 죽음(34:1~12)
40여 년간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모세는 주어진 모든 사역을 성공적으로 마치지 못했으나(?), 여전히 훌륭한 지도자로서 임무를 마무리한다. 이제 모세는 이스라엘이 얻게 될 약속의 땅을 둘러보며 아직 이루지 못한 중요한 과제들을 여호수아에게 위임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삶을 마감한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성공과 실패에서 큰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1~8절은 모세의 죽음을 다룬다. 특히 1~6절은 신명기 전체의 역사적 배경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모세는 모든 수고와 노력, 그리고 모든 교훈과 노래들과 축복을 진술하고 희망과 절망의 장소로 올라간다. 이미 모세는 자신의 리더십에 대한 퇴임사를 모두 낭독했다. 비록 오래전에 약속받았던 조상들(아브라함, 이삭, 야곱)처럼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그가 들어가고자 애쓴 지경들을 마치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높은 산에 올라가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현실적으로는 2~3절의 땅들은 시각적으로 직접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계시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행위로 그 전체를 불 수 있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느보산 정상에 서 있던 모세는 “죽을 때 120세였지만, 그의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7절)”라고 부연 설명해 준다. 이는 건강상의 이유로 이스라엘의 리더십에서 물러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건강과 상관 없이 여호와의 뜻에 따라 은퇴한 것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신의 모든 권세와 특권을 내려놓았다.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 되었다(6절). 이곳은 모세의 마지막 설교가 행해진 곳이자 이스라엘이 시혼과 옥과의 싸움에서 승전한 곳이기도 하다(3:29; 4:46~49). 이 지역은 모세에게는 실패의 장소지만, 이스라엘에게는 희망의 장소였다. 야곱은 자식들에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했으나, 모세는 여호와의 인도로 홀로 장엄한 죽음을 맞이했다. 결국 모세는 이스라엘 가운데 기억으로만 남아있을 뿐, 그의 육신이 매장된 무덤은 잊혔다. 모세가 죽자, 백성들은 30일을 애곡하였다. 호르산에 아론이 죽었을 때와 같았다.
    
    
9절은 여호수아가 모세의 리더십을 승계하는 장면이다. 이에 대한 언급은 민수기 27:12~23에서도 나타난다. 민수기에서의 모세의 염려는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였다. 이는 신명기의 결론일 뿐 아니라 모세오경의 결론이기도 하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향해 마지막으로 언급한 말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모든 준비의 대단원이기도 했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에게 지혜의 영이 넘쳤다.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잘 듣고 그를 따랐다(새번역_9절).”
    
    
10~12절은 모세에 대한 평가이다. 많은 학자는 이 부분을 모세에 관한 일종의 문학적 묘비명들, 혹은 부고(訃告)라고 칭한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10절)”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이어지는 모세가 여호와와 대면했던 자이고, 애굽에서 바로와 그의 신하들에게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이스라엘 앞에서 행한 유일한 대행자였기 때문이다(11~12절). 따라서 이후로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더 이상 나올 수 없었다.
    
이를 강조하여 설명하는 것은 여호수아도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서 직접 행하지 못하고 엘르아살 제사장 앞에 섰고 엘르아살이 우림의 판결을 통해 여호와의 뜻을 물어야 했던 것과(민 27:21) 비교가 된다. 한편 신 18:15~22에서는 “나(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킬 것이라고 선언하는데,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직접 듣고 백성에게 대언하는 기능을 계승한다는 측면에서 서술이다. 이들은 “선지자”들이었다.
    
이로써 모세 이후의 선지자들은 “모세와 같은 자”가 아니라 “모세의 정신을 잇는 자들이다. 그들은 모세의 권위로 주어진 토라(율법, 말씀)를 “재해석”하여 선포한다는 점에서 모세의 권위 아래 있는 자들이다. 즉, 모세 이후에 등장할 모든 선지자는 모세가 그들이 뒤따라야 할 모범이다.
    
    
나는?
-일상의 복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다(33:18~19). 스불론과 갓 지파에게 집 안과 집 밖,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복을 주시겠다고 축복했다. 그곳이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든,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이든 간에 풍부하게 채우신다. 나의 일상에도 이렇게 풍부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의 축복에 반응하고 감사하고 있는가? 특별하고 큰 복뿐 아니라 작고 소소한 복에도 감사하고 있는가? 당연히 그리해야 한다.
    
-스불론과 잇사갈에게는 땅과 바다, 즉 모든 자원으로부터의 풍요로움을, 납달리에는 풍성한 은혜와 하나님의 복을, 아셀은 형제들보다 더한 기쁨과 넉넉한 기름을 약속하신다. 풍요로움은 가나안 땅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 땅에 이슬을 내리시고 홀로 이스라엘에만 거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이스라엘은 자연조건이 아니라 그곳에 자신들을 두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땅은 소유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지배하고 다스릴 대상이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다(33:20~25). 모세가 빌어주었던 복은 크게 두 가지이다. 물질적 풍요와 대적으로부터의 안전한 보호와 승리이다. 갓 지파에게는 가장 좋은 땅을, 납달리에는 풍족함을, 아셀에는 머리에 바르는 값진 기름에 발이 잠길 만큼 넉넉함을 주신다. 다른 모든 지파에게도 경제적인 안정과 풍요를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나의 필요를 아시고 채우시는 분임을 바라보게 하는 축복들이다. 지금 나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구해야 할까? 나의 필요를 하나님께 이렇게 구하며 매달리는 믿음을 행사하고 있는가? 마땅히 그래야 한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약 1:5)”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신다.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인 갓에세는 광대함을, 아셀에는 다른 형제들보다 많은 축복을 약속하신다.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이 단에는 사자 새끼의 용맹함을, 납달리에는 풍성한 은혜와 여호와의 복을 약속하신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 모든 것을 갖춘 지파도 없지만, 스스로 생존할 수 없을 만큼 악조건 가운데 사는 지파도 없게 하신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같은 ‘신’은 없다(33:26~28). 모세는 이스라엘 지파들을 축복하면서 처음과 끝부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환기한다. 하나님 없이 어떤 복도 없다. 복 받기 위해 찾아가야 할 다른 신들과 달리 하나님은 복 주기 위해 친히 오셔서 소 우리의 거처가 되어 주셨다. 무엇을 요구하기 전에 무엇을 주고 싶어 안달하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33:29). 출애굽과 광야의 은총은 그야말로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그것은 오로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었고 배려였다. 그들이 잘나고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내가 받은 복이 얼마나 많은가!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자신들에게 주신 분이 누구신지 알아야 한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조건만 보지 말고 자신들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과 같은 이가 없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여수룬 같은 나라가 없다”라는 축복을 받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설교와 노래, 그리고 기도까지 모두 마친 모세는 느보산에 올라 약속의 땅을 바라본 후 죽었다. 그는 비록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는 못했어도 더없이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34:1~12).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시다(34:1~4). 모세를 느보산 정상에 서게 하시고 그곳에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의 모든 경계를 보여주신다. 비록 모세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가장 먼저 가나안 땅을 보는 특권을 누렸다. 또한 모세가 죽을 때 그의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사명이 끝났기에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며, 약속을 이루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
    
-모세는 빈 무덤을 남겼다(34:5~8). 모세는 정녕 그와 같은 선지자가 다시 없을 정도로 걸출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집에서 일한 사환일 뿐이었다(히 3:5). 그는 하나님의 종이었다. 종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그에게는 무덤이 없다. 죽은 자를 위해 통상 지키는 30일간의 애도 기간을 가졌을 뿐이다. 죽은 자를 숭배하거나 무덤을 성지로 꾸며놓고 경배하지 않도록 애초에 금하신 것이다. 우리는 무덤이 아닌 삶으로 기억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모세는 안수하므로 리더십을 여호수아에게 이양한다(34:9). 모세의 리더십은 하나님께 기도로 의존하는 것이었다. 안수는 하나님께 여호수아를 의탁하는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오는 리더십을 전달하는 것이다. 모세는 여호수아가 전임자의 꽁무니를 쫓는 후임자가 아니라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리더가 되기를 바랬을 것이다. 우리가 남길 것은 물질이나 건물이 아니다. 사람이다!.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 공동체는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것에 얼마나 진심인가!
    
-모세는 이름을 남겼다(34:10~12). 모세와 필적할 수 있는 지도자는 더 이상 없다. 여호와와 대면하면서도 죽지 않고 대제국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물 없고 양식 없는 광야를 안전하게 이끈 그와 같은 지도자는 없다. 새로운 출애굽으로 “새 이스라엘, 새 언약, 새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신 예수님 말고는 없다.
    
    
    
*주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만큼 행복한 것이 없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주님, 모세를 기억하며 저도 하나님의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며 사람을 세우고 남기는 목회를 꿈꾸고 순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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