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기도에 힘쓰다. 사람을 세우다. [행 1:12-26]
 – 2024년 05월 02일
– 2024년 05월 02일 –
주님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셨다. 승천 이후 열한 사도들과 예수의 승천을 지켜봤던 형제자매들은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여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행 1:4)”을 기다리며 기도에 집중한다. 베드로는 두 편의 시편 구절을 제시하며 스승을 배반한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 선출을 제안한다. 다락방에 모인 120여 명의 무리들은 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열두 번째 사도로 선출한다.
    
본문은 최초의 부활 공동체의 특징과 그 존재 방식이 온전하게 기록으로 보인다. 두 가지가 두드러지는데, 먼저 그들은 기도공동체였다. 이십여 명에서 백이십 명으로 늘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기도에 힘썼다. 또한 그들은 주께서 그 가운데 계시며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고 믿으며 자신들은 다만 그 결과에 순종하겠노라는 순종의 공동체였다. 기도로 하나 되고 순종으로 하나 된 공동체였다. 아! 얼마나 놀라운 공동체인가! 사도행전 속 공동체는 내내 이 두 가지의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낸 공동체였다.
    
    
    
1. 기도에 힘쓰는 공동체(12~14절)
주님께서 승천하신 장소는 감람원 산이었다(12절). 게다가 주님께서 승천하신 날은 “안식일”이었다(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 주님은 여전히 유대의 율법에 속해 있는 제자들과 성도들을 위해 세밀하게 배려하셨다. 감람원에서 돌아온 그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기 위해 예루살렘의 한 집 다락방에 모였다. ‘누가’는 그 자리에 참석한 열한 제자의 이름을 나열한다. 이는 눅 6:14~16에 소개되었던 명단과 동일하다. 매우 특이한 것은 그 자리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의 아우들도 있었다고 기록한다는 점이다.
    
이는 주님의 부활 이후 마리아와 아우들에게 큰 영적 변화가 있었음을 쉽게 짐작하게 한다. 그들은 주님의 공생애 기간에는 주님을 믿지 않았다(막 3:21, 31~35; 요 7:3~5).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경험한 이후 주님을 믿게 된 것으로 보인다. 주님의 아우 중에서 ‘야고보’는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 직분을 맡게 된다. 그리고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에게 믿음과 삶의 일치를 설파하는 야고보서를 남기고 순교한다.
    
다락방에 모인 이들은 “마음을 같이하여(한 마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기다리며 기도에 힘썼다. 개역 개정은 14절에서 “오로지”라는 부사를 덧붙이는데, “지속하다, 전념하다”의 의미이다. ‘누가’는 이들이 “오로지” 기도에만 전념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 모두가 한마음으로” 기도에 집중했음을 더 강조한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굳건하게 붙잡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오로지 기도만을 위한 기도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기도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는 “약속하신 말씀”을 굳게 붙잡고 채우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모습이 가능했을까? 그들은 부활과 승천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은 그들의 신변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그리하라는 엄중한 명령이었다. 하지만 자기들 신변의 안전보다 더 막중한 은혜와 감동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그들에게 “오로지” 기도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부활의 공동체가 기도의 공동체로 더욱 다져지고 있었다.
    
    
    
2. 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다(15~26절)
‘누가’는 주님의 승천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사이에 일어난 한 사건을 소개한다. 가룟 유다를 대신할 열두 번째 사도를 선출하는 일이었다. 누가가 왜 이 사건을 오순절 강림보다 더 앞서 다루는 것일까?
    
먼저 모인 수가 백이십 명이나 되었더라(15절)는 기록을 통해 당시 유대 법에 자치위원회를 갖춘 하나의 공동체를 설립하려면 최소 남자 백이십 명이 필요한 것에 따라 언급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들을 “형제(아델포스)”로 호칭했다. 이 호칭은 여자를 포함하고 초대교회 교인을 지칭하는 최초의 호칭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표현이었다. 베드로는 그 “형제들”에게 성경이 유다에 대해 미리 예언했고 그 예언은 반드시 성취되어야만 했다고 언급한다(16절). 그리고 18~19절은 유다가 어떤 죽음을 맞이하였는지에 대한 누가의 부연 설명 부분이다. 개역 개정에서 괄호 처리로 베드로의 말과 구분시켜 놓았다. 그런데 이 기록은 마태의 기록과(마 27:5~8)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가룟 유다가 걸어가야 했던 배반의 걸음의 종말이 어떠한가에 대한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팔아넘긴 길잡이가 된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는 근거로 시편의 말씀(시 69:25; 109:8)을 인용한다. 시편 69:25은 메시아를 대적하는 자를 향한 저주의 말이다. 초대교회는 이 구절에서 주님을 배반한 자에 대한 예언이나 모형을 발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시편 69:25의 “거처”는 유다가 산 땅을 가리킨다. 또한 시편 109:8은 원수에게 연달아 저주를 퍼부으며 타인이 그의 직분을 빼앗기를 원하는 탄원의 내용이다. 따라서 이 구절들은 유다의 사도직이 다른 사람에게 인계되어야 한다는 해석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시편 적용도 당시 유대교 성경해석 방법에 따른 것인데, 구약을 인용하면서 원저자가 미리 내다보지 못하는 부분과 상황까지 적용하려는 시도들이다.
    
21~26절은 세워질 사도가 갖추어야 할 요건과 사명을 제시한다. 먼저 “요한의 세례부터 예수의 승천까지 주님과 함께 한 자가 되어야 한다(21절)”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건이었다. 이는 나머지 사도들과 함께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명을 감당하는데(22절) 필수 불가결한 요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하여 두 후보가 세워졌는데, 요셉(바사바, 별명은 유스도)와 맛디아였다(23절). 그 자리에 모인 성도들은 이 일을 위해 기도했다. 24~25절을 직역하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당신 택하신 이 두 사람 중에 유다가 자신의 자리로 가기 위해 버린 이 사도의 직분을 대신할 자가 누구인지 보이소서”이다. 그렇게 기도하고 나서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세운다.
    
    
    
나는?
-초대교회 공동체는 기도와 순종의 공동체였다.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 예루살렘에 머문다.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열한 제자가 공동생활을 했다. 이곳에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주님의 동생들도 참여했다. 이들은 스승 앞에서 서로 큰 자가 되려고 했던 자들이었고, 스승을 배신한 자들이었다. 또 주님을 미쳤다고 말리던 자들이기도 하다. 그런 그들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모였다.
    
-부활의 증인으로 나아가기 전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순종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이었고, 이를 공동체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경험이 성령의 역사를 깨닫게 하는 통로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승천한 주님을 본 제자들은 “함께 모여서”,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 구체적인 기도의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의 마지막 명령을 따라 성령의 권능으로 감당해야 하는 증인의 삶을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주님의 고난과 죽음의 시간을 통과하며 실패한 경험이 있는 제자들이 이번에는 기도를 통해 주님의 도움을 구한다. 홀로 감당하면 실패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기도로 주의 뜻을 구하고 주의 도움을 구하는 것을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
    
    
-베드로는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보선할 것을 제안한다. 시편(시 69:25; 109:8)을 인용하여 그것이 성경의 성취라고 호소했다. 베드로는 40일 동안 주님께 하나님 나라에 대해 배웠고 기도에 전념하면서 주님의 빛 아래에서 구약성경을 다시 깊이 상고했다. 이 묵상의 시간을 통해 열두 사도는 옛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신하는 새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교회의 설립과 하나님 나라 운동의 토대가 되어야 할 것을 확신했다. 그 첫걸음이 가룟 유다의 빈자리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누가는 가룟 유다를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이라고 기록한다(16절). 교회 공동체는 예수를 증언하는 길잡이가 되어야 함을 대조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낯선 곳을 갈 때 함께 동행하여 길을 알려주는 존재가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 하물며 영혼의 영원을 향할 길을 가는데 올바른 길잡이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사명이 교회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명의 교회가 이를 전혀 감당하지 못한다면? 소름끼치도록 두려울 일이다.
    
-무엇보다 베드로의 변화가 고무적이다. 무엇이든 급한 성품으로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그였지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 복음이 전체적인 조망 속에서 지금 제자 공동체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짚어 낸 것이다. 유다는 열두 제자 중 하나로 선택되어 주님의 가르침과 능력을 직접 듣고 본 자였다. 또한 둘씩 파송할 때도 능력을 행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주님을 배반했다. 자기 삶도 자살로 마감했다. 주님과 함께 걷는 걸음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놀라운 깨달음과 신기한 경험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본질은 아니다. 주님을 향한 바른 관계(동기)에 근거한 성실함을 일상에서 지속하는 것이다. 유다의 실패는 언제든지 나의 실패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공동체이다. 제자들은 최소한의 기준만을 마련한 후 하나님께서 친히 사도 한 명을 세우시기를 기도한다. 새롭게 세워질 사도는 “제자들과 함께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그분을 경험한 사람 중에서 봉사(구제)와 사도의 직무(증거)를 맡기에 적합한 사람이어야 한다. 제자들은 요셉과 맛디아를 후보로 천거했다. 그중에서 주님은 맛디아를 사도로 세우셨다.
    
-맛디아를 세우는 과정은 많은 시사점을 깨닫게 한다. 말씀으로 필요성을 절감하여, 점검하고, 공동체가 협의하여 자격을 정한 후에, 투명한 절차를 따라 후보를 추천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로 일꾼을 뽑았다. 지금 우리는 새 이스라엘, 새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의 일꾼을 어떻게 뽑고 있을까?
    
-맛디아는 주님의 열두 제자로 부름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주님의 사역 초창기부터 신실하게 주를 따랐다. 열둘에 속한 후에도 계속 신실하게 주 안에서 살았을 것이 확실하다. 이런 면에서 이미 맛디아는 가룟 유다와 선명한 대척점이 있다. 드러나지 않았고, 큰일을 하지 않더라도 바른 동기와 신실한 순종의 모습을 갖고 살아가는 산 제자가 되어야 하리라
    
 
*교회 공동체는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할까? 교회는 말씀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주어진 사명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공동체여야 함을 주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공동체는 보여준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가 나아가고 멈추는 것을 결정하는 방식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부활 공동체는 마음을 하나도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공동체였다. 그런데 이렇게 행한 근거는 주님이 분부하신 대로 각종 위협과 고난이 상존하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이 오시기를 기다리라는 명령이었다. 각자 자신들의 뜻대로 행하기를 주님의 명령 앞에 모두 내려 놓았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일에 한마음이 되었다. 사도와 성도, 남자와 여자가 따로 없었다. 오직 주님의 때와 뜻만이 중요했다. 우리 공동체도 이를 본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성경으로 자신을 해석하는 공동체였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룟 유다의 배신과 죽음, 열두 사도의 구속사적 위치 등을 깨닫는다. 성령이 임하여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 결원된 한 명의 사도를 보선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깨달았다. 말씀에 근거한 해석이었고,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하고 증인들의 본이 되어야 했기에 그 기준은 예수님과 동행하며 그분을 경험한 자로 정했다.
 
*사명에 순종하는 공동체였다. 베드로의 말씀 적용에 동의하고 요셉과 맛디아를 후보로 세운 후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새로운 사도로 받아들인다. 둘 다 합당한 후보였으나 자신들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가 세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이에 순종했다.
 
*성령을 기다리는 무리들의 정체성은 새 이스라엘이었다. 열두 사도는 세 이스라엘의 기초였다.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해 옹졸하게 숨어있는 비겁자나, 지도자를 잃어버린 오합지졸들이 아니었다. 새로운 새 이스라엘의 시대를 열기 위해 부름 받은 사명자로 자각하고 성경 말씀을 따라 해석하고 움직이는 공동체였다.
 
*우리 더온누리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여야 하는가를 도전하게 하는 동시에 따라야 할 본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부활 공동체이다. 우리 공동체도 말씀의 인도함을 받는 공동체이기를 소망해 본다.
 
    
    
*주님, 주님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에 머물며,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그때 그 사람들의 모습이 감동입니다.
*주님, 우리의 신앙 현장에서도 주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잡는 영적 맷집이 두둑한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주님이 친히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기 위해 세워주신 하나님의 사람들을 존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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