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행 2:1-13]
 – 2024년 05월 03일
– 2024년 05월 03일 –

예수가 하늘로 올라가신 후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은 오순절에 인간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사건을 통해 성령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각 나라의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때마침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천하 각국에 흩어져 살다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이들이 하는 말을 자기 지역의 방언으로 듣고 놀란다.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신 후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의 선물을 보내주셨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언된 바,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요엘 2:28~32)이 종말론적으로 이루어진 초자연적인 사건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은 서사적, 그리고 신학적 상징성을 갖는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가져왔듯, 성령은 예수공동체를 통한 새 시대를 연 것이다. 이제 성령이 주도하시는 교회의 역동적인 구원사역이 시작되었다. 온 열방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1.오순절 성령 강림(1~4절)

다락방에 모였던 백이십 명의 성도들은 오순절에 이르러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 그리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오순절은 구약의 칠칠절(출 23:16_맥추절; 레 23:15~21; 신 16:9~12)을 일컫는 신약의 명칭이다. 보리의 첫 수확을 드리는 초실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1:4~5에서 이미 언급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이 성취된 것이며, 동시에 세례 요한이 내다 본 “성령 세례(눅 3:16)”가 성취된 사건이다. 구약의 이사야 32:15과 요엘 2:28~32 말씀이 성취된 사건이다.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말세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2~3절은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호스페르)’ 소리가 나고 불의 혀’처럼(호세이)’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임하였다고 기록한다. 바람과 불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연상시킨다. 특히 시내 산에 임하신 하나님의 현현을 생각나게 한다. 4절은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과 함께 무형적으로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핌플레미_채우다)을 받고” 에서 나타나듯 모여 함께 기도하던 모든 이들에게 임하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소리”이다. 모두가 듣고 느낄 수 있는 강력한 힘이 하늘로부터 제자들에게 임했다. 이 소리는 금세 볼 수 있는 이미지로 이어져서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신비한 임재의 모습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비교적 구체적으로 서술하는데, 제자들의 눈에는 불줄기가 바람에 마구 갈라지는 것 같았고 이를 ‘불의 혀’에 빗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불의 혀같은 것이 각 사람들 위에 “하나씩” 내려앉은 것이다. 그것이 임하자 성령이 그들의 입술을 주장하시고, 그들이 전혀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두고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1:5).

 

“다른 언어들로(4절)”로 번역된 것은 제자들이 말한 언어가 다른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였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백이십 명이 각각 말하는 언어가 달랐는지, 혹은 그들이 말하는 말이 각각 다른 언어로 들렸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베드로가 14절 이하에서 설교할 때 청중이 모두 이해한 것으로 보면 듣는 이들이 각각 자기 언어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언어(글로사)’로 번역된 단어는 2절의 “불의 혀”에서 “혀”와 동일한 단어이다.

 

존 스토트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단회적 사건으로서 “예수님의 구원 사역 중 재림 이전에 이루어진 마지막 행위”라고 정의한다. 이렇듯 성령강림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활동하는 새 시대를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이후로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시작의 사건이다. 이 사건은 반복과 재현을 기대할 수 없는 특별한 사건이고, 예수님의 성육신이 단회적인 것처럼 성령강림도 그러하다. 또한 이렇게 임한 성령이 각 사람의 혀를 완벽하게 통제하시며 다른 언어를 말하게 하셨는데, 이후에 개인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신 은사로서 주신 방언과는 다르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각 사람이 말한 것은 분명 “다른 언어”였고 그 언어 사용자만이 알아들을 수 있었던 “살아있는 말”이었다.

 

창 11:9의 바벨탑 사건을 통해 인간의 언어를 흩어버리심으로 심판하신 것과 대조하여 예수 공동체의 입술을 통해 다양한 언어로 다양한 나라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온 인류를 하나로 묶으실 것을 미리 보여 주신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2.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반응(5~13절)

오순절 무렵에는 이미 유월절부터 예루살렘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 “천하 각국”에 흩어져 있던 경건한 디아스포라 유대인 순례객이 머물고 있었다. 당시 디아스포아 유대인들의 관습이기도 했지만, 유월절에서부터 오순절까지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행하실지 기대하며 장기 체류하는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다. 거리를 지나가다 자기가 온 곳의 말소리가 들리며 자연스레 제자들이 모여 있던 다락방으로 모여든 것이다. 즉, 성령이 제자들로 말하게 하실 때 그 큰 소리에 이끌려 그 집으로 디아스포아 유대인들이 몰려든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각각 자기들의 언어로 말함을 듣고 모두 아연실색하였다. 제자들이 각기 다른 언어를 말할 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각각 자기의 언어로 말하는 제자들 앞으로 이끌렸던 것이다.

 

그러면서 두 가지에 놀란다. 먼저 자신들의 모국어로 말하는 것에 놀랐고, 그들이 말하는 내용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먼저 각각 자기들의 모국어를 말하는 제자들을 보며 어안이 벙벙해진다. 그들은 제자들을 보고 그들의 발음과 억양 때문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을 반박에 알아차린다. 대개 말하는 어투를 가지고 갈릴리 출신 이라고 판단하는 이들의 마음속에는 배우지 못한 자들이라는 경멸이 다분히 섞여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본문은 갈릴리 출신이라면 할 수 없는 제자들의 모국어 구사에 충격을 받은 듯하다. 그리고 누가는 “각 사람이 난 곳”이 어디인지를 밝혔다. 총 열 여섯 개의 지명을 기록하였다(7~11절).

 

그러나 이 지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각 출신 지역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들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11절). 9~11절에 등장하는 지역들은 그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나라들이었다. 경건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고대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졌다.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지는 않으나 “하나님의 큰 일”은 그들에게 가장 큰 축복, 복된 소식이었다. 복음이 복음을 필요로 하는 자들의 언어로 들려졌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강림의 본질이다.

 

하지만 모두가 놀라고 당황한 것은 아니다. 일부는 ‘새 술에 취했다’며 조롱한다. 성령 충만했던 제자들을 술에 충만한 것으로 치부한다. 이런 모습은 장차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때 복음을 듣는 자들의 두 가지 반응을 미리 보여주는 듯하다. 복음을 듣고 반응하여 하나님의 큰일에 엎드리어 구원을 받을 사람과 그것을 하찮게 여기며 조롱하여 심판을 받을 자들이 공존 할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인종과 나라와 언어의 거대한 장벽을 넘어 장차 온 열방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듣게 될 것이라는 청사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누가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사는 여러 지역을 언급하면서 이들이 성령 강림을 목격하고 각각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큰 일”을 알렸음을 암시하려 했을 것이다.

 

 

 

나는?

-오순절은 전통적으로 율법 수여와 언약 회복을 기념하는 날로 지켰다. 포도의 첫 열매를 수확하는 절기여서 초실절, 수장절이라고도 부렸다. 이 절기에 주님은 ‘아버지가 약속한 것’을 기도로 기다린 백이십 명의 성도들을 성령의 첫 열매로 삼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현현하셔서 이스라엘 백성과 첫 언약을 맺으실 때처럼(출 19:16~20),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하여 그들을 개 이스라엘로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삼으셨다.

 

-그들은 “다” 받았고, “각각” 받았다. 이를 보면 복음의 증인은 무엇보다 성령의 사람,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인 것이 확실하다. 이후로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주로 영접하는 모든 이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다.

 

-성령 충만을 받은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각 세상의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절기를 지키려고 천하 각국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인 유대인과 개종한 이방인들이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이 자기들 지역의 언어로 말하는 것에 깜짝 놀란다. 이것은 성령이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유대 땅의 경계를 넘어 땅 끝까지 전파될 것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 흩어진 언어가 성령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일’을 증거하게 하기 위해 역사하게 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바벨의 사람들은 스스로 모여 자기 이름을 내려 하였고, 결국 하늘까지 닿는 대를 쌓다가 다양한 언어로 흩어지게 되었으나 성령의 사람은 이런 탐욕의 소통이 아닌 하나님 나라 복음이라는 사랑의 소통을 하는 사람들임을 보여준다. 그들은 교만과 자기주장의 탐욕이 담긴 언어가 아니라 오직 예수께서 자기 안에서 왕 노릇 하시도록 자기를 부인하며 성령의 술에 취하여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경계를 순식간에 넘어섰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할 것도 없이 “성령”이다.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는 세상과 확연하게 구별된다. 다른 말을 하고 다른 일을 하며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변화된 삶을 드러낸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자, 불편하기도 하고 거북스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쉽게 정죄할 수도 없는 삶을 살아낸다.

 

-교회는 성령의 첫 열매 공동체이다. 이는 곧 하나님 나라 복음의 증인된 공동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교회는 오롯이 이 복음을 증언하고 복음의 삶을 살아내는 증인으로 세상 속에 존재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 복음의 증인된 교회는 성령으로 소통하는 공동체이다. 제자들은 갈릴리 사람들이었지만 성령의 역사로 지역의 경계를 언어로서 넘어선다. 성령을 통해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천하 각국의 언어로 들려졌다. 매우 시사한 바가 크다. 교회는 갈등하고 분열하며 파괴하는 바벨의 언어가 아니라 하나 되게 하는 성령이 언어로 소통하는 나라이다. 나의 언어가 바벨의 언어보다 성령의 언어이기를 간절히 추구해 본다.

 

-또한 바벨의 사람들은 욕망과 탐욕에 취한 자들로 심판을 받았지만, 성령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안에서 오아 노릇 하시도록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다.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바벨의 언어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격려의 말로 소통하는 사람이다. 바벨의 언어에 취해 사는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교회는 성령에 사로잡혀 세상이 알아듣는 소리로 말해야 하지만, 동시에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하나님 나라)를 말해야 한다. 세상과 소통하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동시에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세상을 말해야 한다. 성령의 권능이 있을 때 가능하다.

 

-한편 성령이 임한 제자들이 성령으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증거하고 증언하여도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사람이 가진 죄성과 죄악이 그만큼 끈질기다. 기억해야 한다 성령의 임재는 구원의 완성이 아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반역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인것도 놓치면 안 된다. 그래서 복음 증거는 계속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백이십 명의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한 마음으로 기도하여 이루어진 결론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새로운 시작이다.

 

 

*하나님 나라 진행 방식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반드시 이유가 있다. 출애굽 때 일어난 열 가지 재앙은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준 것으로 이 사건을 통해 애굽에는 경고와 심판을, 이스라엘에게는 보호와 은총의 메시지를 보여 주셨다. 흔히 제 2의 출애굽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 사건과 부활, 그리고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하나님의 임재와 새로운 질서의 시작을 보여주신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부재에 목말랐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촉발된 성령 강림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준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시작된 교회는 지금까지 인류가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전혀 새로운 질서를 여는 시발점이 되었다. 첫 출애굽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형성 되었다면 두 번째 출애굽을 통해서는 이방인을 포함하는 구원공동체인 교회가 출발하게 된 것이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을 초월한 공동체인 교회,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질서를 세상 속에서 보여주어야 할 교회, 그 걸음은 성령에 사로잡혀야 오롯이 드러내고 증거하며 감당하여 살아낼 수 있다.

 

*그런데 한 단어가 폐부를 찌른다. “그런데 더러는 조롱하면서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새번역_13절).” “조롱”이다. 그때 사람들 중에 거룩하신 성령이 임하여 성령으로 증언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들으며 “조롱”했다. 그런데 지금은 성령에 취해 있는 교회를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곳보다 세속화되어버린 교회를 조롱한다. 이미 세상보다 더 악한 교회가 된 교회가 꽤 많은데, 여전히 뻔뻔스럽게도 하나님 나라를 외치는 교회를 향하여 조롱한다.

 

*성령 강림의 놀라운 역사를 묵상하는 본문에서 “조롱”이라는 단어가 더 마음을 때리는 이 참담한 오늘이 괴롭기만 하다. 세상의 조롱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온누리공동체는 그의 나라와 의를 오롯이 추구할 지혜와 용기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 이미 임한 성령 안에서 더욱 하나님 나라 복음의 거룩함으로 살아낼 용기를 주십시오.

*주님, 말과 행동이 달라서 조롱받기보다 말과 행동이 일치되어 조롱받다가 다시 오실 주님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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