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스데반의 설교_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행 7:37-53]
 – 2024년 05월 15일
– 2024년 05월 15일 –
스데반은 모세 이야기를 계속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전해준 모세를 거부하고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을 숭배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외면하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심판을 예고하셨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과 무지를 책망한다.
    
스데반은 자기 자신을 변호할 기회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범한 우상숭배와 성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데 변론의 초점을 맞춘다. 스데반의 연설은 당시 유대인들의 역사 회고 방식을 충실하게 따른다. 하지만 내용 면에서는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고정 관념을 비판하고 회개를 촉구한다. 스데반은 족장 이야기와 모세의 처음 두 번의 40년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후의 역사(광야 시대부터 왕조 시대까지)는 줄곧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채운다. 자신이 고발당한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에 대한 변론이 아닌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너희가 예수를 죽인 살인자”라며 거침없이 고발한다.
    
    
    
1. 모세의 이야기_시내산에서 불순종과 하나님의 심판(37~43절)
스데반은 모세가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홍해와 광야에서 40년간 많은 기적을 행했다고 말한다. 특히 신 18:15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고 말한다. “나와 같은”의 의미는 “나를 보내신 것처럼”이다. 당시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이 신명기의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깨달았다(행 3:22). 스데반이 이 신명기 본문을 인용한 이유는 “이 사람”(모세)이 하나님께서 자기와 같은 선지자가 장차 올 것임을 이미 예언한 자임을 청중에게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모세는 예수의 모형으로 그려진다. 스데반은 모세가 광야의 회중 가운데서 “살아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준 자”라는 것을 강조한다. 살아있는 말씀은 ‘율법’을 가리키며 ‘우리에게 준’은 이스라엘 백성의 특권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아야 할 의무가 주어진 것이다.
    
39절부터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에 관해 이야기한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그 율법을 준수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정반대의 길을 갔다. 그들은 모세를 거부하고 그들의 마음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섰다. 더 나아가 아론에게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송아지 우상 앞에 제사를 드리고 만다. 이와 같은 사실은 스데반의 연설을 듣고 있는 청중에게도 큰 의미를 가져다준다. 이것은 정작 스데반을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 자라고 날 선 비판을 퍼붓고 있는 자신들도 처음부터 율법을 거스르고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리기를 거부했던 그들의 후손이라는 의미이다.
    
42~43절은 아모스 5:25~27을 인용했다. 금송아지에게 제사하고 기뻐하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외면하시고, 계속해서 그들이 우상숭배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셨다(42절).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돌아섰기에 하나님도 그들을 내버려 두시고 우상숭배의 쓴맛을 보게 하신 것이다. 스데반이 이를 통해 비판하려는 것은 구약 선지자들이 지적한바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참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우상을 숭배하였다는 사실이다. 우상숭배에 대해 이미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다(대하 33:3, 5; 렘 8:2). 스데반은 이 모든 것들은 ‘선지자들의 책(열두 소선지서)’에 예언대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이렇게 아모스를 인용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신들을 섬기도록 하나님이 내버려 두셨다는 사실(42a 절) 을 뒷받침하기보다 광야에서부터 우상숭배에 빠졌었다는 것(41절)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43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앗수르 신들을 섬기기 위해 만든 형상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이방신들을 섬김으로 결국 타국에 포로 잡혀가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음을 상기시킨 것이다.
    
    
    
2. 장막과 성전(44~50절)
44절부터는 다시 모세 시대에 관한 이야기로 되돌아온다. 이스라엘 백성이 후대에 와서 몰록의 장막을 섬겼으나 광야에서는 모세의 지시와 양식에 따라 증거의 장막을 가지고 있었다. 이 장막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고, 광에서 갈 길을 몰라 유리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였다. 이 장막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했던 이동식 예배 장소이기도 했다. 후손들은 여호수아 시절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도 이 장막을 가지고 들어갔다. 또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와서 자신이 세운 장막에 두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다윗은 통일왕국의 왕이 되었고 하나님을 예배할 처소를 마련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그 후 솔로몬은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건축했다. 그런데 스데반은 48절에서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는다”라고 선언한다. “손으로 지은(케이로포이에토이스)”으로 번역된 단어는 구약에서 종종 우상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뉘앙스의 단어이다(참고_ 사 19:1; 21:9). 스데반이 이 단어를 성전에 적용한 것은 그의 연설을 듣는 유대인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한편 스데반은 이런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사야 66:1~2절을 인용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우상처럼 성전 안에 국한되어 계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의 거하심은 사람의 생각과 관념으로 측량되거나 제한되지 않는다. 성전을 지은 솔로몬 자신도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까(왕상 8:27)”라고 고백한 바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3. 스데반의 책망(51~53절)
51절부터 스데반은 강하게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를 그대로 답습해 온 청중을 향해 공격을 퍼붓는다. 스데반은 구약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불순종의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던 구약의 표현을 공회의 청중들에게 사용한다. “목이 곧고(출 33:3)”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렘 6:10)”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 조상들의 잘못과 과오로 얼룩진 역사를 지금 다시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52절의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과거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들을 죽임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했듯이, 당대의 유대인들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인들에게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귀하게 여기던 율법을 받고도 그 말씀을 지키지 않은 것이 되어 버렸다(52~53절)는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배반의 역사였다. 반면에 하나님의 역사는 신실하심 그 자체이다. 이스라엘 조상들은 모세와 율법을 욕보였다. 광야에서 조금만 어려워도 구원을 멸시하고 애굽을 그리워했고, 황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제사하기도 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아모스가 지적한 대로(암 7:42~43) 우상에게 제사하는 데 열중하면서도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은 소홀히 하다가 결국 멸망하여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
    
-이스라엘 역사는 철저하게 우상숭배의 역사였다. 심판과 기다림으로 언약을 이어오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애(헤세드)를 보여주는 역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기다림과 인애와 신실함의 절정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아들마저 죽여서 자신들이 완악함을 입증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까지 성막에 거하신 하나님이시다. 다윗이 성전 짓기를 청했으나 아들 솔로몬에게 맡기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람이 지은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다. 광야든 가나안이든 애굽이든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임재하여 거룩한 땅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간과하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고 충성하는 거룩한 성도들 아니겠는가! 우리 더온누리교회 공동체가 그런 거룩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기를 소망한다.
    
-율법과 성전을 거스른 것은 스데반이 아니라 그를 정죄한 유대인들이었다. 선지자를 박해한 조상들처럼 그 선지자들이 전한 의인 예수를 잡아주고 살인하였기 때문이다. 율법을 수호하고 소유하려고 했지만 정작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 성전을 자랑했지만, 그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고 참 성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격하고 말았다. 공회원들과 유대 백성들은 남의 허물을 지적하기 전에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했다.
    
    
*모세를 통해,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와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성취하실 것을 보여주셨다(37~40절). 모세는 오래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자기와 같은 선지자가 올 것을 예언했었다(신 18:15). 그래서 후손에게 그의 말을 들어야 산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모세가 하나님께 받아 전한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한 것처럼, 지금 예수님께도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다고 스데반은 강변한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수많은 선지자를 통해,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나는 어떻게 반응하고 순종하고 있는가?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숭배하는 자를 심판하셔서 우상을 섬기며 살도록 내버려 두셨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사는 자들을 하나님도 외면하시고 그들의 삶을 포로 생활로 내모셨다(41~43절). 혹시 하나님 아닌 것을 향해 절하고 있다면 그 자체가 형벌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얼굴을 돌이키시기 전에, 속히 우리 얼굴을 우상과 세상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향해야 하지 않을까?
    
*모세의 가르침에 불순종한 이스라엘의 결국은 우상 숭배자로 전락하는 것뿐이다(39~43절). 우리도 역시 말씀을 떠날 때, 말씀에 순종하기를 기뻐하지 않을 때, 그만큼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소홀히 하고 다른 예배 대상을 찾게 될 것이다. 결국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는 삶이 내 삶을 우상에게서 지켜주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44~50절). 하늘을 보좌 삼고 땅을 발판 삼아 우주 전체를 다스리시는 창조주이시다. 그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이 지은 건물에 제한적으로 갇혀 계실 수 있겠는가? 아무리 크고 화려한 성전일지라도 영광의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없다. 하나님이 친히 모세에게 가르쳐 주시며 만들게 하신 증거의 장막이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이 준비하고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가두어 놓으려고 했다. 스데반은 성전과 하나님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생각과 태도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혹시 나의 마음에도 위풍 있는 교회당 건물이나 종교 생활 자체를 우상시하는 그릇된 태도는 없을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내 생각으로 제한하지 않도록 더욱 깊이 있는 말씀 묵상을 해야 하겠다.
    
*스데반은 또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조상들의 죄가 얼마나 반복적으로 오래 지속되었는지 증거한 후에 지금 종교 지도자들의 죄 역시 조상들과 같은 선상에 있음을 고발한다(51절). 그들도 조상들과 똑같이 줄곧 성령을 대적하는 악한 세대라는 것이다. 조상들의 죄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멈추지 않고 있자는 스데반의 날카롭고 강렬한 지적은 오늘 나에게도, 우리 공동체에도 새겨들어야 할 경고가 아닐까!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조상들이 한 그대로 당신들도 하고 있습니다(새번역_51절).”
    
*이스라엘 조상들은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다(52~53절). 예수님과 스데반 시대에는 종교 지도자들이 그러했다. 우리는 이 불순종의 거역하는 마음과 태도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서는 안 되겠다. 믿음과 순종의 역사를 내가 먼저 살아내고 우리의 자녀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하겠다.
    
    
    
*주님,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순종하며 살지 않는 것이 곧 불순종의 삶인 것을 기억하겠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공동체로 다듬겠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말씀을 즐겁게 받고 순종하겠습니다. 어디든지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의식하고 신뢰하며 말씀 따라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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