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교회를 잔멸(殘滅)하던 삶에서 세우는 삶으로 [행 9:1-19a]
 – 2024년 05월 19일
– 2024년 05월 19일 –
사울은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살기등등하게 다메섹 원정에 올랐다.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오기 위함이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갑자기 하늘로부터 비추는 강한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가 박해하러 간 사람들이 섬기는 부활하신 예수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동행하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간 바울은 사흘간 앞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게 된다. 한편 다메섹에 살고 있는 아나니아에게 주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신다. 그에게 환상을 통해 사울을 만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알려 주신다. 사울의 과거 이력에 대해 알게 되고 불안해하는 그에게 주님은 그가 복음을 위해 선택된 사람임을 알려 주신다. 사울은 아나니아의 도움으로 건강을 다시 회복한다.
   
사울이 회심하고 소명을 받은 사건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이다. ‘누가’는 이 사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사도행전에 사울의 회심과 소명 이야기를 세 번에 걸쳐 소개한다. 본문에서는 삼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22장과 26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의 유대인 청중에게(22장), 그리고 헤롯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일인칭으로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는 형식이었다.
   
사울의 회심과 소명 이야기는 종종 이스라엘 선지자들의 소명 이야기와 비교되곤 한다(왕상 22:19~22; 사 6:1~10; 렘 1:4~10). 그러나 사울의 이야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구약의 소명 이야기는 선지자들이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사울의 회심 이야기는 한 사람의 삶의 방식이 완전히 뒤바뀌는 사건으로 주목받는다. ‘누가’는 사도행전 후반부에서 예수의 이름을 이방인에게 전하기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이야기를 꼼꼼하게 풀어놓는다.
   
   
   
1. 붙잡으러 갔다가 붙잡히다(1~9절).
‘누가’는 이미 사도행전 8:3에서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을 박해하던 사울의 모습을 간략하게 언급하였다. 사울은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기 위해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오기 위해 대제사장의 편지를 받아 들고 다메섹으로 향했다. 당시 대제사장은 가야바(주후 18~37년)였고, 이 편지는 다메섹에서 사울의 활동을 허락하는 공식 문서였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로마 당국은 산헤드린 공회의 수장인 대제사장에게 탈주범을 추적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누가’는 이를 기초로 흩어진 신자들이 다메섹에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에 있고 그들을 송환할 수 있는 권한이 대제사장에 있음을 전제한다. 다메섹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242km 떨어진 수리아 지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누가’는 2절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그 도(헤 호도스)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다. ‘그 도’란 직역하면 ‘그 길’이다. 어떤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이 도에 속한 자’ 혹은 ‘이 도를 따르는 자’로 불렀다. 사도행전에서도 ‘그 도(19:9, 23; 22:4; 24:14, 22)’, ‘주의 도(18:25~26)’, ‘구원의 길(16:17)’이라고 불렀다. 이는 초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함의되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에 기독교의 참된 진리가 있음을 이해하였다. 믿음과 삶이 따로 분리될 수 없는 “믿음의 삶”을 좇았다.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3절)”을 보고 “음성(4절)”을 듣게 된다. 사울이 경험한 이 현상에 대해 행 22:6은 ‘하늘로부터 큰 빛’, 26:13은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라고 회상했다. 행 9:3, 22:6은 이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었다’라고 말하고 26:13은 같이 가던 동행자들도 비췄다고 기록한다. 음성을 들은 것도 4절은 사울만 들었다고 기록하지만, 7절은 같이 가던 자들도 들었다고 말하고 22:9는 동행자들은 듣지 못했다고 말하며, 26:14는 사울만 들었다고 기록한다. 문학적인 표현이 서로 달라 사울의 회심 장면을 표현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이것은 누가가 사용한 “소리”라는 헬라어 “포네”의 의미를 이해하면 된다. ‘포네’는 단순히 귀에 들리는 ‘소리’의 의미도 있지만, “사람이 말하는 음성” 혹은 “말”의 의미도 있다. 즉, 다메섹으로 가던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소리’를 모두 들었겠지만 그 ‘소리’ 혹은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사울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빛이 비치고 음성이 들렸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실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바로 빛과 음성이다. 밝은 빛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기에 그 빛을 보고 눈이 멀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밝은 빛을 보고 땅에 엎드린 사울은 하늘로부터 음성을 들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부활하신 예수의 음성이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나중에 아그립바 왕 앞에서 주님은 자기에게 아람어로 말씀하셨다고 고백한다(26:14). 사울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음성을 듣고 놀라 엉겁결에 되묻는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하늘에서 예수의 답변이 들려왔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 순간 사울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살아계심을 깨닫게 되고 그를 직접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충격적인 만남의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극적인 만남을 통해 매우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사울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애써왔다. 그런데 그 과거의 열심과 삶이 전적으로 잘못되었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것임을 뼈아프게 깨달았을 것이다. 사울은 이후 이 순간을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내게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갈 1:16)”라고 회고한다. 그리고 자기가 박해하던 그리스도가 부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살아계심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전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단순히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것이 예수를 박해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7절은 이 사건이 사울뿐 아니라 그와 동행하던 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적이었음을 보여준다. 26장에서는 더 밝은 빛이 비치므로 그들도 땅에 엎드러졌다고 말한다. 그런데 본문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울은 더 큰 충격을 받았고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다메섹에 도착하였다.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고 금식했다. 예수를 정면으로 대적하였던 자기 행동을 회개하는 것과 함께 예수의 빛과 음성을 들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것이다.
   
   
   
2. 아나니아의 순종_사울이 시력과 건강을 회복하다(10~19a 절)
사울을 만나주신 주님은 이제 그를 부르셔서 소명을 주시기 위한 다음 단계를 진행하신다. 주님이 환상 중에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시고, 한편 금식하고 기도하던 사울에게도 환산 중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신다. 쌍방에게 환상으로 말씀해 주시는데,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와 베드로에게도 이처럼 쌍방환상을 통해 말씀하셨다.
   
아나니아는 “주의 제자”로 소개되고, 다메섹에 거주하는 유대인으로서 이미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누가’는 행 22:12을 통해 아나니아가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에게 칭찬을 듣는 자’라고 소개한다. 주님은 환상 가운데서 아나니아가 해야 할 일을 상세하게 알려 주신다. *찾아가야 할 집 주인의 이름과 그 집이 위치한 거리 이름, 찾아가 만나면 사울이 하고 있을 일과, 사울이 기도하는 중에 보게 될 환상의 내용까지 모두 세밀하게 알려 주신다.
   
주님을 극적으로 만나는 사건과 관련하여 사울은 세 번의 환상을 통해 계시받는다. 사도행전 9:4~6, 11~12, 22:17~21이다. 사울에 대한 소문은 이미 아나니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이미 예수를 따르는 신자들에게 얼마나 해를 많이 가했으며, 무슨 목적으로 다메섹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을 것이다(13~14절). 이것이 아나니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저한 이유일 것이다. 누구라도 환난과 핍박 중에서는 이렇게 반응할 것이다.
   
그렇게 주저하는 아나니아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15~16절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주님은 아나니아의 입을 통해 앞으로 사울을 자기 종으로 부르셔서 어떤 심오한 뜻을 펼쳐 나가실지 보여주신다. ‘누가’는 이후 이야기를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직접 말해 주는 방식으로 기록한다(행 22:14~16). *부활하신 주님은 이미 다소 사람 사울을 눈여겨보셨고, 그에게 주실 어떤 위대한 사명을 이미 계획하신 것이다.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철저하게 박해한 “전과”를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은 개의치 않으셨다. 사울은 예수의 이름을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파하는 사명을 받았다. 그의 사명은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이방인”이 전도 목록에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은 그가 이방인의 사도가 될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고,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라는 표현은 앞으로 그의 복음 전도사역이 그리 수월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이 환상으로 보여준 지시를 따라 “직가(곧은 길)”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간다. 불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유다의 집에 들어간 아나니아는 주님의 지시에 따라 사울에게 안수한다(12절). 아나니아는 사울을 “형제 사울아”라고 부른다. “형제”라는 호칭은 당시 예수 믿는 자를 부르는 호칭이다. 사울을 만난 아나니아는 다메섹 도상에서 친히 나타나셔서 사울을 만나주신 예수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예수가 사울의 시력을 다시 회복시키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려고 자기를 보내셨음을 전한다. 그러자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누가’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사울은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독특한 것은 아나니아가 세례를 베푼 것으로 보면 세례가 사도들에 의해서만 행해진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한 사건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사건을 사울의 “개종”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사울의 삶의 방향이 전적으로 바뀐 것은 확실하다. 그는 지금 새로운 인생의 출발선상에 선 것이다.
   
   
   
나는?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저주받은 자로 여겼던 사울은 그 도를 따르는 이들을 척결하려고 유대인 밀집 지역인 다메섹으로 가는 중이었다. 스데반의 죽음에 관여했을 때처럼 진리를 향한 바리새적인 열심이 그에게 있었지만, 그는 철저하게 예수를 오해하고 있었다. *예수님과 성경을 모르는 이들의 지나친 열심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까지도 파괴할 수 있음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사울의 모습이다.
   
-그런 사울의 잘못될 열정의 질주를 예수님이 친히 막아주신다. 부활하신 주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 빛과 소리로 나타나셨다. 오만하기만 한 그의 거칠 것 없는 질주를 중단시키셨다. 그의 옛 자아, 옛 관점, 옛 신학을 분쇄해 버리신다. 그를 통째로 뒤흔들고 깨뜨리고 뒤엎은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한 충돌과 그로 인한 거룩한 좌절의 순간이었다. 이 전복이 없고서야 참 구원은 없다.
   
-자기 신학과 확신에 가득한 사울이 하늘의 빛에 의해 눈이 멀어 사람의 손에 끌려가는 신세로 전락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한 채 기도하던 다메섹에서 삼 일은 하나님의 창조를 기다리던 태초의 혼돈과도 같았다. 이것은 예수와 하나님 나라와 성경을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거룩한 어둠이요 창조적인 혼돈이었다.
   
-하나님은 사울의 눈을 직접 여실 수 있었지만, 믿음의 사람 아나니아를 보내어 눈을 뜨게 하신다. 이는 그가 눈을 뜨는 것보다 우선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나니아를 통해 그를 성도의 공동체에 편입시키고, 공동체의 인증을 받고, 공동체의 도움으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려는 배려였다. 제아무리 유능한 사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교회 지지와 도움과 기도가 없이는 이방인 사도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나니아 핍박자로만 기억하던 사울이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소개하셨다. 회심이 무엇일까? 회심은 곧 다른 삶으로 부르심이다. 다른 사명을 위임받는 사건이다. 단지 개인적인 불행이 행복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주인이 바뀌는 문제이고 인생의 목표가 바뀌는 문제이다. 그릇의 주인이 바뀌는 문제이다. 그렇기에 아나니아는 박해자, 핍박자였던 사울이 주권자 하나님의 그릇으로 새롭게 변화된 것을 인정해야 했고, 사울은 이제 그 주인이 부여하신 사명을 수용해야 했다. 사울은 하나님의 그릇이 되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 앞으로 주와 복음을 위해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인지를 사울보다 먼저 보아 알게 되었다. 고난의 순간에 바울은 스데반의 기도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그의 기도가 응답하여 사울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 이제 그는 스데반을 대신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받으면서 그 스데반이 전했던 예수를 전하는 자가 될 것이다. 이제 아나니아에게 사울은 자신을 핍박할 자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핍박을 받는 자로서, 자신이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기도해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1~3절 “빛”
주님의 제자들을 사로잡으려고 살기를 내뿜으며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을 강력한 빛으로 사로잡으셨다. 이 빛은 영광스러운 예수님에게서 반사되는 빛으로, 예수께 나오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빛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빛으로 지금까지 어둠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었던 사울을 사로잡아 이 영광의 빛을 만방에 전하는 빛의 사도로 삼으셨다. 이 빛에 오늘 우리도 사로잡히기를 간절히 바란다.
   
*4절 “거듭거듭 사울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
갑자기 하늘에서 비친 빛 때문에 땅에 엎드러진 사울의 이름을, 주님은 두 번 거듭 부르셨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신 것은, 부르심의 긴박함과 함께 부름을 받은 대상과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준다(창 22:11; 46:2; 출 3:4; 삼상 3:10). 사울을 긴급하게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4~5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영광스러운 빛으로 임하신 분의 존재를 묻는 사울의 질문에 주님은 자신의 신분을 사울이 핍박하고 있는 예수라고 밝히신다. 이는 사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는 답변이었다. 그에게는 빛 가운데 계신 분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나사렛 예수가 바로 그런 존재라는 사살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깨달음이 사울의 일생을 완전히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계시의 말씀으로 우리의 전인격을 변화시키시는 분이시다. *말씀이 내 영혼을 환하게 비추는 은혜가 마르지 않기를 바란다.
   
*6~9절 “삼 일의 암흑, 금식”
초자연적인 빛과 소리를 경험한 사울은 삼 일 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이 기간에 무엇을 했을지 ‘누가’는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기간에 사울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회개하며, 장차 어떤 모습으로 자신이 만난 주님을 증거하며 살아야 할지 묵상하지 않았을까? *요즘 우리에게도 이런 특별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나님께 집중하며 하나님께 지나온 삶과 나아가야 할 삶을 집중할 시간을 꼭 가져봐야 하지 않겠는가?
   
*10~14절 “아나니아에게 사울이라는 사람”
환상을 통해 아나니아와 사울이 만나도록 준비해 주신다. 사울은 기도 중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올 것을 보았고, 아나니아도 환상을 통해 그가 사울에게 가야 할 이유를 깨닫게 하신다. 아나니아와 사울은 서로 만날 수 없는 관계지만,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셔서 놀라운 만남을 이루게 된 것이다. 특히나 주님의 제자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만난다는 것은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을 만큼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만나기 싫어하는 사람,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나게 하셔서 놀라운 역사를 이뤄가신다. *내 생각과 판단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15~16절 “그는 나의 그릇이라”
유대인의 계명에 충실하던 사울을 들어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하시고, 주님의 이름을 핍박하던 그를 주님의 이름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는 자로 변화시켜 주신다. 그리스도인을 미워하던 자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로 삼으신 것이다. 내 주변에 주님을 미워하는 자가 보이는가? 하나님이 그를 변화시켜 새로운 길로 이끄실 것을 기대해야 한다.
   
*17~19a 절 “순종하기 힘들지만, 기꺼이 순종한”
순종하기 힘든 말씀을 기꺼이 받들어 섬긴 아나니아의 사역을 통해, 기독교 역사의 위대한 복음 전도자를 세우신다. 아나니아의 섬김으로 사울이 시력을 되찾고, 세례를 받아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강력한 복음 전파자의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길을 나선 이들을 통해, 세상을 온전케 하는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신다. 그 선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주님, 사울이 빛 가운데 들어왔습니다. 빛을 깨뜨리는 삶에서 빛을 비추는 삶으로 새롭게 되었습니다. 저도 어둠을 쫓던 삶에서 빛을 전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참 빛 되신 주님을 전하기 위해 늘 참 빛 가운데 살겠습니다.
*주님, 아나니아의 용기 있는 순종을 본받습니다. 어려워도 주저되어도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순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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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나병 환자 넷을 이용하여 사마리아를 전쟁과 기근에서 구하신다. 이로써 엘리사를 통해 예고하신 말씀을 성취하신다. 아람의 군사들은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큰 군대의 소리를 듣고 도망갔다. 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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