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복음의 능력, 거부하거나 기쁨이 넘치거나…. [행 13:32-52]
 – 2024년 05월 30일
– 2024년 05월 30일 –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확고히 증언하기 위해 다윗과 관련한 세 구절(시편 2:7; 16:10; 사55:3)을 인용한다. 조상들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이었는지를 유대인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설명한다. 동시에 바울은 약속의 성취로 오신 예수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죽였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시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셨다고 선포한다. 바울은 청중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다시 돌이키도록 도전한다.
    
바울이 사용하는 구약의 구절들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유대인들이 깨닫기를 원했다(시 2:7). 이사야 55:3은 이 모든 것이 다윗과의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언약적인 신실하심을 알게 한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이미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따라 일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전혀 그 약속을 기억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이 유효하다고 말한다. 이제 이스라엘이 그 도전에 반응해야 할 때다.
    
    
바울의 설교는 많은 사람의 영적 호기심을 자극하여 비시디아 안디옥의 시민들 대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유대인들의 시기와 질투를 자아냈다. 바울과 바나바는 담대히 복음을 전하여 이방인 회심자들을 얻는다. 유대인들의 비방은 박해로 발전하였고,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그 지역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위축되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옮겨 복음을 전한다.
    
유대인과 하나님 경외자들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그다지 적대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반 이방인들이 회심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자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시기하고 비방하고 박해하기 이른다. 이 단락은 하나님의 복음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로 확장되었는지 알려준다. 참된 회심의 걸림돌이 무엇인지도 보여준다. 메시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죄악은 교만과 무지에서 비롯한 참혹한 결과였다. 마찬가지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배척하는 사람들의 문제도 교만과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 분류되었던 이들이 합세하였다.
    
    
    
1.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바울의 설교(32~43절)
바울이 전한 복음은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32절)”이다. “전파하노니(유앙겔리조메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복음(기쁜 소식)을 뜻하는 “유앙겔리온”에서 파생되었다. 다른 번역본에서는 “기쁜 소식”으로 번역했다. 바울은 그 약속이 무엇이었는지, 또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33~37절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16~31절에서 이미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주어졌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선포한 바울은 이 약속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는 사실을 전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구약 성경에서 세 개의 구절들(시 2:7; 16:10; 사 55:3)을 인용한다.
    
그 가운데 시편 2:7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약속을, 나머지 두 구절은 예수님의 부활 약속을 나타낸다. 바울은 메시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의 부활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설교한다. 바울 설교의 핵심은 “예수의 부활”이었다. 그 어떤 것보다 놀라운 약속의 성취가 부활이라고 바울은 생각한 것이다.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셨을 뿐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린 그 하나님을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겠냐고 도전한다. 적어도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바울은 이 기쁜 소식을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전하기 원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도 있었고, 율법을 지켜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는 그들도 역시 아브라함의 약속에 해당하는 사람들임을 밝힌다(32절).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성취하신 약속의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로 확대될 수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38~41절은 바울이 자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 모두를 복음으로 초대하고 이에 대한 반응들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죄로부터의 자유를 줄 것이다. 율법으로 절망하던 자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소망을 약속한다. 39절은 모세의 율법이 더 이상 사람을 의롭다고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만 의롭게 됨을 명확하게 선언한다. 바울은 하박국의 설교를 인용(합 1:5)하면서 설교를 끝맺는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바벨론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심판하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이는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사람들이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였다(41절). 복음의 초대에는 항상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거절하는 자에게 임할 진노라는 양면성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의 설교에 많은 사람이 반응하였다. 42절은 그들이 다시 설교를 듣기를 원했다며 “청하되(파레칼룬)” 라고 번역했다. 이 단어는 “촉구하다 혹은 강력하게 권한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회중들은 바울의 설교를 진심으로 다시 듣고 싶어 할 정도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깊이 빠져들었다. 심지어는 43절에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는(아코루쎄오)”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따르다로 번역된 단어는 “제자가 스승을 따른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다(마 9:9; 막 1:18; 눅 5:11).
    
바울과 바나바는 청중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기를 권면한다(43절). 이는 그들의 설교 사역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두 사도가 잊지 않았다는 의미다.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설교자들을 종종 위험에 빠뜨린다. 청중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마치 자신의 성공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설교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말씀을 깨닫지도 순종할 수도 없음을 망각하면 안 된다. 또한, 바울과 바나바는 설교를 들은 이들과 “더불어 말하였다.” 즉, 청중들의 질문에 응답한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청중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의 영적 필요를 채우려고 노력했다. *성도들의 영적 궁금증들에 대하여 꾸준하고 따뜻한 태도로 성실하게 대화하는 자세가 오늘날의 목회자들에게도 필요하다.
    
또 주목해야 할 것은 바나바의 헌신이다. 설교는 바울이 했고 청중들의 관심도 바울에게 집중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청중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두 사람이 같이한다. 어느 순간 바울의 일행 중 한 사람으로 격하되어 버린 듯한 바나바였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기꺼이 동역한다. 기억해야 한다. 누가 주목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2. 유대인들의 변론과 추방(44~52절)
비시디아 안디옥의 이방인들 대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회당으로 모였다. 그런데 45절에서 “유대인들(아마도 유대인 지도자들일 것)”이 이 상황이 그들에게 전혀 달갑지 않음을 드러낸다. ‘누가’는 그 이유에 대해 분명하게 기록한다. “유대 사람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심으로 가득 차서, 바울과 바나바가 한 말을 반박하고 비방하였다(새번역_45절).” “가득 차다(에플레스데산)”로 번역된 단어는 사도행전 13:52에서 제자들이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했다고 표현할 때 “충만하다(에플레룬토)”로 번역된 단어와 의미가 매우 유사하다. ‘누가’는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표현할 때 이 두 동사를 함께 사용했다.
    
즉, 유대인 지도자들이 시기로 가득한 모습과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은혜 복음을 받아들인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심한 이방인들이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한 모습을 대조 비교한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세속적인 욕심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한편으로 유대인 지도자들이 시기로 가득 찼다는 것은 그들도 역시 유대교를 전하려는 열심을 가지고 이방인들과 접촉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게 한다. 그런 그들의 눈에 바울과 바나바는 동역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수고하여 얻은 결과를 한순간에 빼앗아 간 자들로 보였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복음을 거부할 뿐 아니라 복음의 걸림돌이 되는 어리석은 길을 선택한다. *열정 자체만으로 모든 것이 정당화되지 않는다. 열심은 있었지만, 그들은 지식이 없어 망하게 되었다(롬 10:2).
    
46~47절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들이 과거 조상들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음을 더욱 단호하고 선명하게 전하는 바울의 모습이 보인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은혜가 복음을 통해 이미 이방인들에게로 확장되었지만 그럼에도 그 복음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신들이 영생을 얻기에 합당치 않은 자들임을 자처하는 것이라고 경고한다(46절). 이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는 47절에서 이사야 49:6을 인용하여 그러므로 이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수혜자가 된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향하게 된 이유가 유대인의 태도에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한편 이사야 49:6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하다. 본문의 상황에서 “이방의 빛”으로 삼은 순종하는 사람은 바울과 바나바이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가로막는 것처럼 보였으나 바울과 바나바의 순종을 통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다.
    
48~49절은 바울과 바나바의 선포에 대해 이방인들이 반응하는 모습이다. 그들의 반응은 유대인들의 반응과 크게 대조가 된다. 그들은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고 회심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주의 말씀은 계속해서 그 지역의 다른 이방인들에게 퍼져 나간다. 복음을 듣고 회심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가! 유대인들의 거절과 시기 속에서도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여셨다.
    
50~52절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자신들만 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까지 멸망으로 인도하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준다. ‘누가’는 그들이 취한 두 가지의 비열하고 어리석은 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먼저 유대인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선동하고 이용한다. “선동하다(파로트뤼난)”로 번역된 단어는 “누군가의 감정을 자극한다”라는 의미다. 이때 진실을 그대로 알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각종 비방과 거짓 정보를 이용하여 지극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방인 귀부인들에게 거짓 정보를 흘리고 그들의 감정을 선동적으로 자극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귀부인들을 이용하여 바울 일행에게 타격을 주려고 한 것이다. 매우 좋지 않은 모습이다. 또한 유대인 지도자들은 ‘행정 관리들’을 움직였다.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지위를 이용하여 행정 관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경건한 귀부인들”의 남편들을 움직여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 한 것이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일어난 종교와 세속 정치의 야합이었다. 영적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세속 지도자들을 이용한 안타까운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들의 비열한 모습에 단호하고도 분명한 태도로 맞선다. 바울과 바나바는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향한다(51절). 그런데도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도록 힘과 은혜를 더하여 주신다! 주목할 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났으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새번역_52절).”라고 증언한다. 복음이 선포된 결과가 기쁨과 담대함인 것을 사도행전 8:8에 이어 다시 한번 입증된다.
 
    
    
나는?
-예수님의 부활은 시편 2편에서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려고 “아들”을 왕으로 세우시겠다는 다윗의 예언을 성취하신 사건이다. 또한 예수의 부활은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다윗에게 약속하신 거룩하고 확실한 축복(사 55:3)’이다. 다윗은 이미 죽었기에, 그가 썩지 않을 거라고 했던 ‘주의 거룩한 자(시 16:10)는 다윗 자신일 수 없고, 분명 죽었으나 썩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다. 부활은 눈속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가 도래하기 위해 꼭 일어나야 할 사건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나의 죄를 대속하신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할 뿐 아니라 부활하여 다스리시는 그분의 통치에 복종하는 자들이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없으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설 수 없다. 예수가 없는 율법은 우리를 정죄할 뿐이며 피의 제사만으로는 우리의 죄를 사하거나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히 9:9). 예수 구속의 은총과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아무도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의의 백성으로 살 수 없다(롬 8:4).
    
-바울은 반역하는 유다를 향해 바벨론을 통한 멸망을 경고하던 하박국의 말씀(합 1:5)을 인용하여 메시아 예수를 거절하여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한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된 자들(합 2:4)만이 구원이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결코 가볍게 들을 만한 말씀이 아니었는데도, 회당의 청중은 바울의 말씀을 달게 받았다. 다음 안식일에도 말씀을 전해 달라고 청하고, 그다음 안식일에도 말씀을 전해 달라고 청한다.
    
-담대하게 있는 그대로 전하는 선교사와 아프더라도 그 말씀을 들으려는 사람들이 비디시아 안디옥의 회당에 모여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럴 때 참다운 하나님의 나라가 선다. 지식 없는 열정, 열정 없는 지식은 모두 열매 없는 사역이 되게 한다.
    
-환영받는 복음, 반대 받는 복음이 교차한다. 유대인의 요청으로 다음 안식일에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러 회당에 간다. 회당에는 이미 안디옥 시민이 거의 다 운집해 있었다. 회당에서 말씀을 들은 이들이 다른 사람들까지 전도하여 데리고 온 것이다. 올곧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 속에 선한 난리, 영적인 소용돌이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일단의 유대인들(아마도 회당 지도자들)은 바울이 전한 말씀 때문이 아니라 바울 일행이 받는 찬사와 인기를 시기하여 반박하고 비방했다. 시기심에 사로잡혀 분별력과 평정심을 잃었다. 복음은 복음 때문이 아니라 많은 다양한 이유로 반대를 받는다. 기억해야 한다. 반대가 곧 복음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복음은 차별 없이 구원을 베푼다. 유대인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영생을 얻을 수 없지만,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면 영생을 주신다. 믿음 없는 선민은 선민이 아니며, 참 선민은 믿음의 열매로 증명된다. 이스라엘의 대표인 고난 받는 종(메시아)을 흑암 중에 구하던 이방인을 위한 빛으로 삼아 그들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이 이제 예수가 성취하신 그 구원을 바울과 바나바 일행을 이방의 빛으로 삼아 땅끝까지 이르게 하신다. 이제는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 부름을 받아 말과 삶을 통해 이 예수를 드러내는 사명을 받았다. 나를 보고 그리스도를 알고 나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동경하고 나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을 붙잡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복음이 쫓겨나지만, 기쁨은 쫓겨나지 않는다. 유대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말씀은 안디옥을 넘어 그 지방에 두루 퍼진다. 결국 바울 일행은 안디옥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 복음을 영접한 제자들은 낙담하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그것은 십자가의 삶을 따르는 일이요. 부활의 승리가 기다리는 일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바울의 설교에 ‘은혜’를 받은 이들도 있지만, 반박하고 비방하는 이들도 있었다. 세상 이치가 그렇다. 환대와 응원을 자랑만 할 것도 아니고, 반박이나 비방에 절망해도 안 될 것이다.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 더욱 “사명”에 집중한다. “이방의 빛”의 역할을 위해 미련을 털어 버리고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나 이고니온으로 향한다. 복음을 전한 이들이나, 복음을 들은 이들이나 반박과 비방 속에서도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칭찬과 격려, 환대와 섬김은 하나님 나라의 바탕이며 기초이다. 복음의 말씀을 받고 기쁨을 누리는 것은 성령의 놀라운 선물이다. 나 자신 뿐 아니라 더온누리공동체가 기쁨과 성령이 가득 차고, 칭찬과 격려, 환대와 섬김이 탄탄한 진실한 공동체를 오늘도 말씀을 의지하여 꿈꾼다.
    
    
    
*주님, 부활하신 주님을 굳게 붙잡고 꿋꿋이 복음의 길을 지켜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고 들은 대로 받아들이는 복음의 역사를 봅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도 말씀 앞에서 이와 같은 영적 몸부림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비열한 종교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기심에 사로잡힌 누구라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더욱 신중하게 목회자의 길을 걷겠습니다.
*주님, 복음으로 인해 쫓겨난 바울 일행이지만, 남겨진 복음은 기쁨이 넘치게 역사함을 봅니다. 복음이 가져온 변화가 우리 공동체에도 기쁨의 열매로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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