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경계를 뚫고, 넘어서는 복음 [요 4:1-14]
 – 2022년 01월 11일
– 2022년 01월 11일 –
예수님의 사역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었다(2절). 예수님의 제자들은 당시 유대사회의 어떤 종교적인 스펙없이 세례를 행하였다. 처음에는 미미했겠지만, 당시 무시못할 열풍을 일으킨 세례 요한보다 더 많은 세례를 베푸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알았다는 소식을 듣고 주님께서는 지체하지 않고 요단강을(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이동하신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종교지도자들 중에서 율법에 더욱 정통했다. 그래서 이단사상이나 자신들과 다른 사상을 가진 이들을 파악하고 판단하는 일을 맡았다. 주님의 사역은 굉장한 열풍을 불러 왔다. 당연히 바리새인들의 검증(?)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세례를 베풀던 요단강가를 떠나 ‘갈릴리’로 이동하실 수 밖에 없었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요 2:4; 7:6, 8; 12:23) 바리새인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가급적 직면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특히 요단강에서의 세례 사역은 주님께서 직접 행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행하였던 파격적인 것이었기에 바리새인들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주님은 서둘러 요단강을 떠나 갈릴리로 가고자 하셨다.

이와같은 상황이라면 보통 유대인들이 유대지역에서 갈릴리를 오갈때 이용하는 요단강 길보다는 바리새인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마리아’ 지역으로 들어가 갈릴리로 가는 것이 최적의 경로였을 것이다. 몰론 해안을 따라 가는 길이나 요단강가를 다라 올라가는 길보다 훨씬 빠른 길이었다. 갈릴리로 빨리 올라 가시려는 마음도 있으셨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이런 이유들 보다 주님께서 사마리아 지역으로 들어가신 이유는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사마리아 지역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셨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검증만 하려하고 주님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러 한계들을 뛰어 넘으신다.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도록 한 것이나, 유대인들은 이용하지 않는 사마리아 길로 갈릴리로 이동하는 것이나, 또 당시 유대인 남자가 이방인 여인에게 말을 거는 것이랄지… 한계의 한계를 넘는 파격적인 행보셨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전통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으신 것이다.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너무 어렵다. 율법의 굴레에 갇힌 바리새인들은 율법 너머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들의 판단으로만 옳고 그름을 결정하려 했다. 자신들이 기준인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행보는 너무도 파격적인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주님의 결정에는 이런 인간이 만들어 놓은 굴레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사마리아라는 천대받는 지역, 한 여인(도무지 설명하기 조차 버거운 기구한 삶의 흔적을 지닌 여인)에게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생수를 길어 주시기 위해 기꺼이 걸음을 떼셨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심(3:16)”을 몸소 보이신다. 이스라엘만을 사랑하는 주님이 아니라 온 세상을 사랑하시는 주님이시다. 가장 가깝지만, 종교적으로 철저히 배척 되던 땅일 지라도 “복음”을 전하는 대상에서 제외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무지하여 스스로 찾아 헤메이던 다시 목마르지 않는 진리의 생수를 길어 주시기 위해 경계를 넘으셨다. 복음은 이렇게 경계를 넘는 것이다. 삶이 늘 목마른 여인에게 생수를 주시기 위해(7절), 사마리아와 유대사이, 수백년동안 지속된 반목을 화해 시키기 위해(9절) 걸음을 떼신 것이다. 마치 하나님과 인류 사이 셀 수 없는 시간동안 반목하는 것을 화해 시키기 위해 직접 화목제물 되시기로 결정하고 이 땅으로 오신 것처럼, 주님은 그렇게 사마리아 땅에 발을 내딛으셨다.


나는?
*교회가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말씀이다. 오늘날
교회는 2천년전 유대사회가 사마리아를 바라보듯,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는지 되짚어 본다.

*종교적 색깔과 사상에 동의하지 않으면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는 이들조차 배척하는 모습들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교회들 간에도 골이 깊게 파였다.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들려주고 보여주어야 할 교회가 “씁쓸함과 고통”을 주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면서 교회 스스로 세상의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윤리 기준보다 못한 옹졸함을 감추지 않는다. 도리어 강요한다. 우리는 회개 했으니 할 일 다했다는 식이다. 사회의 고통과 아픔을 도무지 공감하지 못한다. 마치 세상과 철저히 격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저버릴 수 없다.

*교회가 익숙한 이들에게 편안함을 담보해 주는 곳이 아니라 불편하더라도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꺼이 ‘한계’를 넘어 한 걸음을 내 딛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함에도, 계산기를 두드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교회는 치밀한 점검과 계획, 계산보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것을 분별하여 하나님 나라 복음이 필요한 곳으로 이끄실 때 계산없는 순종으로 함께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주님께서 사마리아를 통해 갈릴리로 가시겠다는 것을 함께 다르는 무리들에게 선언 하셨을 때 그들의 반응이 몹시 궁금하다. 별별 반응이 나왔을 것이다. 그 무수한 반응들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지역으로 발걸음을 떼셨을 때 함께 따른 제자들이 놀랍고 놀랍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받아들이고 삶의 사명이 되면, 어느덧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의 삶의 경계가 무의미해 지는 듯 하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지금, 어느 곳이든 나아가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경계를 뚫고 충분히 넘어서서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이어준다. 한 영혼을 찾아 가기 위해 사회적 통념도 가뿐히 뛰어 넘어 다시 목마름이 없을 영혼의 갈증을 채워 주시는 주님이시다.


**주님, 지금도 교회는 전통이라는 경계를 넘는 것을 버거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내딛는 한 걸음 지체하지 않겠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스데반의 설교_모세 이야기 [행 7:17-36]

스데반은 출애굽의 이야기 가운데 중요한 대목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모세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는 모세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바로 공주의 아들로 입양된 이야기로 시작하고, 청년 시절 애굽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2차 투옥과 하나님의 적극 개입 [행 5:12-26]

산헤드린 공회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고 하나님은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지속적으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신다. 이에 시기로 가득한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다시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