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자기 지식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으로 [요 7:25-36 ]
 – 2022년 01월 25일
– 2022년 01월 25일 –
초막절 축제가 진행되는 떠들썩한 성전 마당에서 일어난 주님과 유대인들간의 논쟁이 이어진다.

주님에 대한 유대인들(종교 지도자들)의 적대감은 백성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성전에서 그들과 논쟁한 이후 계속 가르치시는 것을 보았다. 수많은 백성들 앞에서 거침없이 가르치는 주님의 모습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보십시오. 그가 드러내 놓고 말하는데도, 사람들이 그에게 아무 말도 못합니다. 지도자들은 정말로 이 사람을 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것입니까?(새번역_26절)” 한편으로는 주님의 출신이 어디인 것을 알고 있기에 그리스도가 아니라고도 수군거렸다(27절).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의 출신이 을 알고 있지만, 그것보다 나는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이 나를 보내셨다'(28-29절) 라고 크게 외치셨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주님을 잡으려고 했지만, 아무도 주님의 몸에 손을 대지 못했다. 주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30절).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었다. “그리스도가 오신다고 해도 이분이 하신 것보다 더 많은 표징을 행하시겠는가?(새번역_31절)” 라는것이 이유 였다. 백성들은 주님을 의심하는 이들과 믿는 이들로 구분되고 있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무리들 가운데 일어난 수군거림을 들었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계속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성전 경비병들을 보내 붙잡으려 했다. 주님은 “나는 잠시 동안 너희와 함께 있다가, 나를 보내신 분께로 간다. 그러면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내가 있는 곳에 너희가 올 수도 없을 것이다(새번역_33-34절).” 라고 말씀하시고 유유히 선전을 빠져 나가셨다. 아무도 붙잡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남기신 말에 혼란스러워 했다. 저마다 자기 생각으로 주님의 말씀을 해석하기에 여념이 없었다(35-36절).


1.같은 언어인데….
본문은 분명 같은 말로 말하는데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여전하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행할 수 없는 표적을 분명 같이 보았지만 의심하는 자들과 믿는 자들은 분명히 구별됐다. 성경을 어느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이들일 수록 오히려 주님을 믿지 않았다. 되려 주님을 붙잡기 위해 점점 노골적으로 행동했다. 반면 지금 우리는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에서의 고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을 알기에 이해가 되지만, 당시에는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믿는 자들이 생겨났다.

잡아 죽이려는 자들, 자신들이 가진 선 지식의 안경으로 바라보며 되려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쉽게 판단하는 자들, 오히려 주님의 표적들이 그리스도임을 증거 한다며 믿는 자들… 같은 언어로 듣고, 같은 표적을 보았지만 제각각 반응하였다.

*우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을 들으며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을까? 똑같은 언어로 기록된 말씀을 함께 읽고 들어도 그 반응이 제각각 인 것을 보면 2천년전 예루살렘 성전 마당의 주님에 대한 반응이 당연하게 공감이 된다.

*그렇기에 각성하는 것은 자기 욕심과 명예가 중요하여 주님을 잡아 죽이려 하는 이들이나, 어설픈 성경 지식을 의지하여 주님의 그리스도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나, 그럼에도 듣고 믿는 자들의 반응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바라기는 자기 욕심 때문에 주님을 거절하는 어리석음이나, 어설픈 성경 지식이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하나님의 역사를 가로 막지 않기를 바래본다. 성령께서 들려 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민감하게 반응하고 순종하는 삶이 되기 간절히 바라고 바란다.

*자기 욕심, 자기 지식이 진리를 거스르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내 발목이 자기 욕심, 자기 지식에 붙잡히지 않기를 분별해야 겠다.


2.더 본질적인 것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출신이 그가 그리스도가 아닌 것의 근거가 되었다. 주님은 나사렛 출신으로 알고 있었고 “나사렛(갈릴리)에서는 그리스도가 나지 못한다(1:46, 7:41, 52)”고 확신하고 있었다. 주님께서도 사람들의 이런 반응을 잘 알고 계셨다.

그러나 주님은 오실 그리스도의 출신 지방 보다 더 본질적인 말씀을 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여 주시기로 한 약속대로 보낸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왔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라는 사실이다.

주님께서는 “나는 나를 보내신 자에게서 왔다(28-29절)”,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로 간다(33절)” 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씀이다.

요한복음에만 “보내신 이” 라는 단어가 16회 기록 되었고, 본문 이전에 이미 11회나 선언되었다. 주님께서는 자신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보내서” 왔음을 강조하고 계신다. 이것은 성경의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성취”임을 지속적으로 드러내는 말씀이다.

*주님은 철저하게 “보냄을 받은 대로” 행하셨다. 성경에 이미 약속된 근거에 따라 하나님께서 보내셨음을 일깨우며, 그렇기 때문에 “보내신 자의 때”에 이루어질 구속의 역사를 인내하며 기다리신 것이다. 자신의 마음, 계획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따라 행동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경의 약속들을 아는 지식이 있었지만, 그 지식이 되려 “보냄을 받은 주님, 여러 표적을 통해 증언된 주님”을 믿지 못하도록 했다. 본질적인 것을 놓치고 사변적인 것을 따지고 그에 따라 주님의 정체성을 규정했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것도 그랬고, 선포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도 그랬다. 자기 지식이 자기 구원의 기회를 가로 막았다.


나는?
-똑같은 언어로 듣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어떤 이에게는 구원의 복음이 되었고, 어떤 이에게는 정죄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말씀이 선포되는 곳마다 어떤 이는 은혜로, 어떤이는 시험거리가 되곤 한다. 왜 그럴까?

-주님이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해 전적으로 순종하신 것처럼이 아니라 자기 지식, 자기 경험, 자기 명예, 자기 권위로 말씀을 받아 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철저하게 “보내신 이”의 뜻과 때를 따라 순종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지식, 자기의 때가 기준이었다. 나도 늘 경계해야 할 모습이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할 때 자기 지식(경험)이 기준이 아니라 철저하게 진리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하고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는 것을 따라 순종해야 한다. 그래야 말씀을 오해하지 않는다.

-주님은 “보내신 이”의 뜻과 말씀과 때를 따라 순종하셨지만, 오늘 나는 주님의 은혜를 누림에도 나의 뜻, 나의 지식, 나의 때를 고집한다. 아… 주님….


*주님, “나의 고집” 때문에 주님의 뜻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고집하는 삶이 되겠습니다.
*주님, 저를 믿는 이로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전히 의심하고, 불신하며, 불평하여도 믿음이 떠나가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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