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 [요 7:37-52]
 – 2022년 01월 26일
– 2022년 01월 26일 –
초막절 기간에는 나뭇잎과 가지로 만든 임시 거처에 살았다. 그리고 성전의 여인의 뜰에 절기 기간 내내 촛불을 밝혔다. 주님은 이를 빗대어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비와 이슬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가 행하여 지는데 백성들이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제단에 부으면서 행해졌다. 주님께서는 이것에도 빗대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37-38절)”라고 외치셨다.

이렇게 외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의 반응이 엇갈린다. 어떤 이는 모세와 같은 참으로 그 선지자(40절), 또는 그리스도(41절)하고 했고, 어떤 이는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않았느냐(41-42절)”며 논쟁이 일어난다(43절). 이 와중에 주님을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손을 대지 못했다(44절).

주님을 잡아 오라고 보냈던 아랫 사람들이 빈손으로 돌아오면서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고 말하자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너희도 미혹 되었느냐?”며 주님을 믿는 자가 있다면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지렁이들이며 저주받은 이들이다’고 저주한다(45-49절). 이에 전에 주님을 밤에 몰래 찾아 왔던 ‘니고데모’가 ‘우리의 율법은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거나 알아보기 전에 그를 심판하지 않지 않느냐”고 주의를 환기 시켰다. 하지만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당신도 갈릴리 사람인가? 되물으며 성경을 살펴보면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무안을 준다.

*그런데 그들은 틀렸다. 선지자 요나와 나훔 등이 갈릴리 출신이었다. 또한 주님은 갈릴리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으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셨다(눅 2:4, 15). 주님을 죽이고자 결정하고 매몰차게 몰아붙이는 “확증편향”에 잠식된 그들의 율법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다. 율법은 그저 자신들이 보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이용하는 도구일 뿐이었다.



1.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37-39절)
자신을 잡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위협 속에서도 주님은 절기 중간에 예루살렘에 내려 오신 후 줄곧 성전에서 유대인들과 논쟁 하시면서 자신의 하나님 됨을 증언하고 계셨다. 초막절 절기의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비를 주심으로 수확물을 주신 것에 감사하고 마르지 않는 은혜를 주실 것을 기대하며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제단에 붓는 현장에서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37절).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 나올 것이다(새번역_37-38절)”고 외치셨다.

*목마른 것은 축복이다. 목마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 앞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6장에서 “아버지께서 오게 하신 자(주님께 나아오는 자)”를 내쫓지도, 잃어 버리지도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반드시 구원하여 주겠다는 것이다. 이 약속을 누리는 자는 목마른 자이다.

*심령의 가장 깊은 곳을 히브리식으로 표현할 때 “배(stoma)”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주님을 믿는 그들의 가장 깊은 곳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온다는 것을 요한이 해석을 해 주었는데 “이것은, 예수를 믿은 사람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사람들에게 오시지 않았다(새번역_39절)” 라고 했다. 즉 믿는 자가 받을 성령 하나님과 구원 받은 영혼들의 영혼 깊은 곳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게 될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목마른 자의 가장 깊은 곳에서 성령께서 은혜를 주심으로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신다. 주님은 이를 위해 세상에 오셨다.

*초막절 절기 마지막 날에 실로암 못에서 기른 물을 성전 제단에 부으면서 그들이 구하는 삶의 모든 갈급한 소원들은 다시 갈급하게 하는 목마른 것들이지만,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이 임하시면 이 목마름이 해갈 된다.



2.사람들의 반응(40-44절)
*이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의 시간들을 보내고 약속하신대로 임하실 성령의 임재(강림)하실 때를 미리 내다보며 외치신 말씀이었다. 그런데 이 외침을 듣고 사람들은 제각각 반응한다. 여기에 주님을 붙잡으려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완악함은 꺽이지 않는다.

*먼저 주님의 말씀을 믿으려는 백성들은 주님을 “참으로 그 선지자, 그리스도”로 부르며 믿었다(40-41절).

*반면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겠느냐? 하고 더 나아가 자신들의 성경 지식을 사용하여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는가? 라고 주장하며 믿지 않았다(41-42절).

*자신들의 소신을 따라 무리들 가운데 분쟁이 일어났고, 주님을 잡으려는 사람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잡을 수 없었다(43-44절). 왜냐하면 그들 조차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46절)”며 혼란스러워 했기 때문이다.

*진리가 선언 되면 사람 사는 세상 어디나 이런 반응들 때문에 분열이 일어난다. 이런 분열의 흐름 속에서 주님을 믿는 이들은 “그들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올 것”이지만, 주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여전히 분열이 가속될 뿐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말씀이 초막절 막바지에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실제가 되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믿고 받아 들였을 때, 어설픈 성경 지식으로 판단하고 고민하는 데서 오는 분열과 갈등이 깔끔하게 정리된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알고 있는 대로 해석하였다.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대로 믿는 이들도 있었지만, 거의 많은 이들이 자기 지식과 경험이라는 필터를 거쳐 받아들였다. 그러니, 자기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늘 분열과 분쟁의 소재들이 되었다. 오늘날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성경에 대한 지식을 잘 몰라서가 아니라 “믿음의 도전”이 없어서 이다. 자기 지식은 풍성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약하여 말씀을 진리가 아니라 학문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학문과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말씀은 이야기꺼리는 될 수 있지만, 늘 갈급한 목마름을 해갈 시키지 못한다. 어설픈 자기 지식에 만족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필터를 버리지 않는 한, 성령께서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 흘러 나오게 하시는 (다시는 목 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의 강을 맛보지 못한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 지식에 도취된 자들이었다. 주님을 잡기 위해 보냈던 사람들이 와서 “지금까지 이런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며 혼란스러워 하는 말을 듣고서는 “너희도 미혹된 것이 아니냐?”며 핀잔을 주었고, 더 나아가 “자신들과 같이 지도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주님을 믿는 자가 어디 있냐며, 주님을 믿고 따르려는 사람들을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무지렁이들은_새번역) 저주받았다(47-49절)”고 정죄한다.

*하나님 나라 진리의 복음이 성도들에게 실제가 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진리를 거부하는 무지일 수 있다. 그들은 복음을 자기 지식과 자기 욕심과 권위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배척하는 무례한 이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관심이 없다. 단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빙자하여 이용만 할 뿐이다. 최근 지속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대형교회의 세습과정이 그렇고, 여전히 이 땅의 교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황당하고 참담한 각종 사건 사고들이 그렇다.



3.그럼에도 불구하고(50-52절)
주님의 선포가 참담하게 무시되고 있는 현장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고데모는 소신 발언을 한다. 너무도 쉽고 간단하게 정죄하고 판단하며 심지어 저주하는 지도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속에서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의 율법으로는,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거나, 하지 않고서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오?(새번역_51절)”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율법에서조차 죄를 확증 하기 전에 당사자의 말을 듣는 것이나 당사자의 일을 확인 하고 나서 판단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가 그리스도인가?”라는 중요한 주제 앞에 너무도 확정된 결론을 지어 놓고 짜 맞춰 가기 식으로 정죄 하고 판단하는 것에 대하여 신중할 것을 요청했다.

니고데모는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예루살렘에서 많은 표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면서 “밤에 몰래” 주님을 찾아가서 진리의 대화를 나누었던 인물이었다. 그에게 주님은 “그리스도가 분명했고, 메시아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직 그의 속마음을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다만, 율법에 이른 최소한의 정도를 준수 하자고 읍소 하고 있는 것이다.

니고데모와 같이 주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어떤 사람들(40-41절)”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아랫 사람(46절)”도 있었다. 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절기의 마지막 날은 주님의 외침에 더욱 확고해 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감격스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드러내지는 못했다. 믿음은 있었지만 용기를 내기에는 주변 환경이 너무도 적대적이었다. 믿음은 이렇게 내적으로 갈등하고 외적으로 소심한 시간들을 거치면서 결국 담대하게 드러내 진다. 니고데모는 결국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주님의 시신을 장사 지내며 주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을 행동으로 드러낸다.



나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 구원의 삶으로 이끌어 주셔서 감사하다. 성령께서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 말씀을 길어 올려 진리의 만족함으로 살아가도록 은혜를 주셔서 감사하다.

-성경에 이른 것을 올바로 알고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어떤 이들은 어설픈 자기 지식에 갇혀, 혹은 꼼꼼히 살피지 못한 무지에 잡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모습이 2천년 전에도 지금에도 반복되어 나타난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누구보다 성경에 정통 하다고 스스로 여긴 이들이다. 그들의 율법 연구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런데 정작 원저자이신 주님의 직강을 들으면서도 이를 알아보지 못한다. 주님의 말씀처럼 듣기는 들어도,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 말씀을 학문으로 여기고 연구하는 열심은 있었지만, 삶을 생명으로 이끄는 말씀이라는 믿음은 없었다.

-혹여 나도 바리새화 되지 않기를 늘 주의해야 한다. 말씀을 연구하는 시간 동안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믿음을 놓치지 않아야겠다. 학문 연구의 희열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기에, 말씀을 더욱 믿음으로 보련다!

-오늘날 교회의 연약함은 성경 연구가 약해서 일어난 문제가 아니다. 말씀대로 믿고 살아내는 믿음이 연약 해서이다. 말씀으로 산다는 결연한 믿음이 설렁 설렁 거려서 문제다!


*그럼에도 니고데모처럼, 어떤 사람들, 아랫 사람들처럼 말씀에 반응하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 복음은 세워져 감을 다시 확인한다. 학벌, 지연, 신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이기에 아무리 인간적인 조직과 권세를 앞세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막으려 해도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의 걸음은 막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도 오늘날 나에게 맡겨 주신 삶의 현장에서 니고데모처럼, 어떤 사람들처럼, 아랫 사람들처럼 주님의 말씀에 미약하게 라도 반응하는 믿음의 추임새를 미루지 말아야지 결심해 본다.


**주님, 생수의 강이 내 마음 깊은 곳이 근원 되게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말씀을 학문이 아니라 생명으로 믿겠습니다.
**주님, 오늘 하루 주님의 말씀에 최소한의 반응, 미약한 발버둥이라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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