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성전, 여인의 뜰에서…. [요 7:53-8:20]
 – 2022년 01월 27일
– 2022년 01월 27일 –
초막절 명절이 끝나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갔다.’ 종교지도자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신 주님은 곧바로 갈릴리로 돌아가지 않으시고 그해 겨울 수전절까지(10:22) 예루살렘에 거하시며 계속 병자를 고치시고 가르치셨다(9:1-8). 이 기간에 그 유명한 “세상의 빛, 목자와 양, 양의 문과 같은 가르침을 주셨다.


1.정죄하지 아니하노니(7:53-8:11)
초막절이 끝나도 성전에서 계속 가르치시는 주님이 종교 지도자들은 매우 거슬렸을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느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는(7:44) 주님을 고발할 명분을 얻기 위해 기믹힌 계략을 세운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성전에서 가르치는 주님 앞에 끌고 와서 “선생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다.

율법은 간음하는 자는 남자와 여자 모두 죽이라고 명하였다(레 20:10; 신 22:22). 장소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성읍에서 간음했다면 둘 다 죽어야 했고(신 22:24), 들에서 라면 남자만 죽여야 했다(신 22:25).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여인만 끌고 왔다. 율법대로라면 성읍에서 간음 했으니 둘 다 죽여야 했는데, 남자는 온 간데 없었다. 여인만 홀로 끌려 왔는데, 그곳이 하필 성전 여인의 뜰이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곳이 삶의 마지막이 될 수 있었다. 이 기막힌 일에 주님은 목격자도 아니었고, 여인을 심판할 권한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께 판단을 구한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이다. 주님이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 하면 로마 총독 만이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는 당시 현실에서 로마법에 저촉 된다. 반면 돌로 치지 않으면 율법을 어기게 되는 것이다. 아주 교묘하고 치사한 시험 거리를 주님께로 가져왔다. 인간적으로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 상황을 의외의 방법으로 돌파 하신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끌려 왔기에 여인은 모든 수치를 온 몸으로 받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주님의 ‘돌로 치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곧바로 던질 기세로 주님을 주목 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 이 상황은 돌을 던지는 것 말고는 다른 행동은 없다. 그런데 거기서 주님은 이도 저도 아닌 주님만의 행동을 하신다.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새번역_6절).” 새번역은 ‘무엇인가를’에 각주를 달고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들 각자의 죄목을’이라고 달아 놓았다. 이렇게 땅에 글씨를 쓰는 주님을 향해 사람들은 다그친다. 개역 개정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라고 번역했지만 새번역은 “다그쳐 물으니”라고 했다. 아우성 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새번역_7절)”고 말씀하시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8절).

순간 어색한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다. 충격을 받은 듯한 사람들이 하나 둘 조용히 떠나갔다. 그리고 주님과 여자 둘만 남았다. 사람들 모두가 떠난 성전의 여인의 뜰에서 그제서야 몸을 일으키시고는 “나도 너를 정죄 하지 아니하겠다”고 하셨다.

*놀랍다. 도대체 주님께서 무슨 내용을 땅에 쓰셨길래 단 한마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에 슬그머니 하나 둘 현장을 빠져 나갔을까? 문맥상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과 여인의 “간음죄”를 연결하여 유추하면 적어도 간음죄에 상응한 죄의 목록들을 땅에 적었을 가능성이 크다. 새번역이 첨언한 “그들 각자의 죄목들”이라면 주님께서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의 죄를 아시고 계심을 드러낸다. 주님 앞에서 감출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한 여인을 정죄 하고 돌을 던지려는 그 죄목 보다 더 심각하고 파렴치한, 적어도 양심의 거센 울림을 줄 수 밖에 없는, 알려지지 않은 자신들의 죄와 직면 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꽁꽁 감추었던 자신들의 실상이 드러나는 참담함을 주님이 몸을 굽혀 땅에 무언가를 쓰시는 동안 그들의 마음과 걸음을 여인에게서 떨어지게 했다. 그 자리를 피해 도망 치고 싶을 만큼 땅에 새겨지는 자신들의 죄악을 직면하기 싫었다.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는 직면하기 거부하면서 남의 죄는 까발리기 좋아하는 그들이었다. 자신들의 죄는 꽁꽁 감추며 은근슬쩍 넘어가려 하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간계에 이용되는 가련한 한 여인의 죄는 도저히 묵과하지 못한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로움이 발동되고 저마다 손에는 돌멩이를 움켜 쥐었다. 자신들의 죄는 꽁꽁 숨기면서 남의 죄를 까발리며 처단하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을 내었다. 그런 열심이 자신의 신앙적이고 영적인 삶을 담보해 준다고 여겼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죄를 적발하고 격렬하게 반응하며 자신의 죄를 비겁하게 숨기는 그들에게 이런 의식(?)은 자신들의 의임 됨을 증명하는 좋은 기회였다. 문제는 이런 가증한 위선을 펼치는 곳이 “성전(2절)”이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자신의 의인 됨을 증명하려 했다. 하지만 주님은 성전에서 그들의 죄인 됨을 더욱 부각 시키셨다. 죄가 드러나는 곳이 성전이다. 죄가 드러나야 용서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 뼈져리게 누린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자 도망친다(?). 용서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 하지만 드러나게 죄를 지은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한량없는” 용서를 받는다. 간음한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 하지 않겠다”고 용서하셨다.

*성전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전으로 회복되었다. 유대인들은 정죄와 판단, 자신의 껍데기 의로움을 포장하고 사람에게 인정받는 장소로 전락 시켰지만, 주님은 그 성전을 다시 용서의 전으로 되돌리신다. 무엇보다 특정한 몇몇 사람들을 위한 용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오게 하는 누구든지.. 결코 내쫓지 아니하고 잃어버리지 아니하겠다(6:37, 39)”라는 말씀을 삶에서 보여 주신다.



2.나는 세상의 빛이다(8:12-20)
주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새번역_12절).”라고 선언하신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주님 스스로 말하는 것일 뿐 증인이 없으니 참 되지 않다고 반박한다(13절). 주님은 스스로 말하더라도 사람들을 생명의 빛으로 비추기 위해 “어디에서 왔고, 다시 어디로 돌아갈 지” 알고 있기에 참 되다고(14절) 하신다. 분명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이를 감당하는 주님 스스로, 그리고 이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가 충분히 증인이 될 수 있음을 말씀하신다. 무엇보다 지금 행하시는 일을 홀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고 있으니 충분히 증언이 된다고도 하셨다(15-18절).

바리새인들은 빛이신 주님을 거부하고 있다. 요한복음을 시작하면 어둠이 빛을 싫어한다는 말씀이 그대로 실현된다. 그럼에도 빛을 받아들이는(믿는) 이들에게 예수의 빛은 생명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빛은 무엇일까?

본문에서 바리새인들과 주님의 분명한 차이가 한 가지 있다. 바로 “아는 것”이다. 주님은 자신의 모든 길을 “알고” 걸어가신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아는 척 하지만 정말 모른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해박하게 아는 듯 하지만, 정작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알아보지 않는다. 주님께서 말씀해주시는 가르침들을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

*빛은 “아는 것”이다. 주님이 세상의 빛이고 이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의 빛이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것을 알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고 이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신성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희생이 주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생명의 빛이 되게 하셨다.



나는?
-두 이야기는 모두 성전 여인의 뜰에서 일어난 일이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약자인 여인들에게 마지막 삶의 희망을 다지는 곳이었던 여인의 뜰에서 “한 여인”은 자신의 간음죄로 인해 가장 절망스러운 장소가 될 뻔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여인이라도 성전에서 용서의 은혜를 누리게 하셨다.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이라도 자신들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여인들에게 위로와 회복, 희망의 자리에서 정죄와 심판, 저주의 죽음을 서슴치 않았지만, 주님은 “아버지께서 오게 한 어떤 사람이라도 쫓아내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처럼 용서 받을 수 없는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다. 성전에서 참 용서가 회복 된 것이다.

-죽음을 바라보는 곳에서 생명이 시작되었으니 “그 여인”에게 주님은 “빛, 생명의 빛”이 되셨다. 이와 같이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은 모든 이들은 주님이 생명의 빛이 되어 주신다.


*성전…. 내 마음이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라 하셨으니… 내 마음도 정죄와 판단, 저주와 심판의 마음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의 빛, 생명의 빛으로 가득 차기를 소망한다. 그것은 내 마음에서부터 용서와 사랑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겠고, 어떤 이에게는 나의 용서와 사랑이 마치 “이 여인처럼” 절망과 저주에서 새로운 삶으로 변화 되어지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교회가 그런 곳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끌려온 여인을 향해 흥분하는 사람들 앞에서 “진정하라는 듯” 몸을 굽혀 땅에 무언가 쓰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며…”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하나 둘 “양심의 가책을 받아” 슬며시 그 자리를 떠나는 모습 속에서 여인보다 그들의 죄가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느낀다.

*차이는 여인은 드러났고, 그들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죄는 “드러난 죄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죄”가 있을 뿐이다. 우리 모두는 “드러나지 않은 죄”를 더욱 감추기 위해 죄가 드러난 사람을 매몰차게 정죄하고 심판할 수도 있다. 드러난 죄를 가혹하게 다룸으로 드러나지 않은 나의 죄를 꽁꽁 감추고 겉으로는 의인인척 거들먹 거리려는 것이다. 주님은 “드러나지 않은 죄”를 그들의 양심에서 까발리셨다. 드러나지 않은 죄의 어둠에 “빛, 생명의 빛”을 비추셨다.


**주님, 드러나지 않은 죄를 더욱 아파하며, 거룩한 척 포장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성전이 주님의 빛으로 다시 회복된 것을 봅니다. 그 빛은 용서의 빛, 사랑의 빛, 생명의 빛이었습니다. 더온누리교회안에 용서, 사랑, 생명의 빛이신 주님 닮은 이들로 채워주십시오. 저부터 이 빛을 비춰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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