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아는 만큼 더 귀해지는 구원의 가치 [요 8:31-41]
 – 2022년 01월 29일
– 2022년 01월 29일 –
‘착각, 오해’라는 말이 뇌리에 맴돈다. 주님과 유대인들간의 동문서답이 그치질 않는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1-32절).” 라고 말씀 하셨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아무도 종살이 한 적이 없는데 자유를 얻을 것 이라고요?(33절)”라고 의아해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유대인들은 주전 586년 이후 자유의 삶과 거리가 멀었다.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제국에 이르도록 자유는 그들에게 언강생심이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종살이 한 적이 없다?”라니… 소가 웃을 일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우리가 정치적으로 억눌려 살지만 우리의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누구도 건들지 못한다. 우리는 자유민이다.”라고 외쳐댔다. 외적으로 속박 아래 있지만, 내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유대인의 정신을 따라 산다. 자신들은 이미 “자유하다!’라고 생각하며 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는 못마땅 했을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34절).” 유대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꿋꿋한 정서적인 자유함을 확신했다. 삶의 모든 순간과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과 소신, 주관으로 자유함을 이미 누리고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주님은 “….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사람은 다 죄의 종이다(새번역_34절).”라고 하셨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다. 인간은 늘 죄 아래 있으니 죄로부터 자유함이 가장 중요하다. 주님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정서적이고 정신적인 자유함이 아닌, 죄로부터의 자유함을 강조하셨다.

그리고 종의 형편을 빗대어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물러 있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새번역_35-36절).”

이러한 자유가 아들을 믿으면 주어지는 은총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죄로 부터의 자유함은 쟁취가 아니라 주어진 것이고, 행위가 아니라 은혜임을 분명하게 말씀 하셨다.

*자유함은 진리를 통해서 온다. 자신의 혈통이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로 주어진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철저하게 죄의 노예인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율법안에 구원의 자유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함이 한번의 선언으로 지속적으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은 분명하게 어떻게 죄의 종이 아니라 자유함 가운데 거할 수 있는지 “자기를 믿은 유대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새번역_31하-32절).”

먼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에 머물러 있는 이가 주님의 참된 제자이다. 조상들의 유전과 전통에 머물러서 착각하고 있는 이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추종하는 듯 하지만, 실상은 아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을 늘 되새기고 삶 속에서 살아내는 이다. 그러면 진리를 알게 된다.

“알다”라는 단어는 “경험하다, 배우다, 알게 되다”라는 의미의 “기노스코”를
사용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의 말씀이 삶 속에서 실제가 되는 경험과 배움을 통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들이 참 인것을 알아가게 된다.

주님의 말씀의 능력을 삶에서 경험하고 알게 되므로 “진실로 죄의 억압 아래에서 구원받아 자유케 된 것”이 실제임을 누리는 것이다. 주님의 제자는 말씀 안에 머물며 진리를 경험하고 진리를 통해 자유함을 누리는 삶을 산다.


나는?
-교회를 다니기만 하면, 스스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제자라고 여기는 이들이 꽤 있다. 그런데 주님은 “참 제자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 안에 ‘머무는(순종하는)’ 사람이다.” 그는 죄에 속박되는 삶이 아니라 자유롭게 말씀 따라 살아간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니 죄의 종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늘날 표현으로 치자면, 교회 잘 다니고 있으니, 헌금이나 사역 잘 하고 있으니 주님의 제자라고 착각하고 오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주님의 제자됨의 표지는 “말씀 안에 머무는 것”이다. 말씀 안에 머물면 죄의 악압에서 자유함이 실제가 된다. 죄에서 자유함이 실제가 되는 유일한 길도 “말씀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주님은 “믿은 자”에게 이 말씀을 하셨다. 당시 주님을 “믿은 자”, 그저 “찾는 자”가 있었다. 오늘날도 별반 다르지 않다. 8장에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면 믿은 자는 죄의 억압에서 구원받아 말씀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겠지만, 단지 찾는 자는 죄 가운데서 죽게 된다.

-그리고 주님은 “믿은 자”에게 이 말씀을 들려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31-32절의 선언은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다. 믿음은 예수님을 믿어 그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다. 말씀 안에 거하면 죄에 얽매이지 않고 진리를 행한다.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을 꼭 붙잡는 것, 그 가르침 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는 죄에 얽매이지 않고 진리를 행하는 것이다. 말씀대로 사는 이는 죄의 억압에서 자유롭다.

-주님은 앞으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 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진리라는 것이다. 즉 주님을 믿으면 죄에서 자유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또 본문에서 36절에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진리라는 것이며 그렇기에 진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님은 스스로를 이렇게 선언하셨다.


*우리 세대 사람들은 “자유”를 갈구한다. 그런데 단순하게 이 말씀을 적용하자면 자유는 진리 안에 있을 때 진리가 자유 하게 해준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출발점은 “진리”라는 것이다. 진리가 없으면 자유도 없다. 진리가 먼저다. 예수님이 먼저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삶의 자유함, 특히 죄에서 자유함을 누리게 한다.

*그런데 자유는 진리를 알 수록 더욱 자유롭게 된다. “알아 갈 수록 더 자유를 누린다” 지식의 발전에 따라 기술의 편리함으로 삶이 자유로워 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직식을 알아 갈 수록 편리해지는 자유함이 있다. 죄의 속박과 억압의 비참함을 알아갈 수록, 죄에서 자유케 해주시는 주님을 아는 지식만큼 그 자유가 가치가 커진다. 구원의 은혜의 가치는 속박의 고통에 몸부림 치는 것과 비례한다.


**주님, 진리 되신 주님을 더욱 알아가고 거하며 죄에서 자유함의 가치를 누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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