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요 9:1-12]
 – 2022년 01월 31일
– 2022년 01월 31일 –

역시 안식일에 일어난 일이다. 주님께서 길을 가시다 날 때부 맹인 된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도 “보았다.” 이웃사람들도 “보았다.” 그런데 각각 그를 바라보는 마음(시각)은 달랐다. 보는 것이 다르니, 생각도 행동도 달랐다. 내가 바라보아야 할 것,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1.한 맹인
‘날 때부터 맹인’된 이는 예루살렘에서 꽤 유명(?)한 이었던것 같다. 제자들이 그를 바라보며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2절)’라고 물을 정도로 갈릴리 사람들이었던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또 이웃 사람들과 그를 ‘걸인’으로 알고 있던 이들은 ‘구걸하던 자’로 알고 있었다(8절).

맹인과 구걸하는 자가 그가 세상이 알고 있는 삶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는 어둠에서 출발했다. 어둠 속의 삶은 그의 숙명이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구걸’뿐이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어둠과 함께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구걸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철저히 ‘비루하고 고달픈’ 약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이런 철저히 고통스럽고 비루한 어둠의 인생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그저 병이 고침 받았다의 차원이 아니라 날 때부터 철저하게 소외되고 차별 받았던 사회로 당당하게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전에는 차별받는 존재였지만, 이제는 건강한 구성원으로 자리매김 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은 단지 병의 고통에서의 자유함 뿐 아니라 병으로 인해 하나님과 공동체와 단절된 삶을 정상적인 삶으로 복귀시키는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죄로 인해 단절 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정상적인 관계로 나아가게 하는 주님의 십자가가 가장 큰 기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회 공동체가 여전히 세상의 소망이 되는 이유는 그들이 이것을 알든지 모르든지 주님으로 인해 단절 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은 세상의 마지막 때가 아니라 지금 일어나는 일임을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가치가 지금 여기에서 선을 보이는 곳이 “교회 공동체”이기에 그렇다.



2.제자들, 사람들(2, 8절)
제자들은 그를 보면 “누구의 죄로 맹인이 된 것 일까요?”라고 물었다. 그 때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사람들은 본인이나 부모가 심각한 죄를 지어서 그가 벌을 받았다고 흔히 생각했다. 당시 랍비들도 인간의 질병이나 불행한 일들의 원인이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가르쳤다. 특히 일부 랍비 들은 부모의 죄는 아이에게 흔적을 남긴다고 했고, 태아 라도 엄마의 뱃속에서 죄를 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기에 거리에서 구걸하는 맹인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 마음으로 그의 죄 때문 이라고 당연하게 여겼다. 불쌍히 마음보다 정죄의 마음이 더 컸다. 아.. 이런 따가운 시선을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라고 견딜 수 있었을까? 맹인은 그렇게 인고의 시간들을 거리에서 견디고 있었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재난을 만날 때 두려움과 연민의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왜 이런 일이?”하며 발생원인에 관심을 두는 경우가 많다. 대개 이런 생각은 고통과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정죄와 판단을 위해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구나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과 같은 질문을 의외로 자연스럽게 던지는 경우가 있다.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마음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순기능도 있지만, 대부분 상대를 판단하는 역기능이 더 크다.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처리 하시는데 있어 매우 좋지 않는 역사를 행하시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일관되게 역사하지만, 갑작스럽게 좋지 않은 일들이 발생 했을 때 이런 일들이 모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는 생각은 눈에 보이는 좋은 결과는 마치 죄가 없다는 식의 생각을 고착시킬 수 있어 위험하다.

*주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먼저 바라보신 맹인을 보며 제자들이 가진 마음은 맹인의 상황을 아예 죄로 인해 생긴 병임을 전제하고 날 때부터 맹인이었으니 부모중에, 혹은 직계 가족중에 누구의 죄인지 밝혀 달라는 것이다.

*이웃사람들이나 그가 구걸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던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맹인에서 고침받은 것에 공감하고 기뻐하며 축하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그저 “어떻게” 고침 받았는지가 더 궁금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은 메시야 사역의 중요한 지표 였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은 소경이 되는 것이나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달린 일이라고 했다(출 4:11; 시 146:8). 그리고 메시야가 오실 때 행하실 표적이 바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었다(사 29:18). 그래서 누가 눈을 뜨게 했는지 찾았던 것이다.

특히 제자들의 질문은 “누구의 죄로 인함인가?”였다. 즉, “누구 탓”인가 물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 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다(3절)” 였다. 제자들은 맹인의 죄나, 그의 부모의 죄다 라는 대답을 기대했을 것이다.

*이런 점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매우 주의해야 할 부분 들이다. 나의 시각이 확정된 상태로, 결론을 정해 놓고 더지는 질문은 늘 가시가 있다. 그런 질문들은 “원인”에 관심을 더 둔다. 원인을 질문하는 심리는 내가 확정한 대답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찾기 위해서 이다. 지금 제자들의 질문에는 이런 오류가 가득했다.


3.예수님은?
먼저 그 소경을 보셨다. 제자들의 ‘원인’을 찾는 질문에는 “목적”으로 대답해 주셨다. “….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3절)” 그리고서 빛이신 예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때(낮 일때) 맹인에게 빛을 보여 주겠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시고서(4-6절) 침으로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발라주시고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7절)”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에서 소개했던 말씀이신 예수님, 빛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역시 또 드러내 보이셨다.

*맹인이 주님을 먼저 보고 갈급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먼저 맹인을 보시고 가셔서 치유해 주셨다. 그것도 침으로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명령만 하셨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면 낫는다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만 하셨다. 그는 주님의 말에 순종하여 가서 씻었을 뿐이다. 그리고 “… 밝은 눈으로 왔다(7절)”

*본문은 실로암의 뜻을 번역해 놓았다.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7절). 이는 역사적인 배경에 근거한 것인데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의 산헤립의 예루살렘 공격을 대비하여 성 안의 식수가 부족하지 않도록 성 밖의 기혼 샘에서부터 지하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와 못을 만들고 붙인 이름이다. 이 못의 물은 성 밖의 기혼 샘으로 부터 수로를 통해 보내진 물이라 하여 “실로암(보냄을 받았다)”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뜻은 맹인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가 된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씽어서가 아니라 진흘에 침을 발라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보내신” 주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 이긴 진흙을 눈에 발라주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고 맹인은 그 말씀을 따라 했을 때 고침을 받은 것이다.



나는?
-타인의 고통을 쉽게 죄의 결과로 이야기하는 것만큼 무례한 것은 없다. 아쉽게도 신앙이 좋다고 여기는 분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런 말을 내뱉는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 생각해봐, 회개하면 해결 될 거야…”

-제자들이나 당시 유대인들의 시각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본 받아야 할 것은 주님의 마음(시각)이다. 주님은 ‘원인’을 바라보지 않고, ”목적”을 바라보셨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절)”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처럼 고통과 차별, 억압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 치유와 회복 자유함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정죄와 판단 저주가 아니라 치유와 회복이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저주의 하나님으로 단정 시켰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병을 고쳐주시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정상적이고 건강한 삶으로 차별받고 고통받았던 인생을 복귀 시켜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주님은 맹인의 눈을 치유 하시면서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4절)” 말씀하시면서 행하셨다. 제자들은 훗날 이 일을 떠올리며 그들이 밟는 모든 땅에서 예수님처럼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외치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고 병든 이, 귀신 들린 이들에게 치유와 자유함을 선포하였다.


*주님, 어설픔으로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겠습니다. 원인을 찾기 보다 목적을 구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나의 삶을 통해 주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주님이 보내신 일에 충성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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