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회개와 새로운 공동체 [행 2:37-47]
 – 2024년 05월 05일
– 2024년 05월 05일 –
베드로가 회개를 촉구하며 복음을 선포하자 설교를 들은 무리는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반응한다. 이 찔림과 질문은 삼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과 형제애가 넘치는 역동적인 신앙의 모습을 보여준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성만찬과 식탁 교제를 통해 성도 간의 교제를 돈독히 하였다. 또한 자신의 소유를 팔아 필요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마음에 찔림을 받은 무리를 향해 베드로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선포한다. 베드로의 회개 촉구와 복음의 메시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기독교 역사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1. 회개 촉구와 복음 선포(37~41절)
무리는 베드로의 설교를 자신들에게 하는 말씀으로 받고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음에 찔려”라는 표현을 통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주와 메시아 되신다는 베드로의 설교에 큰 충격을 받았음을 표현한다. “찔려”라고 번역된 단어는 “(날카로운 것에) 베이듯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하다. 그만큼 깊은 찔림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에 그들은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질문한다. 베드로는 회개와 믿음을 촉구하는데, 초대교회의 전형적인 회개와 결단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새번역_38절).” 이 구절은 두 개의 명령문으로 되어 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이다. 나머지는 이 명령을 수식하는 역할이다. 회개하라는 명령은 “애통해하는 마음으로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도 동일하게 이 메시지를 선포했다(눅 5:32; 13:3, 5; 24:47). 사도행전에서는 복음이 선포될 때마다 회개가 필수조건으로 나온다(행 3:19; 8:22; 17:30; 20:21; 26:20). 그런데 복음이 복음을 듣는 이에게 회개를 촉구하지만, 회개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행 5:31; 11:18; 딤후 2:25)이다. 또한 세례는 물세례를 가리키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도의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38절은 회개와 믿음을 동시에 제시한다.
    
한편 세례 요한도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는데(눅 3:3) 이는 죄에 대한 회개의 외적인 표현으로 베푼 것이었다. 이에 비해 초대교회의 세례는 단순히 회개의 표현만이 아닌 그리스도께 충성을 서약하는(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음의 행위를 외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회개를 이해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고백(세례)을 통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이해하였다.
    
    
    
2.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삶(42~47절)
‘누가’는 행 1:1~2:41까지 초대교회 초기 설립 과정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했다. 2:42~6:7까지는 예루살렘 교회의 탄생 3~5년 사이에(주후 30년~35년)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 이 단락은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요약하여 기록했다.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일, 성도 간의 교제, 떡을 떼기, 기도”에 힘쓴 공동체로 소개한다.
    
먼저 사도들은 “가르침”을 통해 예수가 선포하신 말씀을 직접 전달하고 그 말씀을 수호하는 역할을 했다. 이 가르침에는 예수님의 사역, 수난, 부활 이야기뿐 아니라 그의 죽음과 부활이 갖는 대속의 의미도 포함하여 가르쳤다.
 
*배우는 공동체.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데 힘썼다고 기록한다. 이 부분을 직역하면 “그들은 지속적으로 사도들의 가르침에 헌신하였다(몰두하였다)”이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은 배움도 충만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43절)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배후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다. 즉, 성령께서 특별히 역사하고 계심을 성령의 사람들이 금세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서로 교제(코이노니아)”하였다. 특히 ‘코이노니아’는 단순한 성도 간의 사귐에 그치지 않고 공유하고 나눈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실제로 44~45절은 서로 유무상통을 비롯하여 성도 간의 식탁교제와 기도가 코이노니아에 모두 포함되었다.
 
*교제하는 공동체. 교제(코이노니아)는 성도간의 영적인 교제, 물질적 교제, 성례를 통해 하나 되는 성례전 교제, 공동체가 하나됨을 누리는 교회적인 교제 등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44~45절은 코이노니아의 구체적인 모습을 묘사한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언뜻 보면 사유재산 없이 모두가 유무상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함께 있어, 통용하고, 팔아, 나눠 주며”라는 동사는 모두 미완료시제이다. 이는 반복적인 동작을 나타나는 시제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번에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준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나타나면 “너나 할 것 없이”, “십시일반으로” 형편껏 가진 것을 팔아서 더 곤란하고 핍절한 사람들을 도왔다는 의미이다. 4장 32절을 읽어보자.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라고 한 것을 보면 곤경에 처한 지체를 보면 언제든 자기 것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성령이 임하면서 서로에 대한 인식이 변화된 결과다.
 
    
“떡을 떼며”로 번역된 “테 클라세이 투 아루투”는 본래 식사 기도와 함께 유대인들이 식사를 시작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본문에서는 “성만찬”을 의미한다.
 
*떡을 떼는 공동체. 46절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라고 묘사한다. 유대인들에게 “떡을 뗀다(직역:부수다)”는 것은 식사를 시작한다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초대교회가 성만찬을 행할 때 사용하던 용어이기도 했다. 누가가 이 성만찬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이 식사 교제가 단지 음식을 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만찬 의식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 그것도 날마다 먹는다는 것은 얼마나 그들이 친밀하게 교제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기도”에 대한 언급은 다른 사도행전 이야기 속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 예수님과 초대교회의 기도 생활을 병행하여 보여준다. 이 기도는 대체로 개인 집에서 모이는 기도 모임을 가리키지만, 성전에서 행해지는 매일의 예배 모임 참여도 포함한 표현일 것이다(행 3:1). 초대교회의 탄생은 유대교 전통과의 전면적 단절을 의미하지 않기에 상당 부분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기도(예배)하는 공동체. “기도하기를 힘썼다”에서 기도는 복수형 “기도들”이다. 누가는 그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지속적으로, 간절하게 기도했는지를 말하고 싶었다. 백이십 명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했듯이, 성령이 오신 후에 삼천 명의 제자들이 성령과 더불어 기도한 것이다. 이들은 성전에서 모이는 예배와 집에서 모이는 예배로 모였다. “누가-행전”이 기록되어 배포된 시점은 이미 건물로서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에 의해 파괴되고 사라진 뒤이다. 그래서 집에서 모이는 교회였다. 이것이 왜 가능했을까? 애초에 교회 공동체가 성전이 존재했을 당시에 시작했을 때 이미 집에서 모였다. 이는 매우 상징적인 것인데,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전, 하나님의 집에서 세속적인 인간의 집으로 이동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거룩한 하늘 성전에서 비천한 땅으로 오신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성전이 존재 했을 때도 “회당”은 존재 했었다. 하지만 초대교회 공동체는 유대인들의 전유물인 “회당”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집”을 기꺼이 대안 공간으로 선택했다. 또한 성전에서 집으로의 이동은 하나님 나라 복음이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운동이 아니라 땅 끝의 모든 민족을 향한 선교 운동이 출발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령이 함께하시는 공동체라면 그들이 모인 곳이 집이든, 예배당이든 카페든 상관없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라는 표현은 각 사람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뜻이다. 이는 오순절 사건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초자연적인 사건을 보고 놀란 예루살렘 주민들을 표현한 것이다. 제자들이 행한 “기사와 표적”은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가리키고 이에 대한 대표적인 사건은 사도행전 3장에서 소개된다.
    
44절에서 가장 도드라진 예루살렘 교회의 특징은 공동체 생활과 공동 재산의 소유이다. 그들은 함께 공동체 생활했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공동 자금을 마련하여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이는 예수님의 “자기 부인”에 대한 가르침이 그들의 신앙적 결단에 동기를 부여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이 공동생활은 매우 자발적인 시도로 시작되었다. 사도행전 4:32~5:11의 기록은 개인의 재산과 소유를 파는 것은 어떤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행동임을 보여주고 있다. 바나바의 예를 누가가 드는 것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소유를 공동체에 헌금한 것은 아니었음을 증거한다.
    
그리고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전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으로 믿었다. 그들은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 말씀을 나누었고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다. 그리고서 각자의 집에 모였고 성만찬을 포함한 식탁의 교제를 하였다(46절; 고전 11:17~34).
 
*전도하는 공동체(47절).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직접적인 전도라는 언급은 없다. 하지만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은 결코 가만히 있지 못한다. 예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들으면 함구할 수 없다. 그런데 주의하여 47절을 살펴보면,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신다. 구원받는 사람을 부르시는 분이 분명히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주께서 일하시는 교회”라는 영광스러운 인정이 우리 교회이기를 바란다.
또 구원받는 자들을 기존의 제자들의 모임으로 더해주셨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더 많은 교인이 아니다.” 모든 교인이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졌다. “날마다 보다는 계속”으로 번역하면 더 좋다. 한순간 반짝하고 일어났다 그친 일이 아니라 교회가 존재하는 내내 지속되었다는 의미다.
 
    
    
나는?
-“우리가 어찌할꼬?” 유대인들이 베드로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듣고 반응한 모습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메시아 예수를 죽였다는 사실을 듣고 마음에 찔려 사도들을 향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었다. 뼈아픈 착각에 처절한 애통을 겪는다. 그들에게 베드로가 들려준 말씀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전 존재를 흔들고 삶의 전환을 요구하는 준엄한 명령이었다.
    
-이들을 향해 베드로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라고 한다. 이는 예수가 저주받아 죽은 자가 아니라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뜻이다. 이제는 “주” 노릇하던 나의 옛사람이 죽고 예수를 왕으로 삼는 새사람이 되라는 의미다.
    
-또한 베드로는 회개와 세례의 의미를 패역한 세대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말한다. 즉 구원은 과거의 삶에 대한 죽음이며, 그것은 패역한 세상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이다. 사탄의 미혹에 빠져 죄와 사망 가운데 있던 자리에서 건져지고 예수의 길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 혹은 회심은 무엇일까? 단지 뉘우침, 후회, 미안함 등의 감정일까? 아니다 회개는 철저한 청산이고 철회이자, 포기이다. 성경은 심지어 ‘죽음’이라고 표현할 만큼 전격적이고 급진적으로 표현한다.
    
-회심은 또한 다른 세계관을 수용하는 일이다. 다른 주인의 주권 아래 살게 되는 일이다. 그 주권자인 예수님을 죽인 세상에 대해 변절하고 새로운 주인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나의 힘과 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따라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며 새 생명을 누리는 삶이다.
    
-이 놀라운 돌이킴의 결정을 하루에 무려 삼천 명이 그릇된 하나님 나라의 기대를 버리고 예수가 가져오신 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겠다고 결단했다.
    
-회심은 예수님이라는 새로운 주권 아래 사는 공동체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내가 관계를 맺던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정립하여 모든 관계의 중심에 예수님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분처럼 사랑하고 나누고 베풀고 용서하면서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진실한 교제와 예배가 회심의 한 측면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는 하나님 나라를 좇아 자기 삶의 방식을 바꾸는 자들이다. 세례를 받은 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물질을 나누면서 교제하고, 성찬을 나누고 기도하기를 힘썼다.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이들도 있었다. 패역한 세대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이타적이며 관계적이며 공동체적인 삶이었다.
    
-성전이든 집이든 그곳을 예배의 처소가 되게 하였고, 성도들의 삶은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삶의 예배와 공적인 예배의 조화는 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주님,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무리가 “우리가 어찌할꼬?” 반응한 것처럼 늘, 말씀에 대한 생동하는 반응을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말씀을 통해 성령이 역사하여 새로운 공동체가 시작되었습니다. 늘 말씀이 처음인 것을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말씀부터 한 걸음을 내딛겠습니다.
*주님, 초대 공동체처럼 어디에서든지 말씀을 듣고, 말씀 때문에, 말씀을 통해 늘 말씀 따라 살겠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스데반의 설교_모세 이야기 [행 7:17-36]

스데반은 출애굽의 이야기 가운데 중요한 대목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모세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는 모세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바로 공주의 아들로 입양된 이야기로 시작하고, 청년 시절 애굽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