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헤드린 공회는 베드로의 담대한 복음 선포에 할 말을 잃고 대책을 논의한다. 베드로와 요한을 정죄할 명분을 찾아내지 못하자 공회는 그들에게 복음 전도와 가르침을 금하고 침묵하라고 위협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누구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 말하라며 그들의 명령을 거부한다. 이에 공회는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하고 결국 두 제자를 석방한다. 석방된 두 제자는 동료들과 함께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신앙으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초대교회는 인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섭리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들이 유대 지도자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현재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난과 주님의 십자가 고난이 무관하지 않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이 제자의 마땅한 본분임을 그들이 깊이 깨달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 베드로와 요한이 풀려나다(13~22절)
산헤드린 공회가 놀란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하게(파레시아)” 말했기 때문이다.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또 다른 이유는 사도들이 본래 랍비 교육을 정식으로 받은 사람도, 정세에 관심이 있던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학문 없는 범인(13절)”으로 번역된 문장을 직역하면 “문맹인과 일반인”이다. 당시 문맹인은 랍비 교육을 정식으로 받지 않은 사람을, 일반인은 정세에 관심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아니면 단지 율법에 무식한 사람을 일컫는 단어일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라는 의미는 예수도 랍비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권위 있는 자와 같이(막 1:22): 가르쳤음을 기억하고 그 예수와 함께 다녔기 때문에 이렇게 능수능란하게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14절에서 기록한 것처럼 병 나은 자가 공회에 함께 있었는지에 대해 알 수 없다. 그러나 단지 이 기록을 통해 공회가 두 사도를 정죄할 명분을 잃어버렸다는 사실만을 강조한다. 이에 공회원들은 두 사도를 퇴장시키고 이 일을 수습하기 위한 대책 논의에 들어간다(15절). ‘누가’는 그 내용을 소개하기보다는 유대 지도자들의 당황하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더 드러낸다. 이미 기적에 대한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알려졌으니 더 이상 그 소문이 퍼지지 못하도록 사도들을 위협하고 또 두 사도를 불러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한다(16~18절). 왜 유대 지도자들은 이렇게 사도들의 입을 막으려고 했을까? 불필요하다고 여긴 소란을 차단하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정의를 행하고 진실을 밝히는 데 자신들의 직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당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식이다.
그런데 이런 공회의 전도 금지 명령에 베드로와 요한이 보인 반응은 매우 감동적이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19절)” 많은 성도는 성령 충만을 구하면서 신비로운 어떤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만을 생각하지만, 진정한 성령의 충만함은 바로 이것이다. 돈과 권력 앞이라도 해야 할 말을 오롯이 할 수 있는 담대한 능력은 성령의 충만함에서 나온다. 산헤드린 공회는 적절하게 처벌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두 사도를 석방한다. 사람들은 이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21절). 그런데 ‘누가’는 22절에서 이 소란 가운데서도 치유한 사람의 나이를 슬쩍 언급한다. 이는 그 치유의 기적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었는지를 암시하는 누가의 독특한 이야기 전개 방식이었다.
2.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공동체(23~31절)
석방된 두 사도는 가까운 동료들에게 가서 있었던 일을 알렸다. 동료들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간구의 기도를 드렸다. ‘누가’는 그들이 드린 기도를 요약하여 기록에 남겼다(24~30절).
초대교회 공동체의 기도는 “대주재여(데스포타)”로 시작한다. “대 주재”는 “주권자”라는 의미인데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하게 드러내는 호칭이었다. 또, 지금 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다 알고 주관하시는 분임을 인정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대주재이신 하나님은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이시다(24절)’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백이다.
이어 시편 2:1~2를 인용하여 당시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성경 관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성경이 이미 대적자들에 대해 예언했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다윗의 입을 열어 말하게 하셨음을 찬양한다(25절).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세상의 군왕들과 관리들이 하나님과 그의 메시아를 대적하는 것이 헛수고일 수밖에 없음을 시편 말씀을 통해 알고 있었다. *말씀이 상황(현실)을 설명해 주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페쉐르”라고 불리는 당시 유대인들의 성경 해석 방법을 통해 시편 본문을 현재 정황에 적용했다. 군왕들과 관리들은 각각 헤롯과 빌라도로, 열방(에쓰네)과 족속들(라오이)은 각각 이방인(로마인)과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고 해석하였다. 시편은 그들이 아무리 메시아를 대적하기 위해 동조하고 음모를 꾸며도, 그들의 노력이 헛수고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라는 확신이 이러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런데 사도들의 기도에는 메시아의 대적자들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이 포함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라 할지라도 메시아인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일 수 없고 믿지 않는 이방인과 같다는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즉, 하나님이 헤롯과 빌라도가 예수를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허용하셨던 것처럼 지금 유대 지도자들이 자기들을 박해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 자신들과 무관치 않고 오히려 직결되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가져다주는 “구원의 축복”만을 그리스도인의 특권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뿐 아니라 주님과 함께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공동체 가운데 닥친 고난은 “하나님의 권능과 뜻(하나님의 손과 뜻_28절)”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확신을 기도하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초대교회에서 사용된 기도문에서는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거나 자기들을 박해하는 자들을 처벌해 달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달라(29절)는 신앙이 발견된다. 31절은 이러한 교회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록하고 있다. 지진과 같은 진동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며,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또 그 결과로 성령 충만을 받았고 더욱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나는?
-하나님은 지극히 평범한 자들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셔서 세상을 놀라게 하는 권세 있는 복음 전파자들로 삼으셨다. 이미 예수님을 통해 제자들에게 예언하신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눅 21:14~15). 주님께서 지극히 평범한(?) 나를 들어 권능 있는 복음의 일꾼으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간절히 바래본다.
-베드로와 요한은 정식 랍비 교육을 받지 못한 평범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종교 지도자들이 반박할 수 없을 만큼 논리 정연했다(13~14절). 주님과 함께 한 시간 속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음으로 나타난 결과였다. 주님의 사역은 주님과 교제하기 위한 말씀과 기도 시간이 얼마나 배타적으로 확보되느냐에 따라 판가름 될 것임을 깨닫게 한다. 주님과 깊고 친밀하며 내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누리고 있는가?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통해 나타난 표적이 이미 사람들에게 알려졌기에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15~18절). 그래서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사역을 하면서 혹시 예수의 이름만 전하지 않으면 다른 것은 그럭저럭 다 용납해 주는 이 세상의 유혹에 어떻게 맞서고 있는지 점검하고 점검해야 하겠다.
-두 사도는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종교 지도자들 앞에 더 담대하게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하게 선포한다(19~20절). 이 세상 권력자들의 권세보다 하나님의 권세를 더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나도 늘 주의해야겠다. 사람의 권세보다 하나님의 권세로 이 세상 속에 서 있어야 하리라. 사람 권세가 두려워 진리를 거부하고 실리를 택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늘 내 마음과 삶을 성찰해야 하리라.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사도들이 위협받는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신다. 하나님의 이름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상황을 이끄신다. 이미 백성들이 두 사도를 통해 일어난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21~22절). 두 사도에게 가장 최악의 상황이 될 수 있었던 사건을 최선의 환경으로 바꾸어 주셨다. 나도 늘 기대하며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바라보겠다. 내가 걸어가는 모든 걸음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주목하며 바라보겠다.
-사람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겠다는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이 겪은 일을 공동체와 더불어 나누고 더욱 힘써 복음 전파하는 일을 위해 함께 기도한다(23~31절).
-베드로와 요한은 옥에서 풀려나 제자 공동체에서 자신들이 겪은 일을 자세하게 보고한다(23~24절). 제자들은 두 사도를 통해 복음 전도의 위기 상황을 직감하고 한마음으로 소리 높여 하나님께 기도한다. 충분히 근심하고 낙담할 수 있었으나 상황에 짓눌리지 않고, 그 상황에 개입하셔서 능력을 행하실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다. 우리 공동체도 이와 같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마음의 기도가 끊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공동체와 삶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는 것이 일상인 공동체이기를 꿈꾼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반역하려고 모여든 자들의 모든 힘을 좌절시키고 계획하신 뜻을 반드시 이루신다(25~28절). 사도들은 다윗의 시편을 통해(시 2:1~2), 지금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들의 거센 행동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밖에 되지 않음을 선포한다.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이 말씀을 통해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의 갖가지 술수와 악한 행동들까지 창조주 하나님의 손 아래 놓여있다는 사실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 공동체에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제자 공동체, 초대교회 공동체의 기도 제목은 자신들에게 핍박과 위험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29~30절). 그래서 역경 속에서도 오히려 강력한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도했다.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의 기도는 어떤가? 위험에 처했을 때 우리도 더욱 담대하게 말씀에서 말씀으로 행하여 나가기를 기도하는 공동체이기를 소망한다.
-공동체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은 신속하고 강력하게 응답하신다(31절). 어떤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완수하려는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입혀 주신다. 성령으로 충만한 결과 사도들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치유와 능력의 역사를 일으켰다. 아!! 나도 말씀을 전하기 전에 먼저 성령 충만함 속에서 전하기를 소망한다.
*주님, 구차한 종교 지도자들처럼 되지 않기를 빕니다. 담대한 두 사도의 성령충만함을 저에게서 거두지 말아주십시오.
*주님, 고난 앞에 기도하며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데 더욱 담대하게 해달라는 제자들의 영적 기개를 제게도 주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 나라 복음이 나의 입술에서 그치지 않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