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빌립과 에티오피아 내시의 만남 [행 8:26-40]
 – 2024년 05월 18일
– 2024년 05월 18일 –
빌립은 주의 사자로부터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빌립은 길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는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를 만난다. 이사야서의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내시는 빌립이게 그 말씀의 의미를 묻는다.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은 빌립은 그에게 예수에 관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섬세한 인도와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다.
    
이처럼 사도행전 초대교회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생생한 언어로 서술한다. 예루살렘 교회와 열두 사도들은 자진해서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이방 선교 전략”을 세우지 않았었다. 이런 일을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친히 스데반의 고귀한 죽음을 통해 신자들을 사방으로 흩으셨고, 빌립을 통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본문의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선교 의지가 대단하시다.
    
빌립이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내용은 엘리야의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문체로 기록되었다. “주의 사자”는 칠십인 역에서 인간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묘사할 때 초월적인 인물로 종종 등장한다. 빌립은 주의 사자로부터 강렬하게 이끄심을 받은 것이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는 “성령의 강력한 인도하심”을 드러내는 “주의 사자(26절), 성령(29절), 주의 영(39절)”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주의 사자는 빌립에게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남쪽 길로 가라고 명령한다. 빌립은 이에 즉시로(일어나 가서) 순종한다.
    
    
    
1. 성령께서 이끄신 빌립과 내시의 만남(26~28절)
빌립은 가사로 가는 길에서 에티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은 고관 내시를 만난다. ‘누가’는 그를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고 소개한다.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교 개종자(proselyte)이거나 혹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 경외자(GOD-fearer)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내시(유누코스)”로 번역된 단어는 일반적으로 거세한 내시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왕실 관리를 가리키는 의미로도 쓰인다. 그런데 모세의 율법은 이런 자들의 성전 출입을 금지했다(신 23:1). 그가 유대인 개종자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러므로 그는 왕실 관리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한편 이와 같은 모세의 율법이 이사야 56:3~8에서는 해제될 것을 바라보게 하는데, 누가의 관점으로 보면 이 내시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으로 읽도록 의도적인 기록일 가능성도 크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이 일을 이루어지게 했다. 또 시편 68:31(고관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의 성취로도 볼 수 있다.
    
에티오피아 내시는 요 12:20에 등장하는 헬라인들처럼 이스라엘의 절기 기간에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예배를 드린 후 귀국하는 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적어도 “하나님 경외자”였다.
    
    
    
2. 이사야의 글에 관해 묻고 답한다(29~35절).
그는 수레 안에서 이사야의 글이 적힌 두루마리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이때 빌립은 다시 성령의 놀라운 인도하심을 경험한다. 29절은 “성령”이 내시가 타고 가던 수레를 알려 주신다. 그리고 가까이 나아가라고 말씀해 주셨다(29절). 내시가 타고 가던 마차는 황소가 끄는 마차였을 것이기에 따라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내시는 고대 시대의 관습대로 성경을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그렇기에 빌립은 그가 어떤 내용을 읽고 있는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내용을 이해하십니까?” 내시는 답답한 마음을 담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라고, 반문하며, 빌립을 자신의 수레에 태운다(30~31절). 내시가 이렇게 한 이유는 아마도 빌립의 행색을 보고 그가 유대인인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빌립이 이 성경을 조금이라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빌립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구약의 내용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관점에서 설명하신 것처럼(눅 24:25~27, 44~47) 내시에게 들려줄 기회를 잡은 것이다.
    
빌립이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나게 된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세밀하신 인도하심이었다. 그가 읽고 있었던 본문이 이사야 53:7~8(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말씀은 구난 받는 여호와의 종에 관한 말씀인데,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서 대속적인 죽임을 당하면서 성취된 말씀이었다.
    
예수께서 이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을 이루시기 전에는 누구도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에티오피아 내시가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을 깨달을 수 없었던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자기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 이사야의 본문을 연상시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예수의 수난 예고를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말씀은 이사야의 고난 받는 종 본문(사 52:13~53:12)이다. 주님은 이 본문을 자신의 인격과 사역으로 성취하셨다. 에티오피아 내시가 묻는다. “선지자 이사야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냐? 자기 자신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이냐? (34절)” 이에 빌립은 “이 성경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새번역_35절).”
    
    
    
3. 빌립에게 세례받은 내시(36~40절)
빌립은 내시에게 복음을 들은 자의 올바른 반응은 베드로가 사도행전 2:38에서 선언한 것처럼 물세례를 받는 것임을 가르쳤을 것이다. 내시는 길을 가다가 물 있는 곳을 발견하고 나서 빌립에게 세례를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36절). 개역 개정은 37절을 “없음”으로 표기하지만, 일부 사본에서는 “빌립이 이르되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누가의 기록이 에티오피아 내시의 믿음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다고 생각한 초기 필사자가 첨가한 부분으로 보고 있어 개역 개정에서는 “없음”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39절 헬라어 원문은 두 사람이 물에서 올라올 때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고 기록한다. 그런데 이 문장은 이 단락의 이야기를 갑작스럽게 마무리하는 것처럼 비친다. 이 부분도 사본 간의 이문이 존재한다. 다른 사본은 “그들이 물에서 올라올 때 성령이 내시 위에 임했는데 주의 사자가 빌립을 잡아챘다”라는 내용이 있다. 어찌 됐든 매우 신비스러운 일이 벌어졌는데, 주의 영이 갑자기 빌립을 순식간에 끌어내 사라졌음을 기록한 것이다.
    
40절은 이 놀라운 경험 이후에 빌립이 아소도(구약 시대 아스돗)에 나타났다고 기록하는데, 내시에게 세례를 준 곳에서 약 30km를 순식간에 이동한 셈이 된다. 거기서 여러 성을 다니며 거침없이 복음을 전하고 지중해를 따라 올라가 마침내 가이사랴에 이르게 된다. ‘누가’는 행 21:8에서 빌립이 가이사랴에 정착했을 가능성을 내비친다.
    
    
    
나는?
-주의 사자는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 맡은 내시에게 어떤 영적 필요와 갈급함이 있었는지 잘 알고 계셨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한 빌립을 그에게 보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자 하는 영적으로 민감함과 필요가 간절한 이를 성령께서 너무도 잘 아신다. 그래서 이를 채워줄 해결책을 늘 준비하신다. 하나님은 복음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영적 민감함임을 일깨우신다.
    
-내가 먼저 주님께 우리의 필요를 말하기 전에, 하고 싶은 일과 가고 싶은 곳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가 계시고 먼저 일하고 계신다. 빌립은 주의 사자가 말씀하신 대로 곧장 순종했다.
    
-그런데 빌립이 주의 사자의 명령에 순종하여 움직인 거리는 상상을 초월한다. 주의 사자가 지시한 곳은 사마리아에서 남쪽 예루살렘을 지나 가사(Gaza)로 연결된 길이다. 특히 예루살렘에서 가사까지는 약 100km 되는 광야 길이다. 사마리아나 예루살렘과는 대조되는 공간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제 막 사마리아에 복음이 받아들여지고 있고, 사도들의 확증으로 사역이 탄력을 받을 수 있는 시점에서 주의 사자는 광야 길로 내려가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리고 빌립은, 이 명령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단순하게 순종하며 예루살렘을 지나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나아갔다.
    
-그는 최초로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이 아니다. 에티오피아 사람이었지만 이미 개종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볼 수 없듯 에티오피아 내시도 마찬가지였다. ‘누가’는 복음이 성령의 역사로 순수한 유대인을 넘어 사마리아 사람들과 비유대인이지만 유대교 안으로 들어온 이방인까지 확장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기록하여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성령의 명령과 감동에 지체하지 않고 순종하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모습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강권적이고 주권적인 역사로 빌립에게 복음 전도의 일을 지시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26~29절). 먼저 가야 할 곳을 지시하시고 또 만나야 할 사람도 지시하신다. 하나님의 복음이 땅끝 사람들에게까지 전해져야 한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시는 듯하다. 이처럼 성령께서 우리의 걸음걸음에도 우리가 머물러 있는 경계를 넘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지역과 뜻밖의 사람들에게로 나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가는 공동체이기를 소망해 본다.
    
*성경을 읽되 뜻을 모르는 이와 그 뜻을 명쾌하게 가르쳐줄 사람을 놀라운 방법으로 만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30~38절). 어찌된 영문인지 하필이면 이사야의 말씀을 읽고 있는 에티오피아의 내시에게 빌립을 보내셔서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임을 가르쳐 주고 세례를 주게 하셨다. 한 사람 에티오피아 내시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밀하게 준비하시고 민첩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된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를 통해 어떻게 일하실지 기대가 넘치는 아침이다.
    
*주님의 영이 빌립을 잡아채듯 갑자기 데려가셔서 다시는 내시가 그를 보지 못했다(39~40절). 빌립은 또 다른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빌립이 가고 싶은 지역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지역에 성령충만한 종을 자유자재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선명하다. 혹시 우리는 오히려 우리가 가고 싶은 지역을 위해 내 마음대로 성령을 부리지는 않을까? 그렇다고 여기에 응하시는 성령님도 아니지만…. 부디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마음껏 나와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를 부리시도록 우리의 생각과 소원, 결심까지도 내어드리는 걸음이기를 소망해 본다.
    
*한편 달리는 병거에서도 성경을 읽고 성경을 가르쳐주는 자의 말에 깊이 귀 기울이며 결국 믿고 세례를 받기까지 순종하는 내시의 모습이 너무도 도전된다. 나와 우리 공동체는 성경 읽기에 이렇게 깊이 빠져봤을까? 또 깨달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에 매우 단순하고 진실하게 반응하고 있을까?
    
    
    
*주님,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여 주님의 뜻대로 민첩하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말씀에 늘 빠져있고, 말씀을 늘 따라 살아내도록 성령 충만의 은혜를 갈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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