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백부장 고넬료 사건 1 _ 경계를 넘는 다는 것 [행 10:1-16]
 – 2024년 05월 22일
– 2024년 05월 22일 –
베드로가 욥바에 있을 때 하나님은 기도 중이던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신다.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를 불러오라는 지시였다. 이튿날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욥바에 도착할 즈음, 기도하러 옥상에 올라간 베드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또 다른 환상을 보게 된다. 부정한 음식들을 보여주시면서 잡아먹으라는 환상이었다. 이런 일이 세 번 반복되고 환상은 사라졌다.
 
‘누가’는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회심 사건을 무려 66절을 할애하며 소개하고 15장에서 재차 언급했다(행 15:7~9). 누가가 이 사건을 그만큼 크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만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도 열려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임한 환상을 통해 이방 선교의 문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간섭으로 예루살렘과 유다의 경계를 넘어 파격적으로 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1. 백부장 고넬료가 환상을 봄(1~8절)
베드로가 욥바에서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은 구원의 울타리 밖에 있다고 생각되었던 이방인들을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으로 불러들이시는 일을 준비하신다. 당시에는 유대-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통한 구원의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넬료의 회심은 이러한 편협한 생각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문이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음을 결정적으로 깨닫게 한다.
 
이방인이 교회로 영입되는 과정에서 이방인들이 먹는 부정한 음식물과 관련한 문제는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했다. 유대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은 이 문제가 이방인들을 교회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당한 걸림돌이 되었다. 그런데 이 장애물을 획기적으로 제거해 버리게 된 계기가 바로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환상이었다. 그러므로 고넬료 사건은 단순히 사람의 생각과 결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분명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던 사건이었다.
 
고넬료의 회심 사건은 크게 네 장면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장면은 가이사랴에 있는 백부장 고넬료 이야기이다(1~8절). 두 번째 장면은 욥바에 있는 베드로의 환상 이야기이다(9~23a절). 그리고 세 번째 장면은 고넬료와 베드로의 운명적인 만남과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 이야기(23b~48절)이다. 마지막 네 번째 장면은 이방인의 회심 사건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는 일(행 11:1~18절)로 구성된다. 누가의 기록을 통해 마치 시계의 톱니바퀴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맞아 돌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이를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향한 구원 계획을 철두철미하게 성취하시는 것을 보게 한다. 그 구원하시는 일을 열심히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임하여 우리가 구원의 백성이 된 것이다.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이 새로 조성한 신도시로서 유대 속주를 다스리는 로마 총독부가 있던 곳이다. 이 도시에 고넬료라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을 소개한다. 그의 이름 “고넬료(코넬리우스)”는 당시에 흔한 이름 중 하나였다. 주전 82년 “코넬리우스 술라”라는 로마 장군이 만 명의 노예를 한 번에 해방 시킨 적이 있었는데, 그 덕분에 자유민이 된 자들이 모두 그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 후손들도 같은 이름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단정할 수 없으나 본문의 고넬료 또한 자유민 출신이거나 자유민의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 그는 ‘이달리야 부대(유대 지역에 파견된 로마 군대)의 백부장(장교)이었다.
 
2절에서 그는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다고 기록한다. 그가 “하나님 경외자”였음을 시사한 것이다. “하나님 경외자”는 당시 이방인 중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례를 받았지만,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보이며 유대교 회당에 출석하였다. 당시 유대 지역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다른 이방인들과 동일하게 취급하였지만, 좀 더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그들을 포용하고 받아들이려 하였다. 따라서 단정할 수는 없으나 그는 이스라엘로 파견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할 뿐만 아니라 “백성을 많이 구제했다(2절).”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누구보다 믿음과 삶이 일치하는 삶을 산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8장의 에티오피아 내시와 고넬료는 모두 “하나님 경외자”이다. 이후 바울이 세운 교회의 이방인 신자 중에는 “하나님 경외자” 였다가 회심한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누가가 지속해서 “하나님 경외자”의 회심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그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던 이방인으로서 주님을 영접한 경우일 수 있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3절의 제 구 시는 오늘날 시간으로 오후 3시이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와 함께 백성이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고넬료도 이때를 따라 기도의 시간을 가진 것이다. 4절에서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라는 것에서 고넬료가 드린 기도가 하나님이 흠향하신 제사와 같은 것이며,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곧 응답해 주실 것을 암시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고넬료는 주의 천사의 음성에(4~6절) 믿음으로 순종한다(7~8절). 절대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순종의 행위로 보여준다. 고넬료는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7절)’에게 이 일을 다 이르고 베드로가 있는 욥바로 보낸다.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는 약 48km 떨어져 있다.
 
 
 
2. 베드로가 환상을 봄(9~16절)
이제 장면이 바뀐다. 두 번째 장면은 베드로가 머무는 욥바로 바뀐다. 고넬료가 보낸 세 사람이 욥바에 가까이 이르렀을 즈음,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다른 환상을 보여주신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고 “제 육 시”는 정오를 가리킨다. 그 습관을 따라 베드로는 정오쯤 옥상에 올라갔다(9절). 그런데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배고프다는 생각이 그의 기도 시간을 방해하고 있었다(10절). 참고로 정오는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식사 시간이 아니었다. 보통 느지막하게 가벼운 아침을 먹고 늦은 오후 시간에 충분한 식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아무튼 식사가 준비되기를 기다리던 베드로는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게 된다(10절).
 
베드로가 본 환상은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에 담긴 세 가지 종류의 짐승들이 그릇에 담겨 내려오는 것이었다(11절). 이 짐승들은 레위기 11장에서 식용으로 금지된 부정한 짐승들이었다. 곧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었다(12절).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창세기 1:30에서는 모두 사람이 먹을 음식으로 주셨다는 점이다. 그런데 곧이어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13절).”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와 같이 깨끗하지 않고 부정한 음식을 자기는 결코 먹을 수 없다고 손사래를 친다(14절). 그러자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규정하신 것을 네가 부정하다고 말하지 말라(15절)”고 하셨다. 이런 환상이 세 번 반복되고 환상은 사라졌다. 보통 성경에서 반복은 해당 주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기능을 한다. 이 환상은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이 환상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베드로가 본 환상은 이제부터 구약에서 규정한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구별이 사라졌으며 유대인 그리스도인은 모든 음식을 다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하나님께서 이러한 음식의 구별을 없애셨을까? 초대교회는 이 율법의 폐기는 예수님께서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은 그렇지 않다(막 7:15~16, 19).”라고 말씀하실 때 이미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바울은 로마서 14:14에서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다”라고 선언하였다.
 
 
 
나는?
-하나님이 기도하고 있는 고넬료에게 사자를 보내신다. 그는 이스라엘 점령국의 장교이지만, 동시에 구제와 기도에 힘쓰고 온 집안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의 친 백성이 아닌 언약의 바깥에 있던 이방인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를 찾아가셨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을 부르신 것과 같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다.
 
-어렴풋한 지식으로 하나님을 찾았고, 깨닫고 믿은 만큼 이웃을 향해 베풂의 삶을 실천한 그에게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응답하시고 반응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부르셨듯이, 지금도 내가 생각하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찾아가셔서 당신의 그릇으로 삼고 계신다.
 
 
-고넬료는 환상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명령한 대로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기 위해 집안의 하인 둘과 경건한 부하를 욥바로 보냈다. 그는 이 음성의 의미와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순종한다. 그에게 이런 마음이 있었기에 지배국의 장교가 피지배국의 종교를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때로 하나님은 내가 이해하지 못한 채 순종하는 일들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다 알고 나서야 움직이겠다고 생각하면 전혀 움직일 수 없다. 모험 없는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정한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가장 거룩한 계시를 그곳의 베드로에게 주신다. 하나님은 베드로가 머문 곳을 문제 삼지 않으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유대 법에서 부정하게 여기는 무두장이의 집에 거할 만큼 정결법의 한계는 넘었지만, 환상 중에 부정한 짐승을 잡아먹으라는 말에 “그간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절대 먹지 않았다”라는 말로 거절한다.
 
-그는 “모든 식물은 깨끗하다(막 7:19)”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마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내 지식이나 신념을 포기하기를 요구하는 새롭지만, 일리가 있는 말씀 앞에서 나는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고넬료나 베드로나 하나님의 강렬한 믿음의 도전 앞에 있다. 고넬료는 기꺼이 순종하는 모험가였지만, 베드로는 음식의 한계를 넘지 못하여 망설인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 먼저라는 강렬한 부르심 앞에 고집스럽게 고수했던 전통을 뒤로 하고 일어선다.
 
 
 
*주님, 모험 없는 믿음이 존재 하지 않음을 절감합니다. 무모한 믿음의 도전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주님, 내가 정한 한계를 뛰어넘는 용기가 제게 필요합니다. 말씀이 나를 새롭게 할 때 기꺼이 받아들이는 믿음을 주십시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선포한 대로 이루어지다 [왕하 7:3-20]

하나님은 나병 환자 넷을 이용하여 사마리아를 전쟁과 기근에서 구하신다. 이로써 엘리사를 통해 예고하신 말씀을 성취하신다. 아람의 군사들은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큰 군대의 소리를 듣고 도망갔다. 이에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