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하나님이 일으키셨으니, 믿음 안에 굳게 서라 [행 14:19-28]
 – 2024년 06월 01일
– 2024년 06월 01일 –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여행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한 일도 있었으나 복음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과 바나바는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리고서 안디옥으로 돌아간다.
    
1차 선교여행이 기록된 단락(13:4~14:28)을 이해하는 방식은 교회가 탄생하고 성장하는 과정에 주목하는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의 담대한 전도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의 결과 교회가 탄생하였다. 동일한 복음을 듣고 전혀 다르게 반응하는 상황에서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는 결국 하나님의 주권적인 놀라운 은혜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다. 또한 교회의 성장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고 이에 헌신된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인들의 지속적인 위협들 속에서 여의찮은 상황을 뚫고 재방문을 통해 확실한 공동체로 서게 하기 위한 섬김을 바라보아야 한다.
    
    
    
1.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음(19~20절)
이 단락은 선교 현장에서 직면할 수 있는 극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바울이 죽을 만큼 돌에 맞았으나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셨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모두가 바울처럼 돌을 맞는 것은 아니다. 혹은 돌에 맞는 것처럼 핍박받더라도 바울처럼 모두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누가’는 하나님이 바울의 생명을 지켜주신 것으로 해석한다(19절). 만약 유대인 대적자들이 죽은 것으로 착각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바울은 정말 죽음에 이르렀을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돌로 칠 만큼 미워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적개심이 극에 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까지 쫓아갔던 자기 모습과도 겹친다.
    
적대적인 유대인들의 잘못된 열심으로 인해 돌에 맞아 죽음의 문턱까지 갔을 때, 바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그의 소명 의식은 더욱 굳건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가’는 바울이 기력이 회복한 후에 다시 자신이 돌에 맞은 루스드라로 들어갔다는 것을 통해 선명하게 알 수 있다(20절). 그러나 무모하게 움직이지 않고 이튿날 더베로 떠났다는 기록을 통해 밤중에 잠시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번에도 바나바는 돌에 맞아 큰 위기에 빠진 바울을 돕는다. 바울은 함께 사역하는 동역자의 중요성을 새삼 깊게 다시 확인했을 것이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 바울도 홀로 사역할 수는 없었다. 바나바가 필요했다. 바나바는 바울의 좋은 위로자요, 동역자였을 것이다. 또 돌에 맞아 힘들어하는 바울을 도왔을 것이다. 거절당하는 아픔과 수모를 겪는 바울을 따뜻하게 위로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바나바의 모습은 선교의 아름다운 모델이 된다. 하나님께서도 삼위가 함께 서로 동역하듯, 결국 우리도 함께 하는 사역일 수밖에 없는데, 바나바와 같은 따뜻한 성품을 품어 하나님 나라를 함께 세워나가야 하지 않을까?
    
    
    
2. 1차 선교여행을 마치다(21~28절).
이 단락은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바울과 바나바가 새로 태어난 교회를 돌보는 이야기(21~22절), 교회의 지도자들을 세우는 장면(23절), 그리고 두 사람이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이야기(24~28절)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 벅찬 장면은 21절이다. 짧은 기록이지만, 곱씹어 볼수록 대단하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장면이다. 이 도시들에는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건재했다. 특히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 그런데도 바울과 바나바는 새로 태어난 교회를 돕기 원했고 그 도시들의 제자들을 방문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안위보다 새로 태어난 교회가 견고하게 세워지는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22절은 두 사람이 새로 태어난 교회의 제자들을 어떻게 도왔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먼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헸다. “굳게 하다(에스피테리조)”로 번역된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사도행전에서만 사용되었다(행 15:32, 41; 18:23). “용기를 북돋아 주다. 격려하다”라는 뜻이다. 사용된 본문에서 이 단어는 모두 교회를 견고하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확고하게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이 당한 핍박에 대한 소식은 제자들의 마음을 흔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요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바울은 그들을 직접 만나므로 굳게 하였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죽음의 상황을 벗어났던 바울의 격려는 제자들에게 큰 위로와 도전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한다. “머물다(엠메노)”라는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총 4회(행 14:22; 28:30; 갈 3:10; 히 8:9) 사용되었는데, 지속해서 한 장소에 꾸준히 머물러 있는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이다. 믿음이 갖는 꾸준함과 지속성을 강조한 것이다. 믿음은 순간적 혹은 일시적인 열정이 아니다. 끝까지 머물러 있는 신앙을 가지는 것이 믿음이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환난에 대해 경고한다.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에 뒤따르는 환난의 필연성을 강조한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기는 하나, 고난과 환난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주어지는 선택적인 복인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은혜는 선물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인내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준비되기 때문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들에게 믿음에 대해 견고한 요구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구체적으로 믿음으로 살아내도록 도와줄 방법이 필요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장로”들을 택하여 세운다. 장로들을 택하여 세우는 방식은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자신들이 세움을 받았던 그 방식을 따라 한다. 바로 금식과 기도이다. 어쩌면 이 방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았을까? 회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성도들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신뢰할 만한 지도자를 세울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결국 하나님의 절대적인 인도하심과 도우심 밖에 의지할 것이 없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일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고, 최종적으로 그들을 주께 위탁하였다(23절). “위탁하다(파라티데미)”라는 단어는 “다른 사람 앞에 누군가를 세우다”라는 의미이다. 사도행전에서 모두 4회 사용되고(행 14:23; 16:34; 17:3; 20:32) 바울이 훗날 에베소의 장로들을 주의 말씀에 부탁하는 장면에서도 사용된다. 즉, 교회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이제 바울과 바나바는 밤빌리아의 버가를 거쳐 앗달리아에서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온다. 눈에 띄는 것은 두 사람은 교회에 돌아와서도 복음을 전하는 것을 쉬지 않는다. “그곳에 이르러서 그들은 교회 회중을 불러 모으고서,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그들은 제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지냈다(새번역_27~28절).”
    
    
    
나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방해(세력)도 포기하지 않는다(19~20절).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멀리 루스드라까지 와서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다. 사탄은 우리가 포기할 때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 번의 승리에 도취하면 안 된다. 그 승리가 다음번의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고난 없는 복음의 삶은 존재할 수 없음을 기억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 좁은 길을 주님이 함께하신다.
    
-돌에 맞아 거의 죽을 지경에 직면했지만, 하나님이 “일으키셔서” 제자들 앞에서” 일어나, 이튿날” 더베로 향할 만큼 놀라운 회복을 경험한다. 바울을 죽은 자 가운데서 아들을 “일으키신” 기적은 하나님의 간섭과 돌보심이 아니고는 상상할 수 없는(딤후 3:11)것이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인생은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을 것이다(고후 4:9).
    
-방해(세력)도 포기하지 않았지만,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 전도 열정도 포기란 없었다.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이 돌에 맞아 쓰러진 바울을 “일어나게” 하셔서 다음 날 곧장 선교 여정을 이어가게 하신다. 이 부활의 주님으로 인해 예수의 복음을 전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을 주동했던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복음은 진정한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반드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한다.
    
    
-포기 없는 열정은 포기 없는 선교를 이어가게 한다. 바울은 원정을 온 유대인들에게 죽을 만큼 맞았으면서도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도시로 다시 들어간다(21절). 그곳에는 고난을 견디며 복음을 붙잡고 있는 갓 태어난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스드라에서의 경험을 통해 사명이 있는 한 부활의 능력이 자신을 지켜줄 것을 믿었기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기 생명을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행 20:24). 허허허 이런 바울이라니….
    
-죽을 고생을 했지만, 그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났고, 자신도 그 부활(일어남)을 직접 경험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요즘 나에게도 이 일어남이 필요하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영역에서 예상하지 못하는 연단을 경험하며 “일어남”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간절하다. 사탄의 강력한 준동에 쓰러지더라도 하나님이 일으켜 주심 때문에 나도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돌 맞은 흔적 드러내며 당당하게 주의 복음을 전해야 할 곳으로 나아가리라.
    
    
-포기 없는 선교는 곧 포기 없는 목양이었다. 바울은 선교한 곳을 재방문하여 제자들에게 고난이 닥쳐와도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한다(22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고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이 다 책임지려 하지 않았고 이제 막 세운 교회에 장로들을 세워 지속해서 돌보게 하였다. 바울은 지도자들을 주께 부탁하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할 뿐이었다. 바울을 통해 공동체에 실제로 작동되어야 할 “양육과 위임과 기도의 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우리 공동체에 이 원리가 잘 접목되고 있을까?
    
-바울과 바나바가 권한 당부가 내 마음을 채운다. “믿음 안에 거하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많은 환난을 겪는 것을 마땅한 일로 여기라” 그렇다. 야고보와 스데반이 그 뒤를 따랐고,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이 길을 걸어갔음을 알기에, 나도 역시 이 길을 걷고 있음을 오늘 다시 확인한다. 내 앞에 많은 고난의 파도를 넘어가야 하는 긴 믿음의 여정이 놓여 있음을 가쁜 숨 몰아쉬며 바라보게 된다. 주님의 길을 따랐기에 마땅한 일로 여기며 믿음 안에 늘 거하리라! 사탄에게 내 마음과 목양의 길을 내어놓지 않으리라!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의 마음을 여신 벅찬 감동이 가득 차 있었다. 감동함으로 그 역사를 안디옥의 성도들에게 보고한다.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니라 그 걸음을 인도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경륜을 이루신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보고한다. 나도 이 모습을 기억하겠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였다. 그러니 나의 입술에서부터, 나의 모든것을 통해 하나님만 먼저 높여야 하지 않겠는가! 더온누리 공동체의 모든 여정이 하나님이 하신 역사였노라고 늘 하나님을 자랑하고 자랑하리라!
    
    
    
*주님, 사탄에게 맞아 쓰러지고 넘어져도 하나님이 “일으켜” 주실 것을 신뢰합니다. 다시 일어서고 일어서겠습니다.
*주님, 믿음 안에 머물겠습니다. 환난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주님,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내가 한 것처럼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고 역사였습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