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일치된 원리, 예루살렘 교회의 편지 [행 15:12-35]
 – 2024년 06월 03일
– 2024년 06월 03일 –
베드로의 연설 이후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 앞에서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어떤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는지 보고한다. 교회는 잠잠히 그들의 보고를 들을 뿐이었다. 그리고 야고보가 나선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이 선지자 아모스의 예언과 일치함을 강조한다. 동시에 이방인들이 최소한 유대-그리스도인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서 이 논쟁을 끝내려 한다(12-21절). 
야고보는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고 있지 않다. 물론 야고보가 베드로와 바울과 같은 입장에 서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서 이방인의 입교를 위해 유대교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는 유대-그리스도인들의 입장 역시 고려하는 현명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날 수도 있는 분위기에서 야고보는 다른 한쪽의 체면을 세워줌으로서 격렬했던 논쟁을 마무리한다. 야고보가 정리한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은 구약성경의 예언과도 일치하며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열려있음을 확인한 중요한 결정이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야고보의 제안을 한마음으로 받아들였고, 이 결정을 전달하기 위해 유다와 실라를 선택하여 안디옥으로 보낸다. 이들은 특사의 자격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 사항이 담긴 편지를 가지고 수리아 지역의 교회들을 방문한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복음으로 인한 평안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유대주의자들로 때문에 어려웠던 안디옥 교회는 제자리를 찾는다(22-35절). 
초대교회에도 어려움은 있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신학적인 문제였지만, 신앙의 색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관계적인 어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잠재적 어려움들까지도 성숙한 신앙적 태도로 잘 극복하였다. 예루살렘 교회의 의사 결정과 결과에 대한 순종의 모습은 오늘날 교회들이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모델이다. 또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의 긴밀한 상호보완적 관계는 교회 공동체의 수평적 구조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또한 교회가 정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는 아니지만, 정치가 필요 하지 않는 공동체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 
 
 
 
1.바울과 바나바의 보고(12절)
베드로에 이어 바나바와 바울은 1차 선교여행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에 대하여 보고한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얼마나 적대적이었으며 교만하고 악했는지에 대해서도 말했을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이 어떻게 이방인들의 마음을 여시고 그들에게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셨는지에 대해서도 보고했을 것이다. 누가는 두 사람의 보고를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간증은 베드로의 간증과 거의 일치했을 것이며, 그가 내린 결론에 대해 보충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야고보의 연설(13~21절)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이방인들의 율법 준수와 관련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대척점에 서 있는 성도들이 상당수 있었다(5절). 야고보는 논쟁의 당사자인 바울과 바나바를 직접적으로 지지하기보다 예수의 수제자로 존경받는 베드로의 입장을 회중에게 상기 시킨다. 이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최대한 중재자적인 입장에 있음을 알리려는 행동일 것이다. 야고보는 유대-그리스도인들을 배려하는 지혜로움을 발휘한 것이다. 14절에서 야고보는 베드로의 연설만을 언급하는 지혜로움을 발휘한다. 
 
15~18절까지 야고보는 베드로에게 일어난 사건들이 결코 우연히 아니라 약속의 성취임을 강조한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신 내용들이었다. 야고보는 구약을 인용함으로서 베드로의 경험과 자신의 결정이 성경과 일치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19~21절은 야고보 자신의 의견을 정리한 것이다. 19절에서 “괴롭게 하지 말고” 라는 표현을 통해 이방인들의 입교 시에 유대인의 전통을 요구하는 것을 이방-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일로 해석한다. 그럼에도 절충안을 제시하는데, 이방-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숭배와 음행, 목매어 죽인 것과 피 자체를 멀리 할 것”의 네 가지의 금지 사항을 지켜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 네 가지 금지 조항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정결의식과 관련된 정체성의 문제였고, 이방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야고보는 유대-그리스도인과 이방-그리스도인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절충점을 찾은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렸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당연히 지난날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 점을 분명히 한다. 
 
 우상숭배는 이방 신전에서 이루어졌고 음행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목매어 죽이는 방식의 도축으로 인해 피가 고기 안에 남아 있던 당시의 풍습을 생각할 때 피를 멀리하는 것은 적어도 동물에 대한 윤리적 소비를 요구한 것이다. 우상숭배, 음행, 살해를 삼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받기 싫은 대접을 너도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말라고 요약할 수 있다. 야고보는 할례와 같은 유대교의 의식을 지키는 대신에 윤리적인 명령을 요구함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의식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3.예루살렘 교회의 편지를 안디옥 교회에 보내다(22~35절)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 안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택하여 안디옥 교회로 보낸다. 이미 안디옥 교회에서 야고보의 권위를 사칭하고 있는 자들을 상대하려면 인격적으로나,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준비된 지도자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누가는 그들을 일컬어 “인도자”라고 표현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마무리하고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려고 한다. 이 일을 위해 인도자들 가운데 사람들을 택하여 파송한다. 
 
24~26절을 통해 형제 교회의 어려움이 자신들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된 후 보이는 예루살렘 교회의 태도를 서술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에 어느 정도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24절). 또 바울과 바나바를 후하게 평가함으로 안디옥 교회를 존중하고 있음을 충분하게 보여준다. 그들을 생명을 아끼지 않은 사람으로 묘사한다(26절).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는 “만장일치”로 야고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번역을 직역하면 “마음을 같이했다”로 할 수 있다. 
 
28절은 이러한 성숙한 결정을 내린 원인이 “성령”이심을 말한다. “성령과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성령이 역사하였음을 고백한다. 누가는 이 모든 과정에 성령이 개입하여 함께 하셨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초대교회가 직면한 신학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이 있었고 이에 대한 지도자들과 성도들의 순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성령이 역사하셨음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표현이 “요긴한 것들”이다. 이 단어는 “부득이한, 불가피한”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에 아무런 짐도 지우지 않기를 원했다는 것은 안디옥 교회를 최대한 배려하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네 가지 금지 조항들은 안디옥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배려하는 차원이었다. 이방-그리스도인들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다독여 주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30~35절 단락의 시작을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가 보낸 편지를 받은 안디옥 교회가 읽고 그것을 “위로”로 받아들였다고 기록한다. “위로”로 느끼게 된 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보낸 편지를 통해 예루살렘 교회가 우월적 위치에서 안디옥 교회를 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는 것이고, 네 가지 금지 조항들에도 불구하고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이 옳지 않은 것으로 증명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이 되었다는 점이다. 
32절을 통해 어려움을 겪은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유다와 실라는 여러 말로 안디옥의 형제들을 권면하고 굳게 하였다. “여러 말”이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다. 유다와 실라가 선지자였다는 누가의 부가 설명은 그들의 말이 단지 인간의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음을 깨닫게 해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마음을 견고하게 만든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주의자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던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을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했다는 사실은 시사한 바가 크다. 잘못 적용된 말씀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아픔이 되기도 하지만, 올바로 선포된 말씀은 교회를 하나 되게 하고 성도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회복시킨다. 
 
이 모든 사역을 마치고 파송된 지도자들이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간다(33절). 그리고 남은 지도자 바울과 바나바는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계속해서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한다(35절). 신학적인 걸림돌이 제거된 후 교회가 더욱 복음 전파에 힘을 얻었음을 보여준다. 
 
 
 
나는?
-베드로의 발언에 유대인들이 침묵하자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이 해하신 표적과 기사를 소개한다. 고넬료 사건뿐이었다면 예외로 간주될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의 추가 발언은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명백히 보여주는 산 증거들이 되었을 것이다. 실증되지 않고 열매 맺지 않는 진리는 없다. 진리를 믿고 있는지는 삶의 열매로 알 수 있다. 
 
-야고보는 베드로의 선교 현장에서의 증언을 환기 시킨 후 이것이 아모스 선지자(암 9:11~12)를 비롯하여 하나님이 이미 예부터 말씀하신 일을 성취하신 것이라고 설명한다.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의 이런 모습에서 여러 대립되는 의견들과 경험들을 진지하게 청취하고 성경을 토대로 벌어진 일들을 해석하여 하나님의 사역 원리와 뜻을 규명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이론만으로는 진리의 중심에 이를 수 없음도 깨닫게 된다. 현장의 역사라는 증거와 기록된 말씀의 증언이 함께 일할 때 진리의 중심에 이를 수 있다. 
 
-이방인을 자기 백성으로 부르시는 것은 임시방편이 아닌 처음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역사 속에서 알려 오신 일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심은 그로 인해 땅의 온 족속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었고(창 12:3), 다윗의 왕조를 회복하실 때 에돔을 포함한 모든 이방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려고 작정하셨다(암 9:11~12). 또 바로의 속박 아래 있던 자들을 “돌보아” 구원하셨던 하나님(출 3:6; 4:31)이 이방인을 포함하여 사망 아래 있던 모든 이들을 “돌보심으로”새 이스라엘을 창조하고 계신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렇게 신중하게 얻은 회의 결과를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인 유다와 실라를 세워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보내어 알린다. 예루살렘 교회의 따뜻한 배려이지 않는가!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도 따뜻한 배려가 살아있는 교회이기를 소망한다. 
 
-이제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로 부른다. 또 자신들의 지시도 받지 않은 채 구원을 위해 할례를 요구하는 자들을 비판하고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 교회가 사랑하는 일꾼으로 인정한다. 앞서 안디옥 교회에 온 유대에서 올라온 자들은(유대주의자) 그릇된 지식으로 성도들의 마음을 괴롭고 혼란스럽게 한 반면에, 두 일꾼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었기에 당연한 것이었다. 
 
-공동체의 허락과 인정을 받는 것이 때로 번거롭게 느껴지거나 간섭처럼 보일 수 있다. 지도자의 지도와 공동체의 도움을 받을 때 우리는 안전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나의 지식과 열정으로 도리어 공동체를 괴롭게 할 수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공동체가 토론하여 얻은 결론을 성령이 주신 합의라고 고백했다. 그렇게 고백할 만큼 그들은 자기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말씀에 귀를 기울였으며, 성령이 이미 하신 일에 주목하였다. 그런 결정이었기에 안디옥 교회가 큰 위로와 기쁨을 얻었을 것이다. 성령이 이끄시는 공동체의 언어는 자기부정의 언어이다. 자기중심적인 탐욕의 언어는 공동체를 분산시킨다. 
 
 
 
*주님, 야고보의 지혜로움을 구합니다. 이도저도 아닌 방관자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선명하게 절충하는 그의 지혜가 고픕니다. 
*주님, 결국 구원의 삶은 의식과 형식보다 방식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의식 중심이기 보다 방식대로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큰 교회는 규모가 커서가 아니라 마음이 커서 큰 교회임을 깨닫습니다. 더온누리 공동체가 큰 교회이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 일에는 기쁨이 넘치는 것을 확인합니다. 과정이 인내를 요구하여도 결국 희락의 은혜를 주실 성령을 의지하여 꿋꿋이 나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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