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결별, 하지만 각자 복음 전도의 길로! [행 15:36-16:15]
 – 2024년 06월 04일
– 2024년 06월 04일 –
행 15:36-16:15 결별, 하지만 각자 복음 전도의 길로!
 
유다와 실라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온 예루살렘 교회의 편지는 안디옥 교회를 거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으로 전달되었고, 그 지역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런데 모든 면에서 모범적으로 보였던 안디옥 교회가 예상치 못한 아픔을 겪게 된다. 마가 요한의 일로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갈라진 것이다. 바나바와 갈라진 바울은 실라와 함께 마게도냐로 간다. 원래의 목적지는 아니었지만, 바울과 실라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으로 향한다. 순종은 곧 열매를 맺는데, 빌립보에서 두아디라 성 출신의 루디아와 그 가족이 회심한다. 또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을 고쳐준다. 2차 선교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1.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15:36~41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으나 바울은 바나바에게 자신들이 세웠던 교회들과 형제들을 방문하여 돌아보자고 요청한다(36절). 이때 바나바가 첫 선교여행에서 도중에 이탈한 조카 마가 요한을 데려가자고 요청한다(37절). 그러나 바울은 마가를 신뢰할 수 없었기에 단호하게 거절한다(38절). 두 사람의 결별은 표면적으로 마가 요한의 선교여행 동행 여부 때문이었다. ‘누가’는 두 지도자의 결별을 매우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동시에 하나님의 복음 역사가 사람의 실수와 연약함으로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드러낸다. 다양한 상황과 여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복음의 역사 뒤에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은 성령을 언급하는 구절들과 두 지도자의 결별 이후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이 영적으로 견고해지고 수적으로 성장했음을 증언하는 구절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은 초대교회 입장에서 매우 안타까운 사건이었으나, ‘누가’는 이 사건에 크게 비중을 두지 않는다. 두 사람의 결별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첫째, 열정에는 어려움이 따른다는 점이다. 만약 바울이 선교지를 다시 방문하려는 열정이 없었다면,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길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그의 열정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바울은 마가라는 실패자를 오래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어려움을 굳이 감수할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의 결정은 예상하지 못한 다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데, 바로 바나바의 결별 선언이었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이런 열정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열정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바울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게 된다. 둘째, 영적 훈련은 멈출 수 없다는 점이다. 바울과 바나바라는 초대교회의 훌륭한 두 지도자 사이에 불화가 존재했다면 평범한 우리들은 어떨까? 불화가 발생할 가능성은 훨씬 높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화가 발생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특히 바울처럼 고집을 꺾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자 하다(에불레토_37절)”로 번역된 단어의 시제는 미완료 형이다. 즉 바나바가 계속해서 바울과 소통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소통을 멈추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쉽게도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결별하여 각자의 길을 갔다고 기록한다(39절). “심히 다투었다”라는 표현은 도저히 의견 일치를 이룰 수 없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의미이다. 두 사람의 결별을 바라보며 그럼에도 최후까지 소통을 멈추면 안 된다는 것을 절감한다. 성숙한 신앙인은 결과와 과정 모두 중요하게 여기기에 대화의 과정에 섣불리 결론을 끌어오면 곤란하다.
 
한편 어떤 이들은 두 사람의 결별로 선교팀이 두 팀이 되었으니, 긍정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당연히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그리고 ‘누가’도 결과적으로 바울의 선교가 성공적이었음을 보고한다(40~41절). 그렇지만 공동체에서 발생한 분열을 정당화하기는 어렵다. ‘누가’는 이렇듯 지도자들의 모습을 솔직하게 묘사함으로써 이런 상황에서도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 나라 복음 전파는 사람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 그 성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다.
 
 
 
2. 바울의 새로운 동역자 디모데(16:1~5절)
이 단락은 디모데가 선교팀의 새로운 일원이 되는 것과(1~3절), 바울의 선교팀이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에 전달하는 것(4~5절) 구성된다. ‘누가’는 바울이 디모데를 선택한 이유에 대하여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사람(2절)”이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마가로 인해 바나바와 결별한 바울이 새로운 동역자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 “사람들의 평판(칭찬)”이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또, 구원을 얻기 위한 절차로 “할례”를 행하는 것을 당연하게 주장한 유대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었는데,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행하면서까지 선교팀의 일원이 되게 하였다. 매우 놀랍다.
그렇다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왜 할례를 행하게 하였을까? 먼저, 첫째, 선교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디모데는 평판이 좋았고 혼혈 유대인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할례를 받지 않았다면 다른 유대인들에게 결코 유대인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유대인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선교 전략을 보았을 때 디모데의 무 할례는 적대적인 유대인들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맥락에서 디모데가 할례를 받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의 모습을 통해 복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고집과 생각을 버리고 조절할 수 있는 탁월한 유연성이 보인다. 둘째, 목양적인 이유 때문이다. 바울은 디모데를 무척 아꼈다. 그가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하기를 원한 마음이 가득 있다. 바울은 디모데가 효율적으로 사역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배려하였다. 할례의 시행은 그의 영적 부담을 덜어 주려고 하였다. 결국 선교는 사람을 얻고, 사람을 세우는 일이다. 사람을 무시하거나 잃으면 올바른 선교의 모습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갈라디아 교회를 방문한 바울의 사역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정한 규례를 교회들에 잘 전달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방문을 통해 교회들은 믿음에 더욱 굳건해졌고 성도들의 숫자가 날마다 늘어나게 되었다. 바울의 갈라디아 사역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검증된 사역자들, 그리고 실제적인 전략은 언제 어디서나 꼭 필요한 필승 조합이다.
 
 
 
3.2차 선교여행, 빌립보에서의 사역(11:6~18).
이 단락은 바울의 선교 방식에 있어서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바울은 회당 전략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함께 사용한다. 성령의 역사를 사람의 지혜와 지식으로 제한하거나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 단락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심, 환상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과 같이 종합선물 세트와 같은 초자연적인 역사를 접한다. 지나치게 강박적으로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를 배제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최소한 성령의 역사로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났다는 사실만 담담히 인정만 해도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시각이 열릴 것이다.
 
6~10절은 본격적인 2차 선교여행의 시작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바울 일행을 그들의 계획과 다르게 인도하신다. 6절은 아시아로 가려는 계획을 하나님께서 막으심으로 포기해야 했음을 알린다. 이런 일은 7절에서도 반복된다. 무시아에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계속해서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른 곳으로 인도하신 이유는 9절에서야 밝혀진다. 바울이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을 본 것이다. 결국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게도냐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 단락은 성령께서 자기 백성과 소통하시는 두 가지 방식을 보여준다. 첫째, 인도하심이다. ‘누가’는 성령이 바울의 계획에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관여하셨다고 기록한다. 성령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막으셨다(6절). 예수의 영은 바울이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7절).’ 하나님이 바울을 마게도냐로 부르셨다는(10절) 것과 같이 성령이 인도하심이 어떤 구체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함구하지만, 바울의 길을 성령이 인도하셨다고 기록할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이런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것에 익숙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바울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누가’는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게 묘사한다. 그렇기에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방식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인도하시는 이유와 목적에 대한 깨달음과 반응이다. 바울은 다만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했고 순종했다. “힘쓰니, 인정함 이러라(10절)”는 표현은 바울이 그들의 계획과 다른 인도하심에 대하여도 적극적으로 순종했음을 보여준다. 순종하지 않으면서 인도하심을 기대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인도하심에 대한 기대는 순종을 전제한다.
 
드로아에서의 환상은 오순절 설교에서 인용한 요엘의 예언인, ‘너희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라는 말씀을 성취한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에 의한 진로 결정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복음이 건너갔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로마 세계 안에 머물고 있기에 문화권을 넘어 선교적 도약을 했다고 보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수 있겠다.
 
11~18절은 빌립보에서의 사역을 서술한다. 바울의 여행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축약적인 서술로 보여준다. 드로아에서 빌립보까지는 약 240km의 여행이었다. 그런데 거의 이틀 만에 끝낸다. 행 20:6에서 돌아오는 길이 오 일 정도 걸렸던 것에 비하면 빌립보기까지의 여행은 아주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 셈이다. 바울 일행은 드디어 마게도냐 지역의 첫 번째 도시 빌립보라는 선교지에 도착한다. “첫 성”이라는 표현은 지리적인 위치를 가리키는 표현이기보다, 사역의 중요도를 가리킨다. 당시의 마게도냐의 행정 수도는 데살로니가였으나 “작은 로마”라고 불렸던 빌립보는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또한 당시 마게도냐의 가장 큰 도시는 ‘암피폴리스’였기에 “첫”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한”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먼저 기도처(프로쉬케)를 찾았다(13절). 빌립보에는 회당을 세울 수 있는 최소 단위인 유대인 남자 열 명이 없었다. 하지만 비교적 공식화된 기도처가 있었다. 바울이 ‘여자만’ 모인 곳에서 복음을 전한다. 그는 여건과 상황에 상관없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성령은 이런 바울의 사역에 “루디아”의 회심으로 응답해 주신다(15절). 루디아는 이미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인이었다(14절). 그녀는 이미 하나님 경외자였고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나중에 “공중 모임”을 하는 것을 보면(40절), 부유한 사업가일 가능성이 크다. 바울은 루디아를 비롯한 ‘하나님 경외자’들을 일차 전도 대상자로 삼는다.
 
 
 
나는?
-안디옥 교회가 안정적으로 성장하자 바울은 바나바에게 1차 선교여행 때 세운 교회를 돌아보고 양육하러 각 성을 방문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재방문에 마음을 같이 하던 두 지도자가 1차 선교여행 때 일방적으로 돌아가 버린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일에서는 주장이 달라서 큰 논쟁을 벌인 후 결국 갈라선다. 둘 다 옳고, 진심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갈등이나 결별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또 반드시 같이해야 선한 것만은 아니다.
 
-마가 요한의 동행에 있어서는 의견이 달랐으나 복음 증거에 대한 각자의 열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고향 구브로로 가서 교회를 세웠고, 바울은 실라를 동역자를 맞아서 수리기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를 견고히 하였다. 훗날 마가 요한이 바울의 옥바라지를 하는 영적 아들로 성장한 것을 보면 바울의 진심을 선의로 받아들인 듯하다(딤후 4:11). 의견이 다르더라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진심으로 대할 때 하나님은 다양한 기질과 견해를 새로운 사역의 원동력으로 삼으실 것이다.
 
-바울은 자신에게 사역의 길을 열어주었던 신앙의 선배이자 든든한 후원자인 바나바를 잃었지만, 젊고 참신한 사역자 실라와 디모데를 얻었다. 특히 디모데는 유대인 어머니와 이방인 아버지를 두었고 그의 신앙은 주변 지역의 형제들까지 칭찬할 정도였다. 바울은 유대인 사역에 걸림돌이 없도록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였다. 구원의 조건으로 할례를 요구할 때는 공의회까지 열면서 반대했지만, 사역의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언제든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전 9:19, 20).
 
 
-성령이 바울과 아시아 남부 전도를 막으신다. 성령이 함께하시면 늘 승승장구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바울 일행은 북부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을 거쳐 무시아 맞은 편에 있는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하나님이 막으신다. 성령은 선교의 기획자이자 파송자일 뿐 아니라 선교지를 결정하고 자기 백성을 부르실 권한도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 계획이 막히고 중단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실패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새로운 뜻을 알리는 안내 표시일 뿐이다.
 
-바울은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청하는 것을 보았다. 바울 일행은 그 환상을 유럽으로 건너가라는 뜻으로 인정한다. 당시 유럽은 세계를 제패한 로마 제국의 물질주의와 세속주의가 만연했지만, 영적으로는 황무하였다. 복음이 전해져야 할 황무한 땅으로 바울 일행을 강권하여 부르셨다.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여인 루디아를 만나게 하셨다. 루디아의 마음을 여셔서 그 가정을 빌립보 선교의 전진 기지로 삼으신다. 우리가 복음에 대한 확신과 말씀의 능력으로 갖춰질 때 “건너와서 도우라”한 환상 속의 마게도냐 사람 같은, 때가 찬 영혼과 만나게 하실 것이다.
 
 
 
 
*주님, 결별했지만 각자가 복음 증거의 삶을 지속한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은 결국 복음 전도의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지금 당장 싸울 기세로 달려드는 세상을 향해 복음으로 변화된 삶을 보여주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주님, 성령의 인도하심을 신뢰합니다. 우리의 계획이 아니라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반응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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