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을 고쳐준다. 바울과 실라는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쳤다는 이유로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힌다. 감옥이 열리고 차꼬가 풀어지는 기적이 일어났지만, 바울 일행은 감옥 안을 떠나지 않았고, 그 결과 자결하려던 간수와 그 가족을 살리게 되었다. 결국 빌립보의 관리들 앞에서 당당한 모습으로 영접을 받으며 감옥을 떠나게 된다. 마게도냐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2차 선교여행의 서막이 강력하게 오른 것이다.
1. 귀신 들린 여종(16~18절)
본 단락은 귀신 들려서 점을 치는 한 여종을 고쳐주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건설된 로마의 식민지 빌립보에서 일어난 기적이었다. 대표적인 이방 도시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의도치 않았지만, 기적이 행하여졌고 복음의 능력이 입증되었다. 그로 인해 바울이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이 사건이 빌립보에서의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루디아가 회심하는 과정에서는 말씀을 풀어서 해석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면,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 지식과 이해가 없는 도시의 사역에서는 기적이 사용되었다.
2. 바울과 실라의 투옥(19~24절)
바울이 여종을 고쳐준 사건은 이방인 대부분에게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지만, 동시에 분노를 일으켰다. ‘누가’는 바울의 축귀 이후 현상을 묘사하면서 여종의 기쁨, 바울 일행의 감사, 감격에 대한 보고로 이어가지 않는다. 이제 여종 주인의 관점에서 사태를 풀어간다.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들의 유익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것을 보고 분노한다. 즉, 경제적 타격을 입은 것에 대해 분노한다(19절).
‘붙잡아 끌어가다’라는 동사는 완력이 동원된 제압이었음을 시사한다. 주인들은 자신들의 수익이 끊어지자, 바울과 실라의 약점을 파악하고 그들을 고립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인데 우리 도시를 매우 소란스럽게 하였다’라고 말한다. “소란스럽게 하다(에크타라세인)”는 신약성경에서 여기에서만 쓰인 단어이다. 주인들은 “우리 도시”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들과 도시 행정관들 사이의 공동체 의식을 짐작하게 한다. 또 지역의 이해와 관습에 외부인이 개입한 것을 강조함으로써 경계나 적의를 불러일으키려고 한 것이다. 21절에서도 “우리 로마인들”이라고 반복하며 로마인들이 수용할 수 없는 관습을 전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빌립보는 로마의 퇴역 군인들이 모여 살던 지역이어서 유독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다. 여종의 주인들은 이 점을 활용하여 바울과 실라를 유대인들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로마 사람임을 부각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바울과 실라를 군중들과 차단하고 자신들의 편으로 만든 것이다. 또한 경제적 손실로 인한 자신들의 분노는 감추고 바울과 실라가 위험한 신흥 종교를 전하고 있다고 선동하여 불안감을 가중했다. 이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한 듯 보였다. 바울과 실라가 속수무책으로 투옥되었기 때문이다.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가장 깊은 옥에 갇히게 된다.
3. 간수의 회심(25~34절)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바울과 실라였다. 이를 통해 그들이 결코 실패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 기도와 찬송 소리를 “죄수들이 들었다”라고 언급한다. 한밤중 깊은 감옥 속에서 울려 퍼지는 찬송은 훗날 죄수들의 변화가 이 기도와 찬양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승리는 영적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기도와 찬양은 예기치 않는 결과를 가져온다. 큰 지진이 났고, 감옥의 터가 흔들리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묶인 것이 풀렸다(26절). 사도행전 12:6~11에서 베드로가 감옥에 구출될 때처럼 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이 나고 감옥터가 흔들렸으니 감옥문이 열린 것까지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죄수들의 묶인 것까지 풀린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힘들다. 나중에는 죄수들의 마음이 열리는 것까지 이어질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것은 이 풀림에 대한 바울과 실라의 반응이다. 베드로처럼 감옥에서 나가지 않고 그들은 그대로 남아 있기로 결정한다. 두 사람은 이 기적 사건을, 자신들을 위한 기회로 삼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임한 자유가 또 다른 이에게는 절망과 죽음의 이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 알고 죽음을 선택하려던 간수를 안심 시키고 감옥에 그대로 남는 길을 선택한다. 이런 두 사람의 결정은 다른 모든 죄수 역시 두 사람을 따라 감옥에 남는 편을 택하게 만든다(28절). 이것이 복음의 본질이고 능력이 아니겠는가! 나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 오히려 나를 희생하여 남을 살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주신 제자의 길이고 십자가의 길이다.
간수는 감옥 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갔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상식이다. 이에 다음 날 모욕과 수치를 당하면서 처형당할 것이 분명하였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였다(27절). 빌립보가 군사적 요충지였던 사실을 감안하면, 이 간수 역시 군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충성스러운 직책 의식 때문에 자살을 결심하였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런 자살을 영예로운 종결로 보았다. 이에 바울은 급히 그가 자살하지 못하도록 막았다(28절). 간수는 등불을 들고 뛰어 들어와 두려움에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린다(29절). 간수는 “제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라고, 묻는다(30절). 바울은 가이사가 아니라 예수를 “주”로 믿으라고 요구한다. 그러면 간수와 그 가족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한다(31절). 그리고 그 집안 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32절).
말씀을 들은 그들은 그 밤에 바울과 실라의 상처를 씻어준 후 온 집안이 “바로” 세례를 받았다(33절). 이는 그 상황이 얼마나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바울과 실라는 여전히 죄수 신분이었고 그들이 감옥을 이탈하여 치료받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은 후 간수와 바울과 실라는 기쁨으로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눈다. 한밤중의 식사가 얼마나 규모 있게 차릴 수 있었겠느냐는 차지하더라도 이방인과 유대인이 한자리에서 식탁을 공유하는 것으로 둘 사이의 경계와 장벽이 허물어지는 사건임이 틀림없다.
하나님은 한밤중의 빌립보에 큰 지진을 일으키셨다. 이것은 단지 지적인 과시나 바울의 탈옥 기회 부여에 의미가 있지 않다. 그것은 간수와 그 가족의 변화를 위한 계기 마련에 깊은 뜻이 있었다.
4. 빌립보를 떠나는 바울과 실라(35~40절)
이 단락은 하나님이 바울과 실라에게 베푸신 통쾌한 승리를 그리고 있다. 여종의 주인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성공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빌립보의 모든 관리와 주민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아무도 바울과 실라를 도울 수 없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상관들이 바울과 실라를 놓아주기로 한 것이다. 실패한 것 같았던 하나님 나라가 승리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승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바울과 실라는 석방의 소식을 듣고 매우 충격적인 사실을 상관들에게 전달한다. 자신들 역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빌립보 성의 관리들은 충격과 두려움에 빠졌다. 로마 시민에게는 고문과 매질을 가할 수 없도록 로마법이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그동안 수세에 몰렸던 바울과 실라는 적어도 빌립보에서는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다. 빌립보의 관리들은 바울과 실라에게 제발 이 성을 떠나달라고 간청하게 된다.
나는?
-바울은 여러 날에 걸쳐 자신을 따라오는 귀신 들린 여종 때문에 괴로워한다.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라고 칭송하는 점치는 그녀에게서 바울은 결국 귀신을 쫓아버린다. 그의 말이 틀려서가 아니라 그의 의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귀신 들린 여종은 바울을 하나님보다 더 비중 있게 높였다. 하지만 바울은 이에 속지 않는다. 나를 향한 지나친 기대와 찬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선한 분별력의 대상은 가장 먼저 자신에게여야 한다. 나를 통해 교묘한 나의 영광이 아니라 온전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귀신의 말은 옳았지만 인정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귀신을 여종에게서 나오게 하신다. 옳은 듯 들리는 간교한 말로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이 사탄이다. 그리하여 복음 증거를 방해한다. 이를 잊으면 안 된다.
-귀신 들린 여종의 고통을 담보로 큰 이익을 취하던 비정한 주인들은 예수의 이름과 권세에 저항한다. 주인은 바울이 그 도시의 관습을 전복할 만큼 부당한 영향력을 끼쳤으며 빌립보의 품위를 손상시킬 만한 기이한 풍속을 퍼뜨린다고 고소한다. 진정한 복음의 능력은 사람을 경제적 실리의 수단으로 삼는 모든 악한 체제를 뒤집어엎는다. 귀신 들린 여종의 회복을 통해 이 비정한 세상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사랑의 왕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뿐임을 절감한다.
-무리는 거짓 선전을 맹목적으로 동조하고 악의 병기로 전락한 정치권력은 자유와 해방과 구원의 복음을 든 사람들을 때리고 가두고 꽁꽁 묶었다. 하지만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한다. 예수의 권세가 가이사의 권세보다 강하다는 것을 천명하기 위한 거룩한 시위이자 장엄한 고백이었다. 이에 견고한 제국의 지하 감옥의 터가 무너지고 모든 매인 것이 풀렸다.
-죄수들이 모두 달아났을 것이라는 생각에 간수는 명예로운 죽음을 결심한다. 세상의 지배자는 명령 수행에 실패한 백성이 자결을 선택하게 할 만큼 맹목적인 충성 이데올로기로 다스린다. 하지만 참 “주”이신 예수는 그런 억압과 죽음의 문화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주 예수를 믿으라.”라는 초청은 통치자를 바꾸라는 요구이고, 나를 이용하고 착취하고 강요하던 세상에 대해 변절하라는 요구이다. 이것이 전격적인 “주권의 전환”의 믿음이다. 간수의 믿음은 거짓 왕국 로마에 대한 헛된 충성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헛된 충성을 허물어뜨리고 진정한 세상의 주인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면한다.
*여종을 귀신에게서 놓아주어 자유케 하신 하나님이 이제는 옥문을 여셔서 자유케 하시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신다(25~34절).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지만, 정작 자유가 필요한 사람은 간수였다. 그러므로 옥문을 여신 목적은 바울과 실라의 탈출이 아니다. 열린 옥문의 기적을 통해 간수와 그 집에 참된 영적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였다. 바울과 실라가 당한 고난과 매임은 사역의 지체나 실패가 아니라 한 가정을 구원하시기 위한 은혜의 방편이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수고와 고난을 통해서 죄와 사망에 매인 이들을 자유케 하고 계신다.
*여종의 주인은 종이 귀신에게서 놓여 온전해진 것을 기뻐해야 마땅한데도, 돈벌이하지 못하게 되자 바울과 실라를 거짓 고소한다. 관원들도 바울과 실라를 유대인으로 알았을 때와 그들이 로마 시민인 것을 알았을 때 전혀 다른 태도로 대한다.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우리는 공동체에서 영혼보다 일을 더 중시하지는 않는가? 연약한 자의 인권을 짓밟는 모습은 없을까?
*복음의 역사가 일어난 현장은 고난의 역사도 함께 일어남을 보게 된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일이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한 일인데도, 바울과 실라는 영광 대신 고난의 쓴잔을 마셔야 했다. 이처럼 말씀으로 사람이 변하기 시작하고 복음의 능력이 발휘될 때 세상과의 갈등도 시작이 된다. 우리 공동체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에 “영광의 약속”과 함께 이런 “고난의 보상”이 함께 있는가?(딤후 3:12)
*바울과 실라는 갇힌 중에도 기도하며 찬송했다.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렸어도 나가지 않았다.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어도 복음과 하나님의 능력은 갇히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탈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증거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게도 복음의 능력에 갇힌 자로서 상황에 굴하지 않는 자유와 기쁨이 있는가?
*바울과 실라는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빌립보까지 왔고 감옥 가장 깊은 곳에 얽매였다. 그럼에도 로마 시민권자임을 먼저 밝히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누가는 이 이유를 직접 밝히지 않지만, 바울이 한밤중에 기도와 찬송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신뢰를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얽매여 있는 모든 죄수들에게 복음을 들려주게 하셨다. 또 큰 지진, 모든 옥문이 열림, 모든 매임이 풀어짐과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개입 속에 간수가 자결하려고 할 때 그에게 구원의 복음인 “모두 여기 있다”를 들려주어 결국 그와 모든 식구들이 세례를 받고 구원을 얻게 하셨다. 하나님의 복음이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는” 것이라면 환상을 보고 믿음으로 건너온 빌립보에서 이 말씀이 실제임을 바울과 실라에게, 그리고 귀신들린 여종에게, 간수와 그 가족들에게, 그리고 기도와 찬송을 듣던 모든 죄수들에게 증명하신 것이다.
*결국 빌립보 전도는 그야말로 복음의 능력을 증거한 놀라운 기적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이렇게 증거된 복음으로 생긴 빌립보 교회를 위해 다음날 풀려나는 기적을 통해 자신들이 로마시민권자임을 비로소 밝힌다. 이를 통해 당당하게 로마제국 안에서 로마시민권자가 전하는 건전한 복음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고 남아있는 교회 성도들을 위한 안전 장치로 비로소 자신들의 신분을 활용한 것이다.
*이 일을 통해 분명하게 느낀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나의 세상의 지위를 먼저 드러내는 것 보다 성령께서 허락하시는 상황을 잠잠이 참아 기다리고 성령께서 펼치실 뜻을 먼저 구하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영적인 담대함을 갖추어야 하겠다. 사탄은 늘 인간의 성급함을 자주 이용한다. 자기 뜻대로, 계획대로 하려는 성급함보다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믿음을 사용해야 한다.
*성령이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고 믿음으로 간 빌립보였다. 그런데 그곳에는 루디아라는 준비된 성도도 있었지만, 귀신 들린 여종, 감옥의 간수와 가족들, 밤중에 기도와 찬송을 들은 죄수들도 예비되어 있었다. 루디아라는 선명하게 인도하심을 통해 만난 영혼도 있지만, 애매하고 억울한 고난을 통해 만나게 하신 귀신들린 여종과 간수와 가족들, 그리고 죄수들도 있었다. 일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인내의 걸음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만날 수 있게 하는지 이 이야기를 통해 깨닫게 된다.
*나도 이 걸음을 걷고 있다. 더온누리를 맡겨 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여정은 때로 눈에 확연히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많고, 여종의 주인들과 같은 참소도 끊이지 않지만, 그 가운데 성령께서 행하여 주시는 놀라운 은혜들과 결국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실 때까지 인내하게 하시는 시간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맛보고 있다. 내가 성급하게 하는 것보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성급하지 않고 인내하며 나아가야 하리라.
*복음과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하리라는 사명을 잊지 않고 고난 받을 때 섣불리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지 않는 바울을 보게된다. 나도 이 사명의 길을 걸을 때 이처럼 걸어야 겠다. 나도 복음과 고난을 함께 받는 걸음 걷고 있다.
*주님, 나를 부르신 부름을 따라 내가 걷는 길의 수고와 고난이 영광만이 아닌 고난과도 함께 가는 여정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주님, 성령이 함께하시니 갇혀있는 중에 기도와 찬송을 절로 부르고, 충분히 감옥을 나올 상황에서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는 두 사람의 태도를 본받고 싶습니다. 내 감정에 나의 걸음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에 맡기며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살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