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의 사역 [행 17:1-15]
 – 2024년 06월 06일
– 2024년 06월 06일 –
빌립보를 떠난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로 향했다. 본문은 데살로니가에서의 사역(1~9절)과 베뢰아에서의 사역(10~15절)을 다룬다. 바울은 관례대로 회당으로 가서 말씀을 풀어 강론하였고 데살로니가에서 많은 회심자를 얻었다. 그러나 바울의 성공적인 선교는 많은 유대인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결국 바울은 베뢰아로 이동하여 복음을 전해야만 했다. 베뢰아 사역은 데살로니가에서보다 성공적이었지만, 데살로니가로부터 온 유대인 적대자들로 인해 바울은 다시 아덴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바울은 낯선 도시에 들어가면 다른 곳을 거치거나 다른 사람들을 방문하지 않고 유대인 회당으로 곧장 가서 유대인들과 접촉한다. 본문은 이를 “바울의 관례(2절)”라고 부른다. 이런 모습은 1차 선교여행 기간부터 보였다. 현지 상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인간적인 교제의 발판을 마련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선택이었다. 이를 위해 회당을 방문하는 것은 바울에게 가장 손쉽고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복음이 전파될 때 늘 그 지역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는 기존 신앙 질서를 완전히 새롭게 하고, 이방인들에게는 신(神)을 바꾸는 온전한 회심을 명령하기 때문이다. 이를 받아들이는 이는 새롭고 놀라운 기쁜 소식이 되지만, 거절하는 자에게는 위험하고 선동적인 거짓 사상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바울에게서 보이듯 복음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다. 설득하고 설명하고 토론하고 증명하고 또다시 설득해 무엇이 참인지 증언한다. 복음을 수용하면 구원을 맛보겠지만, 거절하면 기회는 다른 지역으로 넘어간다. 그렇게 반대와 거절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에 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1. 데살로니가에서의 사역 (1~9절)
이 단락은 1~4절을 통해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 관하여, 5~9절을 통해 적대적인 유대인들에 의해 고난 겪는 바울의 모습을 기록한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은 “관례대로” 회당으로 가서 복음을 전한다. ‘누가’는 “관례대로” 행한 바울의 선교 방식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바울은 성경을 강론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였다(2~3절). 이 강론은 두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뜻을 풀어서 성경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3절). “뜻을 풀다”라는 활짝 열다”의 의미인데 바울이 자신의 메시지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하나하나 보여주고 설명하였다’라는 의미이다. 성경에 기초한 강론을 펼쳤다. 둘째, 성경의 내용을 증명하는 것이다. “증언하다”에 해당하는 원어는 “~앞에 혹은 옆에 놓다”이다. 문자적으로는 “앞에 놓으면서”를 뜻한다. 무엇인가를 상대방의 눈앞에 가져다 놓고 눈으로 확인하게 하는 행동이다. 즉, 바울은 자신의 강론을 듣는 사람들의 눈앞에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펼쳐놓았다. 자신의 강론이 결코 자기 생각만이 아님을 증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강론한 성경의 내용은 무엇일까?
    
바울이 풀어서 증언하며 강론한 복음의 내용은 두 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과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했다는 것이다. 바울이 전한 이 복음의 내용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것들이었다. 그 예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선포한다(3절). 개역 개정은 바울의 선포를 “전하는(카탕겔로)”으로 번역한다. 하지만 이 단어는 사도행전에서 “선포하다”라는 의미로 더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이는 바울의 강론이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동시에 강력한 영적인 도전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사역은 성공적이었다.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에 감동되었기 때문이다(4절). “권함을 받고 따른다”라는 것은 설득당해 따른다는 뜻으로 이 단어들은 “설득과 따름”이 대단히 강력했음을 보여준다.
    
    
5~9절은 바울과 실라에게 찾아온 고난에 대한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적대적인 그룹은 동족인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이 바울 일행을 시기하였다(5절). 왜 시기하였는지에 대한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하나님 경외자들을 바울 일행에게 빼앗긴 것 때문일 수도 있고, 복음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시기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들은 불량한 사람들을 선동하여 소동을 일으키게 하였고 기어이 바울을 백성 앞에 세우려고 했으나 실패한다. 다행스럽게도 야손의 집을 불량배들이 급습하기 전에 바울이 피하여 붙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바울을 찾지 못한 그들은 야손과 그의 형제들에게 위해를 준다.
    
6~7절은 유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고소한 두 가지 이유가 나온다. 먼저 6절은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로 규정한다. 이것의 구체적인 혐의가 7절에서 설명하는데, 로마 황제 대신에 예수를 “임금(바실류스)”이라는 칭호를 불렀다고 고소한다. 야손과 형제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바울을 영접했기에 같은 혐의를 씌우고 있다. 유대인들이 고소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것과 가이사의 칙령을 어기는 것, 그리고 예수를 임금이라고 부른 것은 모두 하나의 위반 사항을 가리킨다. 즉, 빌립보에서 간수에게 “주(퀴리오스) 예수를 믿으라”라고 한 것과 같다.
    
이러한 고소는 다른 어떤 것보다 데살로니가 행정관들 앞에서는 치명적일 수 있었다. 로마에 편재했던 황제숭배 사상은 로마 황제를 제외하고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도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고소는 바울과 실라를 매우 어렵고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은 “하나님 나라”와 “다시 오실 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잘 보여준다. 결국 야손과 그 형제들은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다. 그들이 결코 바울이 범한 죄와 무관치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따라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로 향해야만 했다.
    
    
    
2. 베뢰아에서의 사역(10~15절)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서쪽으로 75km 이상 떨어진 베르미우스 산기슭에 있는 도시다. 바울은 베뢰아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으로 맨 먼저 들어갔다. 베뢰아 사람들의 반응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반응과 현저하게 달랐다. 바울이 전한 말씀에 대한 반응은 세 가지로 나타났다. 첫째,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 둘째,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셋째, 믿는 자들이 많이 생겼다.
    
일반적인 사도행전의 서사에는 바울이 전한 말씀에 사람들이 믿었다는 형태로 서술된다. 그런데 베뢰아에 대한 선교 보고에서만은 그들이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라는 언급이 덧붙여져 있다. “상고했다(아나크리노)”라는 “상세하게 연구하고 따져 물었다”라는 의미다. 그들은 바울이 강론했던 성경의 구절들이 정말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지를 꼼꼼하고 상세하게 연구하고 질문하는 자세를 가졌다. 자발적인 말씀 연구가 신앙 형성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또 진리에 대한 열정이 말씀을 향해 열린 자세를 갖고 생각하는 신앙을 품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결과 많은 믿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렇게 같은 유대인들이면서 데살로니가보다 호의적인 이유에 대하여 ‘누가’는 11절에서 그들이 “더 너그러워(유게네스)”이라고 밝힌다. 이 단어는 “고귀한, 마음이 고상한”이라는 의미가 있다. 특히 높은 신분의 헬라 여인들과 남자들이 믿음을 얻었다고 증거한다(12절). 이들이 상류층이었었다고 밝히는 것은 그들의 반응이 그것 자체로 기독교 신앙의 평가와 선교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초대교회에서 이런 상류층의 회심이 희소했고 이례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베뢰아에서의 복된 사역의 열매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는 위험이 끊이지 않았다. 데살로니가에 있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찾아와서 소동을 일으켰다. 꽤 먼 거리 임에도 유대인 적대자들은 바울 일행을 추격하여 위협한다. 이미 사도행전 14:19에서도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 유대인들의 집요한 반대와 추적이 루스드라에까지 이어진 적이 있었다. 결국 바울은 아덴을 향해 떠날 수밖에 없었다. 무작정 직면하기보다 적대자들의 서슬 푸른 위협을 피하는 것도 선교적인 방법이 될 수 있음을 바울이 보여준다.
    
    
    
나는?
-오욕과 설움의 역사를 겪은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의 명백한 예언에 애써 눈감은 채 오로지 만국을 깨뜨릴 영광스러운 메시아만 기대하고 있었기에,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하였다. 복음이 주는 영광만을 기대하는 이들은 지금도 복음이 요구하는 고난과 순종을 외면하고 있다. 그들은 메시아를 믿고 있지만 메시아가 주는 기쁨이 없고 메시아가 다스리는 나라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복음은 환대와 냉대를 모두 부른다. 바울의 가르침에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많은 귀부인이 믿고 따랐지만, 유대인들은 반발하고 저항했다. 유대인들은 불량배를 동원하여 바울이 묵고 있는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으며, 그를 못 찾자, 야손과 일부 그리스도인들을 고소하였다. 바울과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대가가 고난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천하를 어지럽게 하고 예수를 다른 임금으로 믿는다고 고소한다. 복음이 세상 권력을 쟁취하려는 운동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틀린 말이다. 그러나 복음은 세상 나라와는 달리 사랑과 자기 부인과 은혜의 나라라는 점에서, 세상의 폭압적인 질서를 교란하는 대안적인 세력이며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를 그리스도의 통치 앞에 복종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맞는 말이다.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간절히 받고 날마다 성경을 통해 확증하고자 상고했다. 차분한 묵상이 없는 갈급함이나 열정은 거짓 목자의 노략물이 되기 쉽다. 묵상의 자리를 지킨 이들이 말씀 기갈의 시대를 감당할 해갈의 사명자가 될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자 회당부터 찾았다. 거기에서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하신 것처럼 유대인들에게 구약성경의 뜻을 풀어(1~3절) 십자가 부활의 당위성을 설명한다. 즉 예수님이 구약에서 약속한 그 ‘메시아’라고 전한 것이다. 우리의 메시지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물론이고 그 십자가의 삶을 좇아야만 영광을 누릴 수 있다고 전하고 있는가?
    
*회당에 속한 경건한 헬라인과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자,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을 시기한다. 아마도 자신들의 재정적인 손실을 염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불량배를 모집하여 바울이 거하던 야손의 집을 습격하고 야손과 몇몇 그리스도인들을 거짓 고소한다. 예수님을 죽일 때처럼 그리고 빌립보에서 귀신 들린 여종의 주인들이 고소한 것처럼 그들도 거짓 증인들을 동원하여 바울 일행이 천하를 어지럽히고 가이사의 명을 거역한다고 정치적인 모함을 했다. 그들도 성경을 맡았고 하나님을 믿었으나 돈과 시기심의 노예가 되자 분별력을 잃고 사탄의 앞잡이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우리도 예외일 수 없다. 제아무리 성경 지식과 신앙의 연륜을 앞세운다 해도, 자기를 부인하는 믿음 없이는 우리의 마음도 늘 시기심과 탐욕이 지배할 뿐이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바울이 전한 말이 맞는지 점검하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성경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현실적인 이해관계만 따지던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과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그 결과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 성경보다 더한 권위는 없다. 어떤 설교나 묵상 자료도 성경에 비추어 점검하되 열린 마음으로 간절히 받아야 할 것이다.
    
*성경이 생명의 말씀이라고 믿고 고백한다면 실제로 나는 얼마나 시간과 물질과 마음을 쏟아 이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고 있을까? 수동적이고 맹목적으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묵상하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가?
    
    
    
*주님, 성경을 풀어 성경의 내용을 증명하는 설교가를 꿈꿉니다. 폭넓고 깊은 말씀의 은혜를 주십시오.
*주님, 간절한 마음으로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말씀을 상고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충실한 묵상을 단념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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