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을 대적하던 유대인들은 아가야의 총독이 갈리오로 바뀌자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법정에 고소한다. 그러나 정작 갈리오는 이 문제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오히려 유대인들 사이의 종교적인 문제로 판단하고 스스로 해결하기를 요구한다.
갈리오의 원래 이름은 “마르쿠스 안네우스 노바루스”이다. 그는 세네카 1세의 아들인 동시에 세네카 2세의 동생이었다. 아버지에 의해 수사학자 “루시우스 유니우스 갈리오”에게 입양된 후로 “갈리오”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주후 51년 아가야 지방의 통독이 되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1년 만에 물러났다. 주후 65년 폭군 네로에게 죽임을 당했다.
1. 갈리오 앞에 선 바울(12~17절)
유대인 대적자들은 총독이 바뀐 기회를 잡아 한순간의 망설임 없이 바울을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로마법에 고소한다. 고소 내용은 바울이 “율법을 어겼다”였다. “율법”은 유대인의 율법은 아닐 것이다.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강압적으로 선동했다고 고소한 듯 하다.
그러나 그들의 바램과 달리 갈리오는 바울의 고소 내용을 살피며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과 관련이 없다(14절)고 사건의 성격을 규정한다. 그리고 바울에 대한 고소는 형사적 범죄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닌 언어와 명치, 그리고 “너희의 법”에 관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것은 고소 내용이 로마의 실정법으로는 처벌할 수 없는 추상적 언어와 명칭들에 관한 것이며, 범죄 행위나 결과를 낳지 않은 관념적인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법”과 관련된 신학적인 논의와 종교적 숭배, 경건에 관한 사안들이라고 정리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처리하라”고 판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법정에서 쫓아낸다(16절). 갈리오는 바울의 복음 전파에 어떤 정치적인 함의나 로마에 위협이 될 만한 불법적인 혐의가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바울을 곤경에 빠뜨리려 한 유대인들에게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찾아왔는데, 법정 바깥에 있던 고린도 시민들이 회당장 소스데네에게 폭력을 가한 것이다. 더 기막힌 것은 갈리오는 법정 앞에서 일어난 폭력 사태에 대해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왜 헬라인들이 유대인들, 특히 회당장 소스데네에게 느닷없이 폭력을 가헸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런데 소스데네는 고린도전서 1:1에 따르면 바울이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를 소스데네와 함께 기록했다고 언급한다. 그렇다면 소스데네가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바울은 자기를 대신하여 제자가 폭행당하는 것을 바라보게 되는 고통을 겪은 셈이 된다. 갈리오는 공정하게 재판하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소스데네를 향한 불법적인 폭력에는 방관하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2. 바울의 에베소 방문(18~21절)
고린도에서의 소동 이후 바울이 곧바로 고린도를 떠나지는 않았다. 적어도 몇 달 정도는 더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수리아와 유대를 방문하기 원했기 때문에 고린도를 떠나 잠시 에베소에 머문다. 이번 여행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동행했다. 새로운 선교팀이 수리아를 향하고, 그들이 겐그레아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서원이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의미로 머리를 깎는다. 아마도 개인적인 서원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에는 전통적으로 감사의 표현으로 서원이 이루어졌었는데,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다.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은 전에도 그랬듯이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한다. 개역 개정은 19절에서 바울이 유대인들과 “변론했다”라고 기록하지만, 이 단어는 “강론했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바울의 강론은 여러 사람의 호기심과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바울의 강론을 더 듣고 싶었다. 하지만 바울은 한마디로 그들의 요청을 거절한다. ‘누가’는 “허락하지 않았다”라는 단어를 부정 과거형으로 사용하여 매우 강한 어조로 거절했음을 분명히 한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한 이유는 선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3. 계속되는 바울의 선교여행(22~23절)
바울의 최종 목적지는 수리아였다. 하지만 중간 여정으로 예루살렘을 택한다. 그러나 본문은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누가’는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을 암시한다. 바울이 탄 배가 가이사랴에 상륙했다는 것이 그의 예루살렘 방문에 대한 증거이다. 가이사랴는 당시 예루살렘의 외항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또 22절에서 “교회”에 대한 언급은 “예루살렘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당시 수식어가 없는 교회라는 호칭은 오직 예루살렘 교회에만 가능했다. 이어서 ‘안디옥으로 내려간다’라는 표현도 역시 출발 지점이 예루살렘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바울이 왜 수리아로 곧바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갔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2차 선교여행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울은 3차 선교여행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누가’는 매우 간략하게 기록했지만, 사도행전 18:23~19:1은 약 2,414km의 거리를 이동했다. 이 경로를 바울은 갈라디아와 브루기아를 다시 방문했고 1차 선교여행을 통해 세워진 교회를 다시 방문했다. 그리고 성도들을 격려하면서 에베소로 갔다. 자신의 강론에 관심을 보인 사람들을 냉정하게 뿌리치고 에베소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과 행한 약속을 지키길 원했다. 에베소 사람들이 보인 복음에 관한 관심에 열정적으로 응답하려고 한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함께하여 그를 해칠 자가 없게 하겠다는 약속(행 18:10)을 귀찮은 일을 싫어하는 고린도 총독 갈리오의 행정을 이용하여 지키셨다. 아이러니하게도 총독의 최소간섭주의 원칙과 기독교를 로마 제국 내 합법 종교 중의 하나인 유대교의 분파로 간주한 그의 오해 때문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의 위협과 로마 제국의 견제에서 벗어나 오랫동안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일은 헌신과 열정으로…. 바울은 자발적인 나실인 서원(민 6:2~5)을 종료하면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헌신적인 충성은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치겠다는 결연한 다짐에서 나온 것이었다(롬 12:1~2). 지금처럼 교회 안팎에서 세속주의와 종교혼합주의가 만연한 시대에는 그 어느 때보다 절제와 헌신과 섬김으로 거대한 악의 체제에 맞서려고 나서는 경건의 사람들이 절실하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바울 일행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동행하여 에베소를 방문한다. 아주 잠깐만 머물고 떠나면서도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강론하며 복음을 전했다. 복음에 우호적인 이웃들을 얻게 된다. 하지만 선교 전략상 에베소의 중요성을 인식한 바울은 하나님의 뜻 아래서 다시 방문할 여지를 남긴 채 아굴라 부부를 그곳에 머물게 한다. 바울은 멈추고 나아가는 주권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서도, 상황을 예측한 후 치밀하고 전략적으로 준비하고 계획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위기를 기회로!. 유대인들이 신임 총독 갈리오 앞에서 바울을 모함하여 거짓 고소했지만,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그를 안전하게 지키신다(12~17절). 바울이 처한 복음 증거의 위기를 되려 절호의 기회로 바꾸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신임 총독이 부임하자 일제히 일어나 바울이 율법을 어긴다고 고소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갈리오 총독은 유대교 내부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간주한다. 이를 통해 고린도 지역에서 초대교회는 유대교처럼 황제숭배를 면제받게 되었다. 오늘 내게 닥친 어려움이 하나님의 손에서는 언제든지 나를 향한 선으로 바뀔 수 있음을 믿고 더욱 주님을 의뢰해야 하겠다.
*감사하고 찬양하며….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린도의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18절). 이는 서원을 마감하는 행동으로 아마도 하나님이 선교 사역 기간에 보이신 특별한 인도와 은혜에 감사를 표한 의식일 것이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감사하고 찬양해야 할 일들을 떠오를 때 주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감사하고 찬양해야 하리라.
*열정과 전략의 조화로움으로…. 바울은 잠깐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에도 회당을 찾아가 유대인들에게 강론하며 복음을 전한다(19절). 대단한 열정이다. 또한 동행하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에베소에 머물게 한 것을 보면 이후 선교 사역에서 이 에베소의 역할이 중요하리라는 것을 내다보고 있다. 복음을 향한 열정뿐 아니라 신중한 전략을 가지고 일하는 바울이 보인다. 우리에게는 어떤가? 복음 전도에 있어 열정과 전략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가?
*하나님의 뜻대로 가 먼저다. 바울은 에베소에 더 머물러달라는 요청이 있고, 더 양육할 필요도 있었겠지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에베소를 맡기고 다만, “하나님의 뜻”이 이끄는 대로 떠난다(20~21절). 사람의 요청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다.
*목자의 심정으로 쉼 없이….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여 안부를 묻고 안디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조금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이미 선교한 지역으로 떠나 제자들을 굳게 하는 일을 시작한다. 나는 목자의 심정으로 양들을 돌보고 양육하는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더온누리 공동체의 지체들을 섬기고 있는가?
*주님,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신뢰하겠습니다. 위기를 절호의 기회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겠습니다.
*주님, 열정 없는 전략, 전략이 부재한 열정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균형 잡힌 열정과 전략으로 하나님 나라 사역을 감당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