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안정보다 땅끝을 향한 도전, 세상 물결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 물결을 놓치지 않는…. [행 19:21-41]
 – 2024년 06월 12일
– 2024년 06월 12일 –
본문은 바울의 에베소 사역 마지막 사건을 다룬다. 에베소에서 성공적인 사역의 열매를 경험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를 막 떠나려 할 시점에 에베소는 큰 소동에 직면한다. 은 세공업자 데메드리오의 선동에 흥분한 사람들이 에베소의 여신 아데미가 공격당한다고 생각하여 집단행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거대한 군중이 사실상 영문도 모른 채 에베소 대형극장으로 소리치며 몰려들었고, 이 과정에서 바울의 두 동료가 끌려온다. 일촉즉발의 위험한 상황에서 에베소의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인 서기장의 지혜로운 발언으로 소요는 진정된다.
 
에베소는 은으로 된 아데미 여신의 신상을 세공하여 파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이곳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에 기록될 정도로 거대한 아데미의 신전뿐만 아니라 점토와 은으로 만든 다양한 아데미 신상이 장신구로 존재했다. 이 일을 생업으로 삼았던 사람이 그만큼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데메드리오의 이러한 행동은 에베소 사람들이 마술책을 불태운 일에 충격을 받고 결행한 것이었다. 또한 본문은 에베소를 움직이는 정치적 시스템을 엿볼 수 있게도 한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총회에서 서기장은 소동하던 무리를 잠잠하게 하였다.
 
 
 
1.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한 바울(21~22절)
바울은 약 2년 6개월가량 에베소에 머물렀다. 이제 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려 하는데, 그 이유에 대해 누가가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울의 행적을 살펴볼 때 늘 그랬듯 예루살렘을 거쳐 새로운 선교지로 가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누가’는 이런 바울의 의도를 간략하게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라는 말로 나타낸다. 로마서의 기록은 바울이 로마를 단순히 선교지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로마 교회의 후원을 통해 스페인으로 가려 한 것을 알 수 있다(롬 15:22~24).
 
바울이 이렇게 로마로의 여정을 생각한 것은 “성령으로(엔토 프뉴마티)” 계획된 것이었다(21절). 개역 개정에서 “작정하여”로 번역된 단어를 직역하면 “영으로 결정하다”라는 뜻이다. 즉 바울은 땅끝을 향해 퍼져 나가는 복음 전파의 기지로 로마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도행전 21~28장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향하는 바울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향후 사역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에 성령이 관여하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은 직선 코스가 아닌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치는 여정을 계획하였다. 지난 선교 여행을 통해 세워졌던 교회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마게도냐에는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교회가 있었고 아가야에는 고린도 교회가 있었다. 바울은 먼저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파송하고(22절) 자신은 아시아에 조금 더 머물렀다. 쉽고 편안하게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 길을 다시 돌아 교회를 격려하며 나아가기를 원했다. 목회자 바울의 목양 일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편 헬라어 성경은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돕는 사람(디아코눈톤)”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누군가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두 사람은 바울을 직접 돌본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먼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교회로 보냈다는 것은 자신이 불편해질 수 있는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편리함보다 새롭게 세워진 교회를 돌보고 성도들의 믿음을 세우는 것이 더 중요했고 그것을 더 원했기 때문이었다.
 
 
 
2. 데메드리오에 의한 소동의 확산(23~34절)
데메드리오라는 은 세공업자의 선동으로 에베소 사람들 사이에서 소동이 일어난다. 에베소에서 일어난 폭동은 다른 도시들에서 바울이 경험한 위기나 어려움과는 다른 원인에서 비롯되었다. 데살로니가에서의 폭동 원인이 종교적이었고, 에베소에서의 폭동은 종교적인 색채로 위장된 경제적 손실이 근본적인 이유였다.
 
24~25절은 데메드리오가 사람들을 선동하는 장면인데, 그는 동료 세공업자들에게 바울 때문에 이제 더 이상 풍족한 삶을 살 수 없게 되었다고 충동한다. 아데미 여신을 기념해서 만든 제품들이 잘 팔리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다른 방법도 동원했는데 경제적 손실로 인한 자신의 근본적인 불만은 감추고 아데미 여신에 대한 충성심을 부각했다(7절). 에베소의 성난 군중은 바울 때문에 아데미 여신의 권위가 떨어질 수 있다는 데메드리오의 선동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28절). 흥분한 군중들은 바울과 함께 다니던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원형극장으로 들어간다(28~29장). 그러나 자신들이 정작 왜 모였는지에 대한 이유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군중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32절). 이 분위기를 감지한 유대인들은 일종의 위기의식을 느끼며 자신들의 입장을 피력한다(33절). 하지만 유대인들을 대표한 알렉산더의 변명은 군중에게 반유대주의 정서에 동조하게 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34절). 그날 에베소의 원형극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은 서기장이 개입한 후에야 진정이 된다.
 
이 단락은 최소 두 가지를 깨닫게 한다. 첫째, 복음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데메드리오 불만의 시작은 경제적 손실이었다. 그가 바울에게 적대적 감정을 드러낸 것은 지금까지 입은 손해에 더해 앞으로 닥칠 경제적 손실의 위험을 감지했기 때문이다(27절). 에베소에 일어난 일은 단지 우상을 제작하여 만드는 이들의 경제적인 위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누가’는 데메드리오의 사건을 통해 복음이 한 도시의 경제적 흐름을 바꾸어 놓았음을 보여준다. 경제적 변화는 반드시 사회 문화적 변화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복음을 통해 에베소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둘째, 복음에 대한 적대자 그룹이 추가되었다. 에베소 사역 이전 바울의 적대자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이방인들로부터 직접적인 위협과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주후 1세기 기독교가 박해당하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복음에 포함된 급진적인 메시지 때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유일한 왕이시라는 것은 로마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히 도전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복음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는 로마 제국의 시스템을 근원적으로 흔들고 부정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인들의 눈에는 체제를 뒤흔드는 커다란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3. 서기장에 의해 진정된 소동(35~41절)
일촉즉발의 위기는 에베소의 서기장이 지혜롭게 대처하므로 진정 국면으로 바뀔 수 있었다. 그는 원형극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35절). 자신들에게 이 폭동의 불똥이 튈까 두려워하며 군중 앞에서 변명을 시도하던 유대인들의 어리석음과 대조가 된다.
 
서기장은 아데미 여신을 칭송하고 그들의 종교적 열심을 인정함으로써 군중의 마음을 안정시킨다(35~36절). 그는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사람들을 설득했다. 행정 관료로서 자신의 위치를 최대한 활용하였다(37~38절). 이런 모습은 에베소에 합리적인 정치 시스템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38~39절). 또한 합리적이고 공정한 관리의 존재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유익한지 서기장의 경우를 통해 분명하게 보여준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아가야 총독 갈리오의 판결로 도움을 받았었다(행 18:12~17). 그리고 에베소에서 다시 한번 지혜로운 서기장의 도움을 받는다. 31절은 서기장뿐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 관리도 바울과 그 일행에게 도움을 주었음을 밝힌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며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마냥 패역하게만 볼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속한 시민으로 이 땅의 정치적 체제에 속해 있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정치적 시스템이 바르게 작동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매우 유익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정치 지도자들이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눅 9:50)”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예루살렘을 넘어 로마까지 가야 하리라. 바울의 선교 열정이 식지 않는다. 바울은 에베소에서의 사역 성공에 취해 있지 않는다. 오히려 이방인 사역의 성과(구제 연보와 함께) 를 가지고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해를 일군 후(롬 15:31~32) 종국엔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할 계획을 세운다.
 
-바울은 날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투에 매진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큰 그림도 늘 헤아리면서 진로를 결정한 것이다. 이 과정에 있는 바울은 늘 성령의 전략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신앙, 나의 진로, 나의 교회라는 시각을 넘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에도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여봐야 하지 않겠는가!
 
-복음을 받아들인 후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무릅쓰고 마술하는 직업을 버린 이들이 있지만(행 19:19), 경제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선동적인 구호로 소요를 일으키는 이들도 있었다. 바울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라고 말했을 뿐이었지만, 그것이 아데미 신전을 무시하고 아데미 여신의 위업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그러나 아데미 여신의 명예를 들먹이는 것은 명분일 뿐, 소요의 주동자 데메드리오의 진짜 관심은 “돈”이었다. 기억해야 한다. 모든 우상은 내 탐욕을 만족시켜 주거나 내 근원적인 불안을 해소하는 수단일 뿐이다.
 
-바울은 군중 속으로 들어가 위기에 처한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구하려고 했지만, 제자들과 친구 관리가 제지한다. 합당한 명분과 정연한 논리, 유려한 언변으로도 통하지 않는 상황이 있다. 이때 더 넓게 보고 멀리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주변의 경험이 풍부한 이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중요함을 깨닫는다. 급박한 순간 서기장의 지혜로운 개입으로 소요는 진정된다. 그는 분노한 에베소 인들의 자존심도 세워주고, 신자들이 불법 집회의 애매한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지켜주었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떠날 때와 나아갈 곳을 정한다(21~22절). “작정하다”로 번역된 단어를 직역하면 “성령 안에서 결심하다”이다. 안정된 사역의 자리를 떠나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향해 나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주님의 뜻을 따라 제국의 수도 로마를 향해 나아간 것이다. 순종은 계산으로 예측하며 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일깨우시는 성령의 감동에 반응하는 것이다.
 
*데메드리오의 모습을 통해 그럴듯한 명분으로 치장하지만 실상은 “돈”의 노예가 된 가련한 우상 숭배자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성령께서 깨우쳐 주지 않으시면 오늘날의 데메드리오에게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빼앗긴 채 영문도 모르고 휩쓸려 다닐 수 있다. 유난히 큰 소리에 귀를 빼앗기지 말고, 들려오는 소리마다 성령의 친밀하신 도우심을 구할 때 향방 없이 휘둘리지는 않을 것이다.
 
*바울은 군중 안에 들어가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구하려 했다. 하지만 제자들의 만류로 포기한다. 동료들을 향한 마음은 귀하나 상황을 더 잘 이해한 주변의 권고에 귀를 기울이는 바울의 태도 역시 참신하다. 나는 주변에서 만류할 때 귀담아듣고 신중하게 판단할 수 있을까? 정신없이 휩쓸리는 가운데 전체를 보고 상황을 판단하여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혹은 그런 동역자가 있는가?
 
 
 
*주님, 성령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하되, 사역에 안주하지 않는 도전에 순종하는 바울의 모습을 본받겠습니다.
*주님, 향방 없이 휩쓰는 세상 물결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거룩한 전도자의 삶을 살아내겠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선포한 대로 이루어지다 [왕하 7:3-20]

하나님은 나병 환자 넷을 이용하여 사마리아를 전쟁과 기근에서 구하신다. 이로써 엘리사를 통해 예고하신 말씀을 성취하신다. 아람의 군사들은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큰 군대의 소리를 듣고 도망갔다. 이에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