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아그립바 왕 앞에서_바울의 간증(변론) [행 26:1-18]
 – 2024년 06월 25일
– 2024년 06월 25일 –
아그립바 왕 앞에 서게 된 바울은 드디어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다시 얻는다. 바울은 자기도 어려서부터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하나님을 섬기는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그런 신앙 때문에 자신은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건을 이야기한다.
    
바울은 이미 사도행전 25:8-11에서 베스도 총독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얻었다. 그래서 ‘누가’는 베스도가 배석해 있었음에도 바울이 이 마지막 변호를 아그립바 왕을 향해 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따라서 바울의 마지막 변호는 이제 로마인들이 아닌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누가’는 앞에 기록된 이야기들을 통해 이미 바울이 로마인의 법을 어긴 사람이 아님을 보여준 바 있다.
    
    
    
1.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1~8절)
바울의 변호는 자서전적인 스타일로 진행된다. 자신의 젊은 시절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면서 자기도 어려서부터 유대교 신앙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깊은 신앙심을 품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이 믿는 기독교 신앙이 유대교 신앙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 후 바울은 자기 자신도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음을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기도 기독교를 무작정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자기에게 이렇게 큰 태도의 변화가 생긴 것은 너무나 큰 확실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세 번 등장한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예수를 증거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점이 크게 두드러진다. 이 소명을 온전히 받들기 위해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복음을 전했고, 이 복음을 전한 것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런 저항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경(모세와 선지자들)이 한결같이 메시아의 고난과 부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선포될 빛에 관해 이미 예언했기 때문이다. 바울에 대한 고소 문제는 이스라엘이 고대했던 그들의 소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이 유대인들의 문제와 관습, 그리고 종교적 분쟁에 대해 전문가라는 점에서 그 앞에서 변호할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럽게 생각(3절)할 수도 있다. 바울은 지난 2년 동안 이런 기회를 얻기를 고대해 왔다. 아그립바 왕에게 자기의 젊은 시절 어떤 신앙의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5절)”라는 것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기로 서약한 자들, 특히 구약성경에서 제사장들에게 요구되었던 철저한 결례와 모든 소산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약한 바리새인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자신이 여기서 재판을 받는 것은 유대인의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개역 개정은 “바라는”으로 번역)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라는(엘피스_직역하면 소망)”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바울에게 있어 “하나님이 이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성취하셨고 또 앞으로 온전히 성취하실 것을 믿는 믿음”을 가리킨다.
    
바울 변론의 핵심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성취하셨음을 믿느냐 하는 것이다. 또 바울이 말하는 “소망”은 “죽으로부터 부활하는 소망”인데, 하나님의 백성은, 이 부활을 통해 구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밤낮으로 열심히 받들어 섬김으로써 이 구원을 경험하게 된다고 믿고 거기에 소망을 두며 살아왔는데, 유대교 신앙과 소망에 충실한 자신이 왜 유대인들로부터 이런 기소를 당해야 하느냐고 항변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신다는 것을 왜 믿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고 묻는다(6~8절). 이렇게 바울이 부활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일반적인 부활을 바리새인들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논리는 하나님이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면 왜 예수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실 수 없었겠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은 그가 메시아이심을 입증하는 사건이다.
    
    
    
2.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바울(9~18절)
바울은 자기도 과거에는 유대인들처럼 생각했고, 따라서 예수에 관해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하는 것을 철저하게 반대했었다고 말한다. 22장에 기록된 바울의 증언과 비교해 볼 때, 본 단락에서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것에 대해 훨씬 강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자기가 유대교를 위한 열심을 가지고 어떻게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핍박했는지를 설명한다. 자신은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에 반항하는 것은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라 여기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지연시키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킴으로써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나라(통치)가 하루빨리 도래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반 백성과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죄인들과 세리들을 경멸하고 무시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 즉 장차 올 세대가 지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바울의 삶에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이다. 이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세 번 등장한다. 비록 이야기의 핵심 내용은 모두 대동소이하지만, 본문에서 ‘누가’는 문학적으로 약간의 변화를 줌으로써 이 회심 이야기가 담고 있는 의미를 새롭게 드러낸다. 매번 이 이야기는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할 권한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사건은 정오에 일어난다. 이는 가장 태양 빛이 강할 때 그 태양 빛보다 더 강한 빛이 비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행하던 자들도 다 인지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또 본문은 바울의 눈이 멀게 된 내용이 생략되고 모든 초점이 주님이 바울에게 하신 말씀에 맞추어진다. 다메섹에서 아나니아가 한 역할에 관해서도 설명하지 않았다. 이는 바울이 소명을 따라 살도록 만든 하늘의 음성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를 종과 증인으로 택하여 임명하기(16절)” 위함이었다.
    
바울은 지금까지의 일을 매우 신실하게 이행하였다.
    
    
    
나는?
-엄격한 바리새인이었다가 변화된 바울이다. 아그립바 왕은 친로마적이고 부도덕하고 악한 왕이었고 바울의 변론에 귀를 기울여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그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복음이기 때문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는 것이지, 수용 가능성이 높아서 전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은 예루살렘에 살았고 유대교에서 가장 엄격한 파에서 바리새인 생활을 했음을 강조한다. 그러니 자신이 아무 뜻 없이 유대인이나 유대 전통을 떠날 리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자신이 유대교에서 배우고 실천한 율법의 완성을 보았기에 그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것이다.
    
-그런 바울을 주님의 부활이 변화시키셨다. 바울은 자신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열방이 복을 받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전한 것 때문에 붙잡혀 있다고 말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앞장서 박해하던 “죄인 중의 괴수였다(딤전 1:13~15).” 주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과 긍휼의 은혜가 없었다면 가망 없는 인생이었다고 고백한다. 자기 삶이야말로 복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증거인 것이다. 내 삶을 가장 먼저 복음의 증거로 제시할 수 있는가?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사역하는 바울이다.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종인 이스라엘이 이방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열방을 시온으로 데려와 하나님의 공동체와 함께 예배드리도록 봉헌하는 제사장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다. 이제 그 약속을 성취하시려고 이방인의 사도로 바울을 부르셨다. 그것은 지금 왕 같은 제사장인 나와 우리 교회가 함께 이어 감당할 사명이다. 나는 그 사명을 감당할 만한 빛인가?
    
    
*바울은 유대인의 풍속과 문제를 아는 아그립바 왕에게 변론할 기회를 얻어서 다행으로 여긴다(1~3절). 그러나 28절에서는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서 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하는 모습도 나온다. 종교에 열린 마음과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복음을 수용하는 것에 있어 더 좋을 수도 있으나, 항상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전할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일까?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자신의 신앙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유대교의 가장 엄격한 종파인 바리새인으로서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처럼 변론한다(4~8절). 왜냐하면 복음은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이며, 열두 지파가 밤낮 하나님을 받들어 섬겨서 얻으려 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지고 사는 신앙인은 육신을 입고 사는 이 세상이 나그네의 삶이고 우리에게는 가야 할 본향이 있다는 것이 모든 시대 신앙인의 고백임을 부인할 수 없다. 부활 신앙이 더욱더 다져지는 삶의 걸음 되도록 간구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이 부활의 주님이신 것을 몰랐을 때는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고 심지어 죽이는 데까지 동조했었다면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솔직히 드러낸다. 자신의 과거를 극복하는 힘은 전혀 새로운 현재와 영광스러운 미래를 여신 부활의 주님과의 만남에서 나온다.
    
*한편으로 다메섹까지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오려던 바울의 열심은(14절) 사실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는 것처럼 어리석고 무익한 일일 뿐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생각하게 된다. 요즘 나의 삶 속에서 내가 하는 수고 중에 주님께 이런 책망을 받을 만한 맹목적인 열심은 없을까?
    
*주님은 자신을 핍박하던 바울을 도리어 자신을 증언하는 일꾼으로 삼으신다. 바울을 통해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죄 사함과 기업을 얻는 삶으로 부르실 것이다. 나의 과거가 어떠하든지 하나님께 붙들리면 천하를 얻는 그것보다 더 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주님의 충실한 일꾼으로 살고 있는가?
    
    
    
*주님, 바울의 간증이 또 한 번 마음을 울립니다. 무익한 수고를 멈추고 세상의 빛에 눈을 뜨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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