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지금까지 신실하게 지켜왔다고 말한다. 그가 전한 복음은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었다. 바울의 말을 다 들은 베스도는 바울이 미쳤다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이 참말을 한다고 말하며 아그립바 왕에게 호소한다. 모인 자들이 바울의 무죄를 인정하지만,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했으므로 그는 로마로 보내지게 된다.
본문은 비록 바울의 변론 내용을 담고 있으나 유대교와의 관계에 있어서 기독교를 변증하려는 숨겨진 의도가 담겨 있다.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행해진 바울의 변증 연설은 사도행전에서 기독론적으로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 본문은 그중에서 바울의 변론 중에서 절정에 해당한다. ‘누가’는 바울을 고난받는 메시아에 대한 믿음을 삶으로 담아내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
1. 소명에 순종하는 바울(19~23절)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주님으로부터 받은 하늘의 소명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바울은 주님이 주신 소명을 지금까지 신실하게 지키고 받들고 있다고 말한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전한 복음의 메시지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라는 것이었다. 회개와 돌아오라는 의미가 같지만, 이 두 동사를 함께 사용하며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바울은 회개만 강조한 것이 아니었다. 회개에 합당한 행위도 함께 강조한다. 본문은 특히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이신칭의 교리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회개에 합당한 행위와 삶을 강조하고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으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가르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라는 것을 부각한 것이다.
21~22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신을 성전에서 잡아 죽이려 한 것은 자신이 주님이 맡겨주신 이 복음을 지금까지 전해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 했지만, 로마 군대가 개입하여 자신을 구출해 주었다고 말한다. 바울은 이 일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로마 군대 개입의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지금 이 자리에까지 서게 되었고 높고 낮은 사람들(원문은 크고 작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증언할 수 있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메시지는 구약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한 것들 외에는 전한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이 모든 것들은 유대인들도 수용할 수 있는 내용의 말씀인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바울은 지금까지 전한 복음의 메시지를 두 소절로 나누어서 요약해 준다(23절).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을 것은 이스라엘이 고대하는 메시아가 죽음을 경험해야 했다고 이미 구약성경(선지자들과 모세_22절 하)에 예언된 대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렇다면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 어디에 이러한 내용이 예언되어 있다는 것일까? 바울은 그 내용을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이사야서의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을 메시아의 고난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둘째는 이 메시아가 먼저 다시 살아나셔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포하실 것이다. 이는 예수가 첫 부활의 열매(고전 15:20)가 되셨고,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모든 민족에게 빛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사 42:6; 49:6; 60:3). 구약성경은 이미 이것에 대해 예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참으로 거슬리는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전하는 메시아가 고난받는 종과 동일시되었고 예수를 바로 그 역할을 성취하신 분으로 보게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2. 아그립바 왕에게 전도하는 바울(24~32절)
바울의 변론을 들은 베스도는 큰소리로 “네가 미쳤다”라고 말한다(24절). 바울의 설명은 유대인이 아닌 로마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런 베스도에 바울은 자신은 미친 것이 아니라 참 진리만을 말했다고 주장한다(25절). 바울은 이제 자기 말을 이해할 만한 아그립바 왕에게 호소한다.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이 말한 것들이 초대교회의 역사에서 공공연히 일어난 일들로서 세상에 잘 알려진 일들이지 거짓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에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질문한다. “선지자들을 믿으십니까? 믿으시는 줄 압니다.” 여기서 “선지자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말한다. 선지자들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말은 아그립바 왕이 예수가 메시아임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메시아가 오실 것에 대해 예언한 사실을 아그립바 왕이 믿는 줄로 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 예언의 성취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들의 해석과 유대인들의 해석이 서로 달랐다.
아그립바 왕은 순간 난처해졌을 것이다. 바울의 이와 같은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하게 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인지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자기가 선지자들을 믿는다고 말하면, 바울로부터 “그럼 예수가 메시아인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네요”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고 만약 선지자를 믿지 않는다고 대답하면 신실한 유대인으로서 구약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그립바 왕은 이 난감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도다”라고 대답한다. 아그립바 왕은 지금 이 말을 통해 궁지에서 빠져나오려 한다.
아그립바 왕의 말에 바울이 응답한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29절).” 바울은 이 대답을 통해 자기의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청중이 자기처럼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대답한다. 그러나 단 한 가지만은 제외되어야 한다. 바울은 자기처럼 복음을 전한 결과로 그리스도인들이 죄수의 몸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바울의 이 발언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그 누구도 옥에 갇히거나 처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하게 호소하는 말이기도 하다.
바울과 베스도, 아그립바 왕의 면담은 끝난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바울은 사형이나 구금을 당할 만한 죄를 짓지 않았음을 시인했다(31절). 이는 그들이 바울을 유죄로 기소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바울이 유대인의 손에 죽임을 당하거나 로마인의 손에 의해 계속 구금될 만한 범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바울은 이 자리에서 자유의 몸이 됐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로마 총독들이 유대인들과의 유대 관계를 위해 바울을 석방하기를 거부했음을 목격했다. 바울의 경우처럼 죄수의 무죄가 분명했다면 황제 역시 불필요한 상소 건을 다룰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무죄 판결로 풀려나는 것도 로마법에 어긋났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해서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했던 열망은 한 걸음 더 현실로 다가오게 된다.
물론 다른 방법으로 로마에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가이사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포용하는 판결을 얻어냄으로써 자신의 재판이 좋은 선례가 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나는?
-바울의 삶을 선명하게 결정한 복음이었다. 다메섹에서 만나주신 예수님과 그분이 하신 말씀과 주신 사명이 바울 생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했다. 이방인뿐 아니라 유대인도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복음의 요구가 유대인들의 분노를 자아내겠지만, 유대인인 바울에게 임한 은혜가 동족에게도 임하는 길은 이것뿐이었기에 전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이 자기 삶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하게 하는 자다.
-복음에 미친 자는 세상 사람에게 미친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 베스도는 바울의 확신 가득한 변론을 듣고 그가 미쳤다고 말한다. 복음이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 나라의 질서와 얼마나 다른지 보여준다. 힘을 숭배하는 제국의 관리가 세상을 구원하려고 죽음을 택한 메시아를 이해할 리 없고, 그 하나님의 가장 큰 능력과 지혜가 가장 미련하게 보였을 것이다(고전 1:18-25). 그것은 세상이 보기에 가장 미련하게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가장 지혜로운 구원의 길이다.
-바울은 권력자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복음의 힘이다. 아그립바 왕은 선지자를 알았고 예수께서 행하신 일과 선포하신 말씀마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바울의 설득에 완강히 거부한다. 자신이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예수님을 그 자리에 앉으시게 하길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최고 권력자들 앞에서 결박당하는 것 외에는 모두 자기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바울은 세상의 왕후장상도 부럽지 않았다. 지금 누리는 기쁨뿐 아니라 장래의 소망 때문이다.
*19~22절은 바울은 환상을 통해 받은 소명에 순종하여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각지에서 각양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고 전했다.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 바울에게 증인의 삶이 참 회개의 열매였다. 나는 어떠한가? 나에게는 참 회개의 열매가 어떻게 맺히고 있을까?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구원의 빛을 선포하신 사건은, 선지자와 모세가 예언한 것을 성취한 것이라고 전했다(22~23절).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 중에 불현듯 나타나 일대 파란을 일으킨 대중 종교의 시조가 아니다. 이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께서 구속을 통해 인류를 새롭게 창조하시려고 약속을 주시고, 역사 속에서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신 결과이다.
*베스도는 바울의 해박한 지식과 학문성에 감복한 듯하다, 그러나 그것을 미친 짓이라고 폄훼하며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 총독 앞에서 바울은 자신이 진리를 전하며 또 맑은 정신으로 말하고 있다고 반박했다(24~25절). 복음은 단순하지만 유치하지 않다. 66권의 성경으로 풀어야 할 만큼 정교하고 철저하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한다고 가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바로 알려고 애쓰되, 말씀과 인격적인 만남으로 이어지도록 겸비하며 기도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렇게 진리는 참지식이 되어간다.
*바울은 왕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다. 그러면서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담대하게 믿음을 촉구한다(26~29절). 석방을 바랐다면 해명만 하고 말았을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며, 자나 깨나, 갇혀 있으나 자유하나 생명의 복음 증거하는 일이 가장 간절한 바람이 아니면 보일 수 없는 당당함이다.
*나도 내가 만나는 이들 앞에서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자랑스럽게 나의 복음과 믿음을 말해야 하겠다.
*주님, 언제 어디서든 기회를 주실 때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복음에 미친 삶을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