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담대하고 거침없이 하나님 나라를 전하다![행 28:16-31]
 – 2024년 06월 30일
– 2024년 06월 30일 –
바울은 가택연금 형태로 갇히게 되었지만, 비교적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로마에 있는 유대 지도자들을 만나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였다. 바울은 두 번째 만난 회동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 나라를 강론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 사도행전의 시작이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친 것처럼 마지막도 바울이 사람들에게 예수와 하나님 나라를 “거침없이” 전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이처럼 사도행전의 마지막 단락은 로마에 있는 바울의 사역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누가’는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상소한 사건의 결과와 바울과 로마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선포하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말과 삶으로 선포해야 할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1.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만나다(16~28절).
드디어 바울이 긴 여정 끝에 로마에 도착했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고 가장 먼저 한 것은 로마에 있는 유대 지도자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들을 만나 자신은 유대인들의 관습을 어긴 적이 없는데, 유대인들에 의해 로마인들의 손에 죄수로 넘겨졌다고 말한다. 로마인들은 자기를 석방하려 했지만, 유대인들이 반대하여 자기가 직접 가이사에게 상소했다고 말한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그들을 회유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20절의 “이스라엘의 소망”은 메시아의 오심과 부활에 관한 소망을 가리킨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신실한 유대인 신자이기에 지금 로마의 죄수가 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유대 지도자들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교는 로마가 합법적으로 인정한 종교였기 때문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에 대해서나 그를 고발한 사건에 대해 유대 지방으로부터 들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는 로마 당국자들의 손에 넘어간 이후에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이 기소 건을 이길 확률이 거의 없기에 포기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었다.
    
로마와 유대의 지도자들은 바울의 말을 직접 듣기를 원하여 바울과 만날 날짜를 정했다. 그리고 그 정한 날에 더 많은 사람이 바울의 숙소로 찾아왔다. 이에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집중적으로 강론하며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가지고 예수에 관한 복음을 전했다. 이제껏 그가 아시아와 마게도냐의 디아스포라 회당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전했던 메시지와 동일하다.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가 말하는 오실 메시아가 바로 예수라는 것과 하나님의 통치가 메시아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예수를 통해 온전하게 성취되었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다. 그러면서 원래 성령이 이사야를 통해 그 조상들에게 하신 말씀이 이제는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들려진다고 했다.
    
26~27절에서 인용된 이사야의 말씀(사 6:9~10)은 사실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계속 거부하면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조차 상실하게 된다는 경고의 말씀이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끝까지 거부할 것이라는 의미이기보다 때가 되면 그들의 마음도 바뀔 것임을 고대하고 있음(롬 11:25~32)을 간과하면 안 된다.
    
    
    
2. 복음이 로마에 “담대하고 거침없이” 전파되다(30~31절).
바울은 2년 동안 동일한 숙소에 머문다. 사람들이 바울의 숙소로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계속해서 전도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바울이 자유롭게 외부 출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바울은 이 상황을 디모데후서 2:9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라고 말했다.
    
그런데 누가의 사도행전은 이 2년간의 세월이 흐른 후의 이야기를 밝히지 않고 있다. 2년이 지난 후 바울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가이사 상소는 지연되었고 가택연금은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 찾아오는 자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며 보냈다. ‘누가’는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라고 증언한다. “담대하게 거침없이”로 번역된 부분을 다른 번역본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로 번역한다. 특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다고 강조한다. 사도행전은 서두에서 “하나님 나라(1:3 바실레이아 투 떼우)”로 시작하여 마지막 절인 31절에서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아 투 떼우)로 마무리한다. 이는 사도행전의 핵심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나님의 통치”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열린 결말이다. 2년 이후 이동의 자유를 확보하며(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관련된 사건을 증거불충분으로 취하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흔히 알려진 5차 선교여행(스페인?-그레데-마게도냐-로마)의 역동적인 사역을 이어갔다. ‘누가’도 그 내용을 생생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기록을 생략한다. 의도는 분명하다. ‘누가’는 바울을 “영웅화”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의 죽음은 사도행전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를 통해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 지금도 그 성령께서 증인들을 통해 지속하고 계시는 구원의 사역이 그의 관심이다.
    
이런 추측으로 사도행전을 통해 누가가 담아내고자 했던 위대한 복음의 서사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로마에서 끝난다. 엄밀하게는 로마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도 로마의 어느 셋집에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바울을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금도 성령의 증인들을 통해 복음이 세계로 뻗어가고 있음을 강조하고 싶었다. 또 그 증인의 자리로 사도행전을 읽는 성도들이 들어오기를 원했을 것이다. 이 땅의 모든 교회는 바울에게서 바통을 이어받아 복음의 증인으로 오늘의 로마 셋집에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방 제국의 중심지 로마에 와서도 “먼저는 유대인에게요”라는 선교 원칙을 일관되게 고수하는 바울이다. 자신은 이스라엘의 소망, 즉 이방의 빛이 되어 열방이 복을 누리게 해야 하는 이스라엘의 사명을, 예수님을 통해 성취하신 일을 전했을 뿐, 자기 민족을 고발할 뜻도 없고 자신에게는 다른 아무 죄도 없다고 결백을 주장한다.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바울을 죽이려 했으나, 바울은 끊임없이 동족을 사랑했고 살길을 전했다. 끊임없는 죽음의 협박 앞에서 끊임없는 사랑을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드러냈다.
    
-바울은 찾아오는 유대인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위임 통치자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 그를 통한 구속을 믿고 그의 통치에 복종할 때 누릴 수 있는 구원을 소개했다. 바울에게서 가택연금 중인 미결수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를 통해 깨닫는다. 하나님 나라 복음 전도자들의 출신이나 학력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을 향한 불같은 열정과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대한 선명한 이해가 있는가이다.
    
-유럽을 변화시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눈에도 띄지 않는 바울의 셋집에서 “담대하고 거침없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힘 있게 임하여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고 다스리는 초라한 셋집에서 인류 역사의 큰 축인 유럽의 문명사적 지도를 바꾸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 시작되었다. 오늘 내가 성실하게 누리는 말씀 묵상에서 주님은 사도행전의 남은 부분을 가열차게 써나가실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바울을 안전하게 로마에 당도하게 하셨다(16절). 하나님의 뜻은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바울은 긴 기다림과 신뢰와 고난의 바다를 지나서 여기까지 이르렀다. 로마에 도착하는 것보다 중요했던 것은 바울에게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더욱 견고하게 다지는 것이었다. 나에게도 마찬가지 아닐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속에서, 매 순간을 하나님의 신비를 맛보는 기회로 삼고 기다리며 신뢰해야 하겠다.
    
*늘 그랬듯이 바울은 유대인들을 먼저 찾았다. 그리고 비록 자신이 죄수 신분이지만 부당한 고소를 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고소당한 것은 이스라엘의 소망, 즉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 때문임을 분명하게 언급한다(17~22절). 자신을 신뢰할 수 있게 하여 복음을 잘 전하려고 하되, 결코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힘을 쏟지는 않았다.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 나라와 모세와 선지자의 글이 어떻게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는지 강론한다(23~24절). 그것이 복음이다. 기다리고 소망하던 참된 해방과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기를 바라던 대망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되었고, 그 나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이 복된 소식이다.
    
*유대인 중에는 믿는 이들도 있지만,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마음이 완악하고 영적인 눈과 귀가 어두워 믿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어디서든 반대하는 이가 있었듯이 로마도 예외가 아니었고,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돌아선다(24~28절). 그렇다 복음이 가는 길은 늘 반대가 기다린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증거해야 하리라.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바울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은 채 하나님 나라와 주 예수에 관한 것을 가르칠 수 있었다. 바울을 가둘 수는 있어도 복음은 가둘 수 없었다. 땅끝을 향한 복음 증거는 오늘 나의 순종을 통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주님, 담대하고 거침없이 셋집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바울의 모습에서, 환경보다 중요한 열정을 봅니다. 더온누리 공동체에 복음을 자랑하는 열정을 가득 부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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