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백부장 고넬료 사건 3 _ 베드로의 설교, 예수를 증언하다! [행 10:34-48]
 – 2024년 05월 24일
– 2024년 05월 24일 –
베드로가 이방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그를 경회하며 의롭게 사는 자들을 모두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다고 선언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모두 죄 사함을 받는다는 복된 소식을 전하자,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한다. 이에 베드로와 동행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 광경에 놀란다. 베드로는 그들이 성령 받은 것을 보고 세례를 베푼다. 
 
백부장 고넬료의 가족과 친지들의 회심은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만인에게 구원의 길을 여셨다는 복된 소식이 현실화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지금까지 전개된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초대교회의 이방인 선교를 하나님이 친히 계획하시고 섭리하시며 진행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손길을 통해서도 놀라운 구원의 소식을 전파하신다. 
 
 
 
1.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다(34~43절)
고넬료의 가족과 친구들 앞에 선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입을 열어 말하되”라는 표현으로 시작된 34~35절의 발언은 수백 년 동안 스스럼없이 행해져 왔던 인종 및 종교적 차별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선언이었다. 베드로는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는(차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라고 선언한다.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는”으로 번역된 단어 “프로소풀렙테스”는 “차별 대우하는 자, 편애하는 자”로, 또 “사람의 얼굴을 들어 올리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식 표현인 “나야 파님”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기도 하다. 신양성경에서 유일하게 본문에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과 초대교회 교부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차별” 혹은 “편애”라는 “프로소포렘프시아”가 이 단어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또한 베드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도다”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이 인종이나 신분을 보고 차별하는 분이 아니심을 강조한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에 합당한 믿음의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모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교는 36절에서 구약의 두 구절을 암시적으로 인용(시 107:20; 사 52:7)하는데,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평화를 주시겠다는 구약의 약속을 예수께서 성취하여 주셨음을 밝히면서 설교를 시작한다. 여기서 “평화”는 구원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화목을 이룬 상태를 말한다. 38절은 이사야 61:1의 표현을 인용하여 예수의 지상사역을 “선한 일을 행하시고”라고 표현한다. 
 
사도들은 처음부터 예수와 동고동락한 자들로서 예수가 행한 모든 사역의 증인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른 설교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사도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예수의 부활을 모든 사람들이 목격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고 증인으로 택함을 받은 자들만이 목격하게 하시는 특권을 주셨다. 누가는 그들이 경험한 예수 부활의 확실함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라는 말로 표현한다(41절). 부활하신 예수는 사도들에게 이 부활을 전하라 명령하셨고 그 부활의 메시지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든 사람들의 재판관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포함되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한 예언대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믿는 자마다 모두 죄 사함을 받는다고 선언한다. 
 
 
 
2.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다(44~48절)
43절에서 베드로가 “그를 믿는 자는 다(새번역)”라고 선언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 없이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피력한다. 그런데 베드로와 거기 모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복음을 듣는 모든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다(44절). 
 
누가는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랐다고 전한다(45절). 이들은 욥바에서 베드로와 동행한 여섯 명의 신자들(행 11:12) 이었다. 누가는 이 사건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했다. “성령이 내려오시니(44절), 성령을 부어주심(45절), 성령을 받았으니(47절)” 등이다. 다양한 표현들을 사용하지만 동일한 성령의 역사였다. 
 
주목할 점은 이 성령의 임함과 관련하여 방언의 역사가 함께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이방인들에게도 예수를 통해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의 사건이다. 그렇기에 더욱 가시적인 증거의 사건이 필요했다. 
 
 
 
나는?
-하나님은 구원을 베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34~35절). 이제 구원은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성과 민족과 인종에 상관없이 주의 은총에 경의와 의를 행함으로 반응하는 자들에게 누구에나 열려있다. 그것이 베드로가 깨달은 바였다. 따라서 그의 깨달음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예루살렘 사도 공동체가 이방인 선교에 새로운 방향을 정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식의 전환이었다. 
 
-사람을 외적 조건으로 가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의 외모나 인종, 혈통이나 신분 등을 초월하여 부르시고 구원하신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고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 사함과 구원을 받는다(47절).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나도 차별 없이 부르셨고 나에게 그러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라고 하신다. 
 
-신앙은 “세계관적 전환”의 사건이다. 나의 세계관이 변하여 우리 가정과 주변이 변하는 것이 선교이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범위까지 세상을 보는 것이 선교이다. 나의 시선도 예수로 인해 시선이 변했다. 
 
-선지자들이 증언하였고, 세례 요한이 그 길을 예비하였으며 하나님이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을 부어 주시고 함께하심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셨음을 축귀와 치유로 보여주셨다. 이스라엘은 그 조상들처럼 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로 만들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부활시켜 예수의 의를 증명하셨고 그를 온 인류의 재판장으로 삼으셨다. 오직 그를 믿는 자들만이 죄 사함과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셨다. 
 
-평화와 구원은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통해서만 누릴 수 있다. 그 예수를 거절하면 심판을 당한다는 것, 그것이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의 복음을 계시해 주셨다(36~38절). 이 복음은 세례 요한에게서 시작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된 구원의 좋은 소식이다. 이복음의 역사는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착한 일들과 사탄의 속박에 매인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복된 능력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은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내려주신 성령을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내려주신다. 그럼으로써 베드로가 전한 복음이 사실이며, 여기 복음을 믿고 예수를 영접하는 이들 위에 예수의 통치가 임하고 있음을 확증하신다. 고넬료 사람들의 영적 회심에 베드로는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회심으로 반응한다. 유대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베드로는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식탁 공동체에 참여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변화를 막지 않고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순종이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온 땅에 두루 다니며 증언하도록 베드로와 제자들을 부르셨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이 세상에 화평의 복음을 주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시 그를 살리셔서 사람들에게 보이시된 특히 부활의 증인이 될 제자들 앞에 나타나게 하셨다. 그리고 이 사실을 증언하는 사명을 위해 제자들을 세우셨다. 오늘 우링도 이렇게 복음의 증인으로 부르셨다. 우리는 어떤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를 했다.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리고 그의 설교의 특징은 34~35절을 통해 먼저 자신의 견고한 편견이 하나님의 은혜로 깨뜨려졌음을 고백했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새번역).” 또한 39절에서는 자신들이 예수의 증인임을 밝힌다.
 
*증인이란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사람이다. 그의 설교는 개념을 설명하거나 각종 이론을 들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의 설교는 “증언”이었다. 그는 설교를 잘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올바르게 증언하는 사람이었다.
 
*오늘 나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연구하여 논리적으로 감동적으로 잘 연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내가 회복되고 살아난 경험을 증언하는 설교가 가장 탁월한 설교라는 것이다. 잘하는 설교보다 올바른 증언이어야 한다.
 
*이 증언을 고넬료와 함께 들은 식구들과 친구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다. 마음의 감동이 임하였다.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 감격과 감사의 마음이 일어나고 깨달음이 생기는 것은 성령의 임재의 결과(요 14:26)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나는 늘 설교를 잘하고 싶다. 그런데 잘하는 설교가 무엇일까? 오늘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 선명하게 깨닫게 된다. 잘하는 설교란 올바르게 하는 것이다. 올바른 것이란 말씀이 말씀을 들려주게 하는 것이다. 나는 단지 말씀을 전하는 증인일 뿐이다. 말씀을 통해 회심이 일어나고 말씀 때문에 생각이 일깨워지고 말씀 때문에 변화를 주저하지 않는 삶으로 구령하는 것이 올바른 설교가 아닐까? 나는 오늘도 소위 “잘”하는 설교보다 올바른 설교를 꿈꾼다.
 
 
 
*주님, 복음은 세계관의 변화임을 깨닫습니다. 이제껏 알고 있던 것에서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심을 더 직시하는 마음과 시선을 구합니다.
*주님, 나의 시각을 고수하기 보다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시선으로 세상을 보겠습니다.
*주님, 잘하는 설교보다 올바른 설교를 하고 싶습니다. 늘 도와주시는 것을 의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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