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이방인들의 교회 [행 11:19-30]
 – 2024년 05월 26일
– 2024년 05월 26일 –
스데반의 죽음으로 흩어졌던 헬라파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수리아의 수도 안디옥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비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한다. 이에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파견한다.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사울을 다소에서 데리고 온다. 안디옥 교회는 지역 사회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흩어진 자들이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함으로써 형성된 안디옥 신앙 공동체는 여러 면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귀감이 된다. 그들은 어려움을 겪는 형제들에게 구제 헌금으로 형제애를 보였고, 아픈 자와 함께하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할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울러 바나바는 옛 친구를 경쟁자가 아닌 동역자로 세워 협력 목회의 아름다운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기쁘게 사용하신다.
    
    
    
1. 안디옥 교회의 탄생(19~24절)
안디옥에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세워지게 된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사건이다. 초대교회의 영향력이 지리학적으로 확장되어 나갈 뿐만 아니라 이방인 선교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신자가 되기 위해 할례를 받거나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며 교회 내에서도 수적인 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유대교와 관련한 율법의 문제는 예루살렘에서 온 “할례에 속한 자들”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직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참고_갈 2:11~14).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를 피해 흩어진 자 중 일부가 먼저 베니게에서 복음을 전했고 일부는 배를 타고 구브로로 건너가 복음을 전했다. 구브로는 오늘날 키프로스로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했다(행 4:36). 또한 이곳은 나중에 바나바와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 가장 먼저 전도한 곳이다(행 13:4~12). 또한 이들 중에서 수리아의 수도인 안디옥에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있었다. 당시 안디옥은 로마와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도시였는데, 약 50만 명이 거주하였다. 당시 유대인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었고 셀레코스 왕조의 셀루커스 1세가 아버지 안티오쿠스 왕을 기념하여 세운 도시 중 하나였다. 당시에는 “안디옥”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가 열여섯 개나 있었고, 비시디아에도 안디옥이 있었다.
    
그런데 흩어진 자들이 안디옥에 이르러서는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한다. 이들은 이방인 헬라인을 의미하는 “헬레나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지칭할 때는 “헬레니스타스”를 사용했는데, 이미 19절에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했기에 분문의 “헬라인”은 이방인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방인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는 것은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독립적인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복음을 제대로 전했다. ‘누가’는 그들의 복음 전파를 “주 예수를 전파하니(20절)”라는 말로 선명하게 요약한다.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도 예수를 “주(퀴리오스)”로 전하는 새로운 선교 전략이 시작된 것이다. 즉 전하는 대상에 따라 복음의 강조점을 달리하는 전략으로 흩어진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21절)”라는 표현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전하는 자의 뛰어난 능력(말솜씨)보다는 그들과 함께하신 “주의 손”이 그들의 복음 전도 활동의 배후에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안디옥에 헬라인이 주 예수를 믿어 교회를 이루었다는 소식은 예루살렘 교회까지 전해진다(22절). 이에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파송한다. 이렇게 한 이유는 안디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나 거부감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안에 유대교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 성향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지나친 우려를 진정시키기 위해 파견했을 가능성이 크다. 바나바는 비록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지만 예루살렘 교회 내에서 두터운 신뢰를 받아왔고, 히브리파 신자들과 헬라파 신자들을 중재하는 역할을 잘 감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유일하게 바나바에게 “착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또 그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언급한다(24절).
    
    
    
2. 바나바와 사울의 협력(25~30절)
안디옥에 도착한 바나바는 안디옥 공동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새로 믿게 된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굳건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킬 것을 당부한다(23절). 이러한 당부는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안디옥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들은 영적 통찰력에서 비롯되었다(24절). 이와 같은 결정으로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하게 되었다.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25절).”
    
놀라운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찰하고 안디옥 교회의 가능성을 본 바나바는 자신과 함께 동역할 사람으로 옛 친구 사울을 부르기 위해 다소까지 내려간다. 바나바는 사울을 동역자로 선택했다. 함께 무엇을 동역했을까? 그들이 성도들과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26절)”라는 표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일 년간 교회(건물)에서 모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도들과 함께 모였다(they met with the church)는 의미이다. 즉, 성도들과 모임을 지속해서 가졌다는 의미다. 이에 근거하여 바나바와 사울이 함께 한 사역은 “가르치는 것”이었다(26절). 그들은 신자들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26절 하).”에서 “그리스도인(크리스티아노이)”라는 표현은 헬라어가 아니라 라틴어이다. “크리스토스 + 사람을 나타내는 “이아노이”의 합성어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신조어이다. 한편 안디옥 시민들이 신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겠지만, 조롱과 조소의 의미도 함께 들어있다(참고_행 26:28; 벧전 4:16). 실제로 초대교회 구성원들은 “제자”나 “성도” 혹은 “형제”로 불리기를 더 좋아했다.
    
27절에는 “선지자”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선지자는 당시 순회 복음 전도사역을 하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말씀을 가르치기도 하고 때로는 앞날의 일을 예언하기도 했다. 이들이 왜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까지 이르렀는지에 대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누가’는 그중 한 사람인 “아가보”가 천하(온 로마 제국에 걸쳐)에 큰 흉년이 들 것을 예언했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이 예언이 글라우디오 황제 때 성취되었다고 기록한다(28절).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당시 여러 차례 흉년이 있었다고 전하고,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도 주후 46년경 유대 지방에 흉년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의 관심사는 단지 아가보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는다. 이런 가뭄 탓에 고통당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향해 안디옥 교회가 보인 성숙한 신앙과 형제들을 향한 사랑의 모습을 부각한다. 안디옥 교회는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구제 헌금을 보내기로 하고 그 결정을 실제로 행동에 옮겼다. 이런 안디옥 교회의 모습은 예루살렘 교회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행 2:45; 4:35)” 물건을 나누었던 모습과 맥을 같이한다.
    
    
    
나는?
-흩어진 증인, 확산하는 복음. 스데반의 일로 벌어진 박해는 많은 복음 전도자에게 안정된 삶과 사역의 터전을 빼앗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부활의 증인들의 파송식으로 삼으셨다. 그들 중에서 베니게와 구브로 출신들을 통해 안디옥의 유대인들이,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들을 통해 헬라인들이 복음을 듣고 영접하였다. 또한 주의 손의 역사를 보고 개종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어떤 조건이나 상황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직면한 어려운 상황들이 있다면 이도 역시 하나님의 권능으로 선하게 이끄실 것이다.
    
    
-성장하는 교회, 파송되는 지도자.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의 소문을 듣고 구브로 출신들이 세운 교회에 구브로 출신 바나바를 보내서 목회를 돕게 한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안디옥 교회 초신자들을 잘 양육하여 더 큰 성장을 가져온다.
    
-이처럼 오늘날의 건강한 교회는 지도자들이 각각 은사를 따라서 전도하여 교회를 세우거나 신자들이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나누어 잘 맡았기에 교회가 건강하게 잘 자란 것이다.
    
    
-성숙한 동역, 열매 맺는 교회. 바나바는 낙향하여 다소에서 십여 년간 잘 사역하고 있는 사울을 안디옥 교회 공동 사역자로 초청한다. 바나바는 수적으로 급속히 성장한 교회를 섬기기에는 역부족임을 인정했다. 그의 겸손함이 놀랍다. 특히 초신자 양육을 넘어서 더 깊은 진리를 가르치려면 신학가 사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울의 합류로 교회는 유대교의 분파가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성격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말씀이 건강하고 성숙하게 가르쳐질 때 일상에서 말씀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또한 안디옥 교회의 성숙은 기근으로 고통받는 유대 형제들을 돕는 결정으로 열매 맺는다. 자기만 드러내려고 안달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바나바처럼 숨은 일꾼을 발굴하여 기회를 주는 지도자들이 많아진다면 그리스도인 다운 성도들과 교회다운 교회가 지속해서 세워지지 않겠는가!
 
 
*복음에는 변혁과 확장성이 있다. 변혁에 이르지 못하는 그리스도교는 건강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주님의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혁시킨다. 그런데 역사 속에 존재하는 교회는 변혁보다 수비에 경도된 경우들이 많았다. 중세 천년의 교회가 그랬다. 그리고 종교개혁 500년이 넘는 개신교도 그 길을 따라가고 있다. 교회와 신학에서 ‘보수주의’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되는 것을 보면 복음에 내포된 변혁성이 얼마나 심하게 뒤틀려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은 확장성을 갖는다. 진정한 복음은 폐쇄적이지 않다. 개방적이어서 누구와도 어울려 상대를 복음 가치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다. 복음이 세속 문화를 만나면 부드럽게 공격하여 세속 문화를 정복하고 변화시킨다. 그런데 교회 스스로 확장성을 포기하고 자기 파괴적이거나 폐쇄적으로 자기 안주에 머무르려고 하는 경향성을 가지므로 복음에 담긴 영원성과 우주적 가치를 스스로 폄훼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기독교는 무능하고 무력하고 무책임하다. 당당하게 세속 문화를 맞서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복음의 변혁성과 확장성, 오늘의 교회가 잊지 말아야 하겠다.
 
*초대교회는 유대인의 핍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혁과 확장을 체험한 첫 번째 교회이다.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찬송처럼 모진 풍파를 겪으며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을 경험하였다. 스데반에게 가해진 핍박을 본 처음교회 교인들은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흩어졌다. 그런데 그들은 도피한 곳에서조차 주님의 도를 전했다. 처음에는 유대인에게만 전하다가 구브로 사람과 구레네 사람 몇이 안디옥에 이르러서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주 예수를 전하였다(11:19~20).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 수많은 사람이 믿고 주님께로 돌아왔다”(새번역_11:21)
 
*하나님의 말씀이 비로소 유대인의 벽을 넘기 시작하였다. 지금 우리에게는 별로 신기해 보이지 않으나 당시로서는 아주 큰 신학적 문제였다. 처음교회는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냈다. 성령님의 역사를 확인하고자 함이다.
 
*안타깝게도 변혁과 확장성을 상실하고 있는 교회를 보며 마음이 아프다.
 
 
 
*주님, 주의 손이 나와 함께 하기에 더욱 담대하게 복음으로 살겠습니다.
*주님, 바나바의 착함과 영성과 믿음을 도전받습니다. 내가 기준이 아니라 주님이 기준이 되겠습니다.
*주님, 말씀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운 그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것을 봅니다. 도울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주신 것을 헛되이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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